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292화 (292/312)

292화. 그 또한 인연인 게지

천지사방에서 하무백을 향해 날아오는 어마어마한 권강의 세례.

그 힘은 엄청났다.

마치 혈교의 교주를 상대할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소림승을 상대하는데 혈교 교주를 떠올리다니.

우스운 일이다.

하무백이 검을 들어 휘둘렀다.

자신을 옭아매려는 듯한 권력은 음습하고 찐득하게 사방을 장악하며 다가왔다.

검강에 잘려가는 기운들.

허나 끊임없이 현황의 몸에서 다시 흘러나왔다.

마치 팔이 여덟 개가 된 듯한 공격.

두 주먹에 합일된 강기와 몸에서 솟아 나온 강기의 촉수가 하무백의 몸을 갈가리 박살 내겠다는 기세로 날아들었다.

하무백의 검은 빠르게 움직여 그 여덟을 모두 막아냈다.

눈살을 찌푸린 하무백.

파르라니 빛나는 민머리에, 자신을 향해 짓쳐 드는 여덟 방향의 공격.

"대머리에 팔이 여덟이라. 문어 새끼도 아니고."

하무백이 이죽거렸다.

"갈! 시건방지구나. 감히 천수관음의 형상을 빌려 온 본좌의 모습이 뭐라? 문어?"

현황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무백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감히 입에 올릴 대상이 없어서 천수관음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타락한 파계승만도 못한 땡중 새끼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대자대비한 관음보살을 자신에게 비견한단 말인가.

그 말을 한순간.

촉수가 순식간에 스무 개로 늘어났다.

그야말로 하무백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점한 것이다.

'많다면 모두 베어내면 될 뿐.'

하무백의 두 눈이 빛났다.

"문어구이로 만들어 주마."

"이 새끼가 그래도!"

현황이 버럭 하는 순간.

하무백의 검이 움직였다.

무극여의팔절검해.

삼절.

분뢰(分雷).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울 듯 쪼개진 뇌전의 검이 현황의 촉수를 향해 날아갔다.

파직. 파지지직.

뇌기(雷氣)가 현황의 촉수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삿된 기운과 상극인 뇌기.

분뢰가 삿된 기운의 촉수들을 불사르며 거슬러 올라가 순식간에 현황에게 짓쳐 들었다.

"이익······."

현황은 모든 기운을 끌어올렸다.

회색 강기가 점점 단단해지며 하무백의 검에 대항했으나.

쩌정.

깨졌고.

"크아악."

비명을 지르며 현황이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명백한 그의 손해.

그런 줄 알았다.

헌데.

분뢰가 현황의 강기를 깨뜨리고 그를 공격하는 힘을 이용해.

오히려 하무백과 거리를 벌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달렸다.

"네 이놈! 무백이라 하였으냐!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네놈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갈가리 찢어 죽일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하무백은 당장에 쫓아서 끝장을 낼까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분뢰를 펼치며 손에 느껴진 감각 때문이다.

분명 커다란 타격을 준 것 같았으나, 손맛이 심심했다.

저놈은 아직 여력이 있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당연히 하무백 자신이 이길 터이나.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해서.

하무백은 어깨에 빗겨 메고 있던 활을 왼손에 쥐었다.

자신의 것은 아니었으나.

한 번 정도 빌려 사용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오른손으로 활시위를 쭈욱 당겼다.

아무것도 없는 빈 활을 당긴 하무백.

백색의 강기가 사일자뢰궁에 맺히는가 싶더니.

빈 시위에 강기가 모여들어 화살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시강(失罡)을 넘어서 순수한 강기만으로 이루어진 화살.

화허시강(化虛失罡).

하무백이 시위를 놓는 순간.

백색의 순수한 강기로 이루어진 화살은.

이제는 점이 되어 멀리 달아나는 현황의 등판을 노리고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그의 경공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하무백이 쏘아낸 화허시강만큼은 아니었다.

"크아아악. 너 이 새끼. 반드시 내가 죽인다! 기다려라!!"

멀리서 들리는 현황의 비명과 원독에 가득 찬 외침.

화살은 현황의 왼팔에 꽂힌 듯했다.

일단은 이 정도면 되었다.

지금 이곳에 은인이 있었다.

그분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공야휘연도 있었고.

'조만간 소림에 가서 현광 땡중을 족쳐야겠군. 소림에 저런 존재를 숨겨두고는··· 사파를 처단한다고 하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현황이라는 저 괴승을 소림에서 구금하거나 징벌하고 있다면 달랐으리라.

헌데 사파의 여인을 잡아 오라고 세상에 풀었으니.

그 순간 소림은 사파를 처단할 명분을 잃은 것이다.

현황이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던 하무백.

이내 시선을 돌렸다.

우문가율이 하무백을 지켜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은인."

"훌륭히 장성했군요.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우문가율이 기품있는 모습으로 하무백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전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은인. 십구 년 전. 그때처럼 그냥 그리 대해 주십시오."

하무백이 당황하여 세차게 손을 내저었다.

허나 어찌 쉬이 그럴 수 있을까.

하무백은 이미 장성한 성인이었다.

그뿐일까.

사해련의 군사인 문인백송조차 조심스레 대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문인 군사께 듣기로 하무백이라는 대단한 고수가 딸아이, 공야휘연을 찾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던데······."

"네. 그게 접니다, 은인. 공야휘연. 그 아이는 이미 찾았습니다. 어머니를 도와달라고 하여 제가 급히 달려왔습니다."

"휘연의 어미가 저인, 아니 나인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우문가율은 어색하게 하무백에게 평어를 사용했다.

그가 눈앞에서 보여준 신위 때문인지, 평대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고작 이틀을 함께 한 사이였다.

그것도 십구 년? 정도 전에.

어찌 생각하면 처음 만난 사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림의 중 하나에게 들었습니다. 이 활의 전 주인에 대해서."

하무백이 여전히 왼손에 들고 있던 사일자뢰궁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이내 깨달았다는 듯.

우문가율을 향해 활을 공손히 내밀었다.

"아, 주인께 돌려 드리겠습니다."

우문가율은 사일자뢰 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형태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자신이 한창 전장에서 사용할 때는.

이런 아름다운 칠채의 빛깔은 보여주지 않았다.

백금빛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막상 사일자뢰궁이 자신에게도 숨겼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금 섭섭했다.

병기에게 섭섭함이라니 우스운 일이다.

우문가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사일자뢰궁의 전 주인인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전 주인. 지금 주인은 다른 사람이야."

누구를 말함인지 하무백은 잘 알았다.

처음 평범한 형태의 사일자뢰궁을 봤던 것도 그 아이가 가지고 있을 때였으니까.

"알겠습니다."

하무백은 사일자뢰궁을 다시 어깨에 빗겨 메었다.

"지금 보니, 무백 네가 그 궁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어진 우문가율의 말에 하무백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검을 사용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저 녀석의 저런 모습은 나도 처음 보는구나. 조금 전의 그 솜씨도 그렇고."

하무백은 우문가율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았다.

"제 기억과는 빛깔이 좀 달라서 놀라기는 했습니다."

"그 아이가 사용할 때 이런 모습이 되었을 리는 없고."

"휘연이 어느 마을의 말라버린 우물에 사일자뢰궁을 숨겨두었습니다. 소림의 반야보리심안을 사용한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요. 소림승들이 이것을 발견하려 하기에, 제가 회수했지요."

하무백의 설명.

우문가율은 신기하다는 듯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 녀석이 무백, 네 무공에 반응한 것이고? 신기한 일이구나. 이 녀석은 정파의 무공에는 반응하지 않는데."

항산도 그리 말했었다.

사파의 무공에만 반응한다고.

지금 우문가율 역시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음이니.

하지만 하무백은 사파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파의 무공도 아닌 것인가?'

기억을 곰곰이 거슬러 올라가 보니, 사부가 정파라 말한 적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익힌 무공의 성향과 특징이 정파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기에.

단순히 정파라 생각했다.

당시 하무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혈교와 마교 놈들을 박살 내는 것이었으니까.

"저도 신기했습니다. 갑자기 형상이 변해서. 뭐, 덕분에 은인께서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형상만은 제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으니까요. 마침 이 활에 대해 잘 아는 중이 하나 있더군요."

하무백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렇구나. 그 또한 인연인 게지."

"저와 란이 때문에 고초를 겪고 계시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하무백은 미소를 지우고는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 또한 인연일 뿐이야."

우문가율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보다 연아는?"

하무백이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금제를 풀고 안경으로 가 있으라 했는데, 과연 그녀가 자신의 말을 따랐을까?

'역시 똑똑해.'

따랐다.

안경의 한 객잔에서 그녀의 내공이 똑똑히 느껴졌으니.

"무사히 안경에 들어섰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하무백의 말에 우문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땅을 박차고 경공을 펼쳐 안경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하무백이 기감을 최대한으로 넓게 펼쳐 주변을 살피는 한편.

안경으로 기감을 집중해 공야휘연의 상태 역시 살폈다.

잠깐의 간격을 두고 기감의 형태를 번갈아 바꾼 것이다.

'아까도 이렇게 했다면······.'

그렇다면 현황의 접근을 훨씬 빨리 알아차리고, 사달이 벌어지기 전에 그를 막아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무백이 힐끔 우문가율의 잘린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녀가 급한 대로 수습했기에 살결이 훤히 드러나지 않았다.

아주 작은 틈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정도.

'저런 치욕을 겪으시지도 않았을 텐데.'

자신이 부족하고 안이한 탓이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경공을 펼치는 하무백.

간간이 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우문가율과 나누던 중.

하무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니?"

갑자기 말이 없어진 하무백의 모습에 우문가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무백은 말을 아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어졌다.

그저 경공을 펼칠 뿐.

하무백은 공야휘연의 내공을 느끼는 기감에 집중했다.

'뭐지?'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그녀의 내공에 섞여 있었다.

기감으로 알아차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극명륜안으로 직접 살펴야 할 것 같았다.

공야휘연의 내공을 자세히 살폈기에 알 수 있었다.

그저 이전처럼 대강 살폈다면, 어쩌면 놓쳤을지도 모를 아주 작은 이질적인 기운이다.

물론 무극명륜안이라면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그녀를 볼 때 굳이 무극명륜안을 펼칠 이유가 없었으니.

다시 때를 놓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현황. 그 새끼 짓인 것 같은데······.'

이질적이긴 했지만.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현황밖에 없었다.

그 새끼에게 붙잡힌 후에 처음으로 내공의 금제를 풀었던 것이니.

하무백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달리고 있는 곳과 정반대의 방향.

현황이 도주한 곳.

어쩌면 숭산으로 향할 시간이 더 빨라질지도 모를 모양이었다.

안경에 들어서는 순간.

우문가율은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미모가 어떤 여파를 미치는지 수없이 경험했기에.

하무백이 앞장서 안경의 길을 걸었다.

우문가율은 그런 하무백의 뒷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큰 도시에서.

이다지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찌 휘연의 기척을 정확히 느끼고,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저리 거침없이 갈까.

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 저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때.

여동생을 지키겠다는 간절함과 독기만을 지녔던 아이가.

십구 년의 세월 동안 어찌도 이리 변했을까.

대강 듣기는 들었다.

인연이 닿아 훌륭한 사부를 만나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누구나 저런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재능과 근골을 타고나야 가능한 일.

지금은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 같지 않은가.

어찌 당시에 저 아이의 근골조차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알고 보면 나도 눈뜬장님이나 다름없었을지도.'

그럼에도 당시 자신이 한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만약.

그때.

자신이 저 간절한 아이를 그냥 지나쳤다면.

지금 이 대단한, 그 끝을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수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여기입니다."

하무백의 걸음이 멈췄다.

제법 규모가 있는 객잔의 앞이었다.

저곳에.

딸아이 공야휘연이 있다.

현황에게 잡혔을 때 보았지만.

사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필사적이었다.

온전한 제정신으로 딸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우문가율의 가슴이 살짝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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