291화. 무백입니다
"이제 그만 끝내자꾸나!"
현황의 온몸에서 회색빛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양팔을 휘젓자.
콰쾅! 콰콰쾅!! 쾅! 콰콰쾅!!
패력멸신천살시 네 개가 모두 폭음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현황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우문가율은 허탈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남은 힘을 모두 끌어다 쓴 것인데.
저런 모습이라니.
지금까지.
저 괴물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인가?
"흐흐. 이제 제법 농익었구나. 그러면 수확을 해야지."
저벅.
저벅.
여전히 온몸에서 강기를 뿜어내며.
현황이 우문가율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입술을 질끈 깨문 우문가율은.
허리의 검을 뽑았다.
역수로 쥔 검.
'아니야. 아직 좀 더··· 연아가 최대한 멀리 갈 수 있게.'
부디 그 아이가 칠채봉환의 금제를 풀고 전력으로 안경을 향해 달렸으면.
그리고 그 아이를 찾고 있다는 대단한 고수.
하무백을 무사히 만나기를 바랐다.
검에 묵강이 맺혔다.
최후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겠다 마음먹은 터.
"이제 슬슬 시작해야지."
현황이 손을 가볍게 휘젓자.
서걱.
우문가율의 오른쪽 어깨의 옷자락이 잘려 나갔다.
보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났다.
현황의 음흉한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눈에 찬 음욕은 진하디 진해졌다.
"다음은······."
다시 손을 들던 현황.
이를 악물고 검을 뻗으려는 우문가율.
"응?"
현황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얼이 빠져 있었다.
이년에게 집중하느라.
안경에 있던 놈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것을 놓쳤다.
그는 재빠르게 몸을 돌리며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에서 뻗어나가는 대력금강장의 장력.
주변에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쾅!
거대한 충돌음이 들리고.
한 사내가 바닥에 내려섰다.
"제법인 놈이로구나. 그냥 그곳에 있지 그랬느냐. 그러면 목숨을 부지했을 터인데. 본좌가 지금 좀 급해서 네놈을 빨리 죽여야 할 것 같구나."
현황이 떠드는 말은 하무백의 귓등으로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무백은 그저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오른쪽 어깨 부근의 옷자락이 잘려 살결을 살짝 드러낸 채.
필사의 각오를 한 여인.
우문가율이었다.
"맞군요."
담담하게 말하는 하무백.
허나 그의 내면은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다는 감격.
다행히 무사하다는 안도.
저 빌어먹을 땡중에게 저리 당했다는 분노.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안이함과 방심에 대한 격노.
그런 온갖 감정들이 혼돈을 이루고 있었다.
"누구?"
자신을 아는 듯한 사내의 말에 우문가율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무백입니다, 은인."
애써 담담하게 말하는 하무백.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던 우문가율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기억에 있는 말이다.
'무백입니다, 은인.'
십수 년 전.
작은 여동생을 데리고 있는 한 사내아이를 도와줬을 때.
그 아이가 자신을 소개한 한 마디였다.
그와 똑같은 어조로 똑같이 말하는 사내.
모습도.
목소리도 바뀌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아이다.
그 아이가 장성하여 이렇게 나타났다.
그것도 저 괴물의 장력을 해소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가 되어.
퍼뜩 드는 생각.
하무백이라는 이름과 대단한 고수라는 문인백송의 칭송에 가까운 칭찬.
그렇다면.
그 대단한 고수 하무백이.
바로 자신이 구해주었던 무백이라는······.
아아!
세상의 인연이 이럴 수가 있구나!
우문가율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눈이 떨렸다.
이리 재회를 할 줄을 몰랐기에.
너무도 대견한 모습에 흐뭇함에.
적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지금 자신이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에.
우문가율의 눈빛은 복잡했다.
"크흐. 본좌를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지?"
그 말과 함께 현황이 하무백을 후려쳤다.
회색빛 강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손바닥으로.
쾅!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현황의 손바닥은 중간에 멈춰 서있었다.
거기에 틀어박힌 하무백의 주먹.
검은 강기로 덮여 있었다.
"일단 이 새끼부터 정리하겠습니다."
하무백은 우문가율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정중히 말했다.
"하?"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현황.
제법 강한 놈이긴 하다만 감히 자신에게?
현황의 손이 다시금 어지러이 움직였다.
쾅 콰쾅! 쾅!
두 사람의 손바닥과 주먹이 어지러이 어울리며 요란한 폭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 모두 현재 선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공방을 주고받았다.
한 수, 한 수가 어마어마한 거력을 담고 있었으나.
둘 중 그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타격을 입지도 않았고, 타격을 주지도 못했다.
우문가율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단한 고수라고 듣기는 했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하무백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익숙한 느낌이 든 탓이다.
어떻게?
저렇게 음습하고 불길함을 줄줄 흘리는 무공이?
마교나 혈교의 무공 못지않게 기분 나쁜 무공이었다.
움직이는 초식 하나하나는 소림의 무공이 맞았다.
다만 거기에 담긴 내공이 문제였다.
이것은 사파의 사공이 청명해 보일 수준이었으니까.
사파라면 이를 갈고, 지금도 사파의 무인을 생포하겠다고 나선 소림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소림에서 나온 놈이 이런 모습이라니.
"네놈은 뭐지?"
결국 하무백이 물었다.
현자배인데 알지 못하는 땡중 놈.
거기에, 사용하는 무공은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익숙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는 네놈은 뭐냐?"
그것은 현황 역시 마찬가지인 듯.
둘은 잠시 떨어져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서로를 탐색하는 두 사람.
"흐음··· 설마하니······."
상대를 먼저 알아본 것은 현황이었다.
"네놈도 나와 동류였던 것이냐?"
본질을 보는 눈.
그것이 현황이 가진 힘 중 하나다.
그런 현황은 하무백의 무공의 본질에 접근했다.
허나.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눈으로도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무공.
그런 무공이 있을 리가 있었다.
없지 않았다.
바로 자신이 익힌 것과 동류의 무공.
자신의 무공이 오직 한 가지 길로 뻗어나간 것도 아니고.
동류냐는 말에 하무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현재.
하무백 역시 무극명륜안을 운용 중이었다.
처음이었다.
무극명륜안으로 그 내공의 연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무언가 거대한 힘이 보였으나, 정확히 그 성격을 알 수가 없었다.
뿌옇게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적대감이 느껴지는 힘이었으나, 익숙했고 반대로 반드시 취해야 할 힘 같이도 느껴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단목운뢰의 허무호연심결을 접했을 때.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을 접했을 때.
느꼈던 어딘가 익숙한 느낌.
그것과 같은 느낌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지독한 혐오감이랄까.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혐오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취해야 할 것만 같다니.
'이게 대체······.'
현황은 자신의 모든 힘을 끄집어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눈썹은 새발갛게 변했고, 두 눈은 당장에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이 붉었다.
하무백 역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묵빛 강기가 온몸에서 넘실거렸다.
"어디서 온지 모를 놈이 본좌의 전력을 다하게 만들다니. 놀랍구나. 허나 그뿐이다. 이제 그만 부처 놈의 품으로 가거라!"
회색 강기가 소용돌이치며 뻗어 나와 하무백을 향해 쏘아졌다.
모두 열 방향.
하무백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열 개의 검강이 열 개의 강기의 소용돌이와 부딪혔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울었다.
두 사람은 다시 부딪혔다.
쾅!
창!
채챙!
콰쾅!!!
우문가율은 두 사람이 벌이는 전투의 여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공방은 치열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잘 어울리는 검무와도 같은 광경.
서로를 적대하며 사력을 다해 공격함에도 묘하게 합이 맞아 어울려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하무백이 그런 사실을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흐음."
잠시 물러난 현황.
그는 수상쩍다는 눈으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네놈. 태초를 아느냐?"
"무슨 말이지?"
되묻는 하무백.
눈살을 찌푸리는 현황.
"하면 심연을 만났느냐?"
이번에는 하무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인가.
"그 무공을 익히면서 태초의 의지인 심연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고?"
현황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럴 리가.
자신과 이렇게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공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이미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
빌어먹을 사형 놈이 가지고 있는 봉인구가 아니고서는 자신을 곤란케 하는 것이 없어야 할 터인데.
자신과 막상막하로 싸우고 있는 이놈.
분명 태초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장경각에 태초의 파편이 만들어낸 조각들이 있었으니.
저놈도 그 비슷한 것을 어디선가 얻었을 것이다.
하무백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심연을 듣지도 만나지도 못했다는 게로구나. 우연히 운이 좋아 그 무공을 얻었나 보군. 심연을 모른다면 내 상대는 되지 못할 터. 이제 그만 끝내자꾸나. 본좌는 저기 저 여인과 운우지락을 나눠야 할지니."
회색빛 강기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하나의 거대한 채찍이 되어 하무백에게로 날아갔다.
서걱.
묵검강이 회색 강기를 잘랐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되는 건 아니지. 방금 그 말로 인해 네놈의 제삿날이 결정되었다. 내년 오늘이야."
현황을 향해 쏘아져 날아가는 하무백의 신형.
검강이 줄기줄기 뻗어 나와 현황을 베어 갔다.
캉!
현황의 몸에서 네 개의 강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와 하무백의 검을 막았다.
마치 문어의 다리인양.
몸에서 강기가 뻗어 나와 움직인다.
모두 여덟.
촉수인지, 문어의 다리인지.
그런 형태의 강기가 하무백의 사방을 점하며 찔러왔다.
하나하나 날카로운 예기는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거력을 담고 있었다.
하무백은 무극여의검해를 펼쳐 그 강기를 모두 쳐냈다.
그럼에도 끝없이 날아왔다.
그 와중에 현황의 두 손은 소림의 권법을 착실히 펼치고 있었다.
백보백련신권.
아름다운 연꽃을 그려내는 그 두 주먹에는 흉측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쾅!
땅이 다시 한번 울린다.
하무백이 몇 발 물러서나 싶더니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펼쳐지는 일 검.
무극여의팔절검해.
이절.
단하.
단번에 쪼개버릴 기세로 펼친 검.
현황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의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드디어 알아봤다.
저렇게 펼치니 보였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그러니 좀처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 말고도 설마 둘을 지닌 인간이 있었을 줄이야.
거기에다가.
저놈은 왠지 온전한 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처럼 불완전한 둘이 아닌.
'그래봐야 심연을 모르는 애송이.'
현황의 주먹의 움직임이 변했다.
암흑과 혼돈이 뒤섞인 힘.
암혼멸세파황권(暗混滅世破荒拳).
현황이 장경각 구석진 곳에서 발견했던.
암흑과 혼돈의 조각이 뒤섞인 그 무공.
심연이 현황의 뇌리에 박아 넣어줬던 그 무공이.
십수 년의 세월을 격하고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폭풍이 휘몰아쳤다.
하무백과 현황은 동시에 뒤로 주르르르륵 밀려났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하무백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무극여의팔절검해를 이토록 완벽하게 막은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하무백이 어느 경지를 넘어선 이후.
무극여의팔절검해가 막힌 적은 없었다.
"네놈··· 아무래도 내 힘에 상극인 조각을 손에 넣었나 보구나."
현황이 양손을 가볍게 털며 말했다.
저릿한 느낌이 팔까지 올라왔다.
이번 격돌은 현황의 손해였다.
하무백은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였으니.
아마도 무극, 광휘, 여의 이 셋 중 하나를 얻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암흑과 혼돈.
두 가지 종류의 태초의 파편을 가지고 있는 자신과 이리 대등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얻은 암흑과 혼돈이 온전한 파편이 아닌 조각이기는 했지만.
'다른 조각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저 잡놈을 갈가리 찢을 수 있었다.
다른 조각의 소재는 알고 있다.
이미 심연이 알려 주었으니까.
그 조각을 찾기 전에 사부에게 제압당해 참회동에 갇혔다.
이번에는.
현황의 시선이 하무백의 뒤 멀리 어딘가로 향했다.
잡았던 계집.
그 계집만 데려가면 손쉽게 조각을 찾을 수 있을 터인데.
빈손으로 돌아가면 사형 새끼가 바로 주문을 외울 터.
그렇다고 지금 이놈을 넘어서 그 계집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바로 장경각을 친다.'
그렇다면 사형이 주문을 외기 전에 속전속결로 조각을 찾는다.
현황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계집의 경우는 모종의 조치를 취해 둔 것도 있기는 했고 말이다.
사형이 주문을 외려 한다면, 그 안배를 말해주면 어떻게든 될 터다.
그의 몸에서 다시 회색 강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번에 선공은 현황이었다.
그가 전력으로 펼치는 암혼멸세파황권이 하무백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