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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293화 (293/312)

293화. 네 것이다

뚜벅. 뚜벅.

하무백의 걸음이 객잔의 나무계단을 울렸다.

우문가율은 그 뒤를 사뿐사뿐 걸었다.

그녀가 지나온 곳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면사로는 다 가릴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으니.

그렇게 도착한 오 층의 어느 문 앞.

객잔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똑똑.

하무백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자신들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냥 문을 열었다가는 적의 습격인 줄 알고 공야휘연이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으니까.

"누, 누구냐?"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하 교관이다."

하무백이 담담히 답했다.

"······."

그 목소리에 답은 없었다.

그저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공야휘연의 기척이 느껴질 뿐.

"지, 진짜 하 교관님인가요?"

조심스레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여전히 갈라지고 거칠었다.

게다가 그녀답지 않은 반응이다. 이번 일로 충격을 크게 받은 듯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의 무력함을 처음 겪었을 테니.

잔뜩 움츠러들고 겁을 먹은 것이다.

그런 딸의 목소리에 우문가율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어렸다.

목소리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성대에 내공을 주입해 목소리를 바꾸는 무공도 있다지만, 딸아이의 경지는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약을 썼다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우문가율 역시 잘 알았다.

'정말 필사적이었구나.'

그 사실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 나다."

하무백의 짧은 대답.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무백은 재촉하지 않고 반응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 어떻게 하 교관님인 것을 증명하실 거죠?"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쉬이 믿지 않았다.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는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바꿀 수 있어요."

즉각 돌아온 대답.

"너. 네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벌인 것인지 알고 있나? 돌아가라. 분명 말했다. 빨리 돌아가라."

하무백은 담담히 말했다.

하투제가 한창이던 때.

목란산에서 하무백과 공야휘연 단둘이 나눴던 대화다.

이 내용을 알고 있는 이는 오직 하무백과 공야휘연 두 사람.

그녀가 그때의 대화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면, 하무백이 맞다는 것을 믿으리라.

털커덕.

조심스레 문의 빗장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그리고 조금 열린 문.

그 틈 사이로 평범한 인상을 가진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공야휘연이 얼굴을 바꾼 모습이다.

그녀는 하무백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이내 문을 활짝 열었다.

"교, 교관님! 어, 어머니는······?"

감격에 찬 목소리. 허나 여전히 갈라지고 거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다.

"여, 연아······."

하무백의 등 뒤에서 흘러나온 먹먹한 말소리에.

공야휘연의 시선이 하무백의 등 뒤로 향했다.

너른 하무백의 등에 가려져 있던 작은 인영.

우문가율.

그녀의 모습을 그제야 확인한 공야휘연.

"어, 엄마!"

그리 외치며 그녀를 와락 안았다.

사내의 모습을 한 딸을 같이 안아 주는 우문가율.

"연아. 연아. 연아."

두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일단 안으로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은인."

내공으로 소리는 차단하고 있었지만.

언제 사람이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다.

하무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우문가율이 공야휘연의 손을 꼬옥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무백도 뒤따라 문을 닫고 들어갔다.

"어디, 우리 딸. 얼굴 좀 보자꾸나."

방에 들어온 후 우문가율이 공야휘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수염까지 거뭇거뭇한 평범한 인상의 사내 얼굴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쓰다듬는 우문가율.

충분히 이상해 보이는 광경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여주는 분위기는 서로를 향한 애틋함과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하무백은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녀 상봉의 순간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창가의 다탁에 조용히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찻주전자에는 이미 식어버린 차가 가득 담겨 있었다.

찻잔에 이미 식은 차를 쪼르르 따라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저 그런 향에, 그저 그런 맛.

흔하디흔한 보통의 차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하무백은 미소 띤 얼굴로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우문가율과 공야휘연.

두 사람에게는 가장 행복한 때 중 하나일 테니까.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서로를 꼭 안고 있던 두 사람은 살짝 떨어졌다. 양팔은 여전히 서로를 안은 채다.

"엄마! 아니, 어머니······. 괜찮으신 거죠? 그 괴승 새끼한테 험한 꼴 당하시거나 그런 건 아니죠?"

공야휘연의 시선이 대강 수습해 둔 오른쪽 어깨 쪽의 옷자락으로 향했다.

"네가 하 대협을 제때 보내 주어서 아무 일 없었단다."

우문가율이 따스한 얼굴로 답했다.

"헌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니? 이 엄마는 우리 딸 본 얼굴을 보고 싶은데?"

"아!"

우문가율의 말에 공야휘연은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잠깐만요."

그제야 팔을 풀고 두 걸음 정도 물러서는 공야휘연.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처음은 목이었다.

목젖이 점점 작아져서 사라진다 싶더니 슬금슬금 위쪽으로 살갗이 말려 올라간다.

이 장면만은 하무백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창밖 쪽을 향해 있던 그의 자세가 어느새 공야휘연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말려 올라간 살갗은 턱 끝을 지났다.

입술이, 뺨이, 귀가, 코가, 눈이 말려 올라간다 싶더니.

이윽고 이마까지 말려 올라가 돌돌 말린 살색의 두루마리 같은 것이 공야휘연의 손바닥 위에 툭 떨어졌다.

그 두루마리가 바로 만환신면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공야휘연의 미모.

눈이 부셨다.

과연 무림오화 중 사이화라는 자리를 차지할 만한 아름다움이었다.

새하얀 손과 누런 얼굴의 괴리감이 사라진.

백옥처럼 하얗기만 한 얼굴.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마주 보는 우문가율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우문가율이 원숙미가 극에 달했다면, 공야휘연은 젊고 풋풋한 아름다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대번에 모녀임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

'진작 공야휘연의 본 모습을 보았다면, 은인의 단서를 얻었을 수도 있었겠군.'

하무백은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공야휘연의 얼굴을 진즉에 확인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만났으니까.

두 사람의 해후가 끝난 듯했기에 하무백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 받아라."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일자뢰궁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아······?"

그러잖아도 하무백을 만난 급박한 와중에도 보았던 활이다.

아름답고도 고아한 그 형상에 남모르게 놀랐던.

그리고 풍기는 기운에서 자신의 애병임을 알았던.

"사일자뢰궁. 네 것이다."

하무백의 말에 손을 뻗었다.

공야휘연이 사일자뢰궁의 활대를 잡는 순간.

하무백과 공야휘연 두 사람이 사일자뢰궁을 함께 쥐고 있게 되었다.

그때.

하무백에게서 공야휘연에게로 넘어간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사일자뢰궁이 은은하게 떨었다.

마치 하무백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거부라도 하겠다는 양.

공야휘연은 흠칫 놀랐다.

분명 자신의 것임에도,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당황한 공야휘연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일자뢰궁의 떨림이 좀 더 거칠어졌으니까.

공야휘연이 우문가율과 하무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문가율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무백은.

"네 것이다.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사이 더욱 거칠게 떨리는 사일자뢰궁.

공야휘연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어, 어머니······."

당황한 채 우문가율을 바라보는 공야휘연.

"네 것이니. 네 내공을 밀어 넣든지, 며칠 그냥 방치하든지 해야지. 지금이야 하 대협의 무공 맛을 봐서 저항하는 거다만. 시간이 해결해 준단다."

어머니의 말에 공야휘연은 자신의 손에서 몸부림치는 활에게 내공을 밀어 넣었다.

당장에라도 내공을 뱉어낼 듯 요동을 치던 사일자뢰궁은.

계속해서 공야휘연의 내공이 들어오자, 이내 포기한 듯 떨림이 점차 잦아들더니 곧 멈췄다.

대신.

그 형상도 바뀌어 있었다.

하무백이 처음 봤던 그 평범한 철궁의 형태로.

궁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도 확연히 줄어 있었다.

그야말로 기물이요, 기병이었다.

"후우······."

공야휘연은 섭섭함과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일자뢰궁을 바라보았다.

그간 자신이 얼마나 아껴주었는데.

물론 도주를 위해서 잠시 떼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런 공야휘연의 심정을 안다는 듯 우문가율의 미소는 좀 더 진해졌다.

"아, 그런데 어머니. 아까 하 교관님이 은인이라 부르던데, 그게 대체······."

공야휘연이 언뜻 들었던 한 마디를 기억하고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옛날의 작은 인연이었단다."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우문가율.

그러나.

"나와 내 동생이 구명지은을 입었지."

하무백이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대답에 공야휘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구명지은이라니.

천하제일인이 구명지은?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아니 그보다 어머니는 그동안 징벌동에 줄곧 갇혀 있었는데 어떻게······.

"내가 열두 살 때의 일이다."

"아······."

그제야 납득했다는 공야휘연의 얼굴.

그때라면 가능했겠지.

열두 살의 하무백이라니.

공야휘연으로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어머니. 열두 살의 하 교관님은 어떠······."

공야휘연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현재 하무백의 나이를 떠올리며 그가 열두 살일 때가 언제 적인지 계산을 하던 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구 년 전.

자신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고 있을 무렵이다. 당시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을 나이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징벌동에 갇힌 시기도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왜 징벌동에 유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그녀 스스로 알아내서 대강 알고 있을 뿐.

헌데 그 시기가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어, 그러니까··· 그게, 어어······."

혼란에 빠진 듯.

공야휘연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문가율이 빙그레 웃었다.

"인연이란 본디 그런 거란다."

그리고 그날의 일을 차근히 설명해주는 우문가율.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하무백도 간간이 말을 보탰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일.

하무백이 몰랐던 우문가율의 일.

우문가율이 몰랐던 하무백 남매의 일.

그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나고.

세 사람은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사해련······.'

하무백은 련주 공야장천을 떠올렸다.

애매하고 복잡했다.

자신의 은인을 그리 대한 것에 분노를 쏟아내야 할지도 몰랐으나.

그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고 하니.

공야휘연의 아비는 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그런 소인배 같은 행동을 한 것인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무백이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공야정문과 우문가율.

그들 부부 사이의 일이었으니.

타인인 하무백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공야휘연은 복잡한 신색으로 하무백과 우문가율을 번갈아 보았다.

자신의 우상인 천하제일인.

그의 어린 시절이 어머니의 유폐의 단초가 되었을 줄이야.

물론 하무백이 잘못한 것은 없다.

그저 일이 그리 흘러갔던 것,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게 공야휘연의 생각이었으나.

가슴 속 심사만은 복잡했다.

굳은 표정의 둘과는 다르게 우문가율은 대견한 얼굴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대강 듣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자세히 들어보니.

대단하고 대견했다.

거기에 병약할 대로 병약해 훅 불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던 그 여자아이도 지병을 고치고 건강해졌다 하니.

그 아이의 모습이 마지막까지 우문가율의 발을 붙들었었다.

자신의 딸과 비슷한 또래에.

지저분하고 초췌한 모습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어여쁜 모습까지.

징벌동에 들어서도 가끔 그 아이가 어찌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이제는 아주 건강해져서.

맹룡대 이 년차로 공야휘연의 선배라 하니.

이리도 기쁘고 대견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의 해후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하무백이 공야휘연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어서. 현황, 그 땡중 새끼가 아무래도 무슨 수작을 부려 놓은 것 같은데."

하무백의 답에.

순간.

무거운 기운이 흘렀다.

공야휘연과 우문가율은 그 괴승의 무위를 겪었으니까.

그런 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다니.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잠시 실례하지."

하무백은 무극명륜안을 운용하면서 공야휘연의 맥문을 잡았다.

자신의 내공을 조심스레 맥문을 따라 흘려 넣으며.

무극명륜안으로 공야휘연 안에 작게 자리한 이질적인 기운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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