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빌어먹을 긴고아
소실봉에 접어든 현황은 기척을 죽였다.
소림사의 경내에 들어가면 그곳은 모두 사형인 현광의 감각 안.
기척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라도 사형 새끼의 기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사형 새끼는 강했다.
정말로 강했다.
그러나 참회동에 갇혀서도 현황 자신은 계속해서 강해졌다.
가진 힘이 그러했다.
금제를 당하고 봉인을 당했음에도 지속적으로 강해지는.
그렇게 강해진 현재의 자신이라면 이제는 사형 놈을 이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음흉한 새끼란 말이지.'
현황이 아는 현광은 음흉하기 이를 데가 없는 인간이었다.
정파 무림의 태두라는 소림보다는 차라리 사파 무림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해서 섣불리 현광과의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금제와 봉인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더 강해졌을 테고, 그랬다면 사형 새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현황의 손이 머리로 향했다.
손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붉은빛이 감도는 금속환이다.
'빌어먹을 긴고아.'
현황의 움직임을 구속할 수 있는 세 가지 봉인구 중 직접 만질 수 있는 유일한 봉인구였다.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금고아(金箍兒), 단전을 옥죄고 있는 금고아(禁箍兒)는 몸속에 틀어박혀 있기에.
만질 수가 없음이니.
사형 새끼는 이 중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놈을 풀어주겠다고 했었다.
그러면 뭐 하나.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은 단전을 옥죄고 있는 놈인데.
사부는 그놈으로 자신의 단전을 부수려고 수도 없이 시도했었다.
'태초의 심연이 그걸 허락지 않았지. 크윽.'
당시의 고통이 다시금 떠올랐다.
터뜨릴 정도로 수축하는 것은 금고아(禁箍兒)만 가능한 것 같았다.
머리와 심장에는 그런 시도를 하지도 않았으니.
어느새 소림의 담장에 다다른 현황은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경각의 위치를 확인하며, 제자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의 위치는 사 층. 북동쪽 서가 십삼 열의 위에서 네 번째 칸.'
세월이 많이 흘렀다.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
아니면 장경각을 관리하는 가운데 옮겼을지.
알 수 없었다.
현황은 그대로 있다는 쪽에 걸었다.
그의 경험상.
장경각의 서책들은 어지간해서는 그 자리가 바뀌지 않았으니.
전각에서 드리운 그림자.
으슥한 구석에 몸을 숨긴 현황의 두 눈이 은은한 붉은빛을 발했다.
본질을 보는 그의 두 눈이 장경각을 살피는 것이다.
소림사 장경각(藏經閣).
본디 열두 개의 커다란 함에 5,480권의 대장경을 보관하던 법당이다.
기원은 그러했다.
대장경은 지금도 일 층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다만, 그 위층으로는 수없이 많은 무공비급과 비서들이 들어차 있었다.
소림 삼대 금지(禁地) 중 한 곳으로 허락 없이 아무나 들 수 없는 곳이다.
경계도 그만큼 삼엄한 곳.
소림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삼십육금강나한들이 돌아가며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열둘인가?'
현황의 눈에 보인 금강나한의 숫자는 모두 열두 명.
그들도 모두 출입구 주변을 비롯한 일 층에 집중되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처사다
소림의 경내를 여기까지 돌파해서 위층으로 침입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천하제일의 신투라면 몰라도.
하지만 그 또한 불가능한 것이.
장경각은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창문이 없었다.
작은 환기구들만이 곳곳에 있을 뿐.
현황은 그 모습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이토록 고민하게 만드는 원인은 당연히 현광이었다.
그가 주문만 외운다면 현황은 단번에 무력화되어버리니.
'사형 새끼는?'
현황이 기감을 넓게 펼쳤다.
소림 경내 전체를 뒤덮는 것은 현광만이 아니라 현황 또한 가능했으니.
'방장실.'
늘 있는 그곳에 있었다.
소림사 한 가운데 위치한 방장실이기에.
이곳 장경각에서 소란이 인다면 금세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인 줄 알면 단번에 주문을 외울 터.
소란을 일으킬 것이라면 현광에게 정체를 들키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현광이 제시한 날까지는 아직 하루 이상의 시간이 남았기에, 설마 자신이 이곳에 나타났으리라 예상치 못할 터이니.
이곳을 지키는 금강나한의 실력을 가늠해보니.
가능은 했다.
다만.
'알고 있는 위치에 없으면 낭패다.'
그러면 걸린다.
대신 조용히 잠입을 해서 뒤진다?
그러면 제 자리에 없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굳게 잠긴 문.
그 열쇠는 금강나한 중 두 사람이 나눠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 둘이 동시에 열쇠를 돌려야 열린다.
장경각 지하의 비고는 방장이 가진 열쇠까지 모두 셋이 필요했고.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는 장경각이라 하지만 자유로이 드나드는 이들은 있었다.
학승(學僧)이 그들이었다.
출입이 허가된 학승들은 정해진 시간에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금강나한이 문을 열어주었다.
기다리다가 학승이 출입할 때 은밀히 들어가는 것이 두 번째 방법.
현황은 오늘 학승이 장경각에 드나들 시간을 가늠했다.
'한 시진 정도 남았나?'
한 시진 후에 장경각의 문이 열린다.
고민에 빠졌다.
무백이라는 그놈의 수준이라면 자신이 그년에게 해둔 안배를 알아보았을 터.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면.
현황 자신을 찾을 터.
심연을 모른다면 절대로 해소할 수 없는 기운이었으니까.
그 새끼는 결국 소림에 올 것이다.
그 전에 조각을 손에 넣어야 했으니.
한 시진을 기다리는 것도 찝찝했고.
도박 수를 시도하는 것도 찝찝했다.
잠깐 더 고민하던 현황의 결정은.
스스슥.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금강나한의 허점 사이를 통과해 장경각의 벽에 도착한 현황은 몸을 솟구쳤다.
정확한 위치에 도달한 현황은 손을 뻗어 환기구 주변의 벽을 부쉈다.
콰지직!
그 소리가 울린 후에야.
금강나한들은 현황의 신형을 알아차렸다.
"침입자다!"
"잡아라!"
뎅! 뎅! 뎅뎅뎅!
금강나한들의 외침과 요란한 비상종 소리.
허나 현황은 이미 부순 공간으로 장경각 내에 진입을 했고.
바로 서가를 확인했다.
'있다!'
천수사리보리경.
단순한 경전의 제목이 쓰인 고서.
현황은 지체 없이 그 불경을 집어 품에 넣고는 반대쪽 환기구가 있는 벽을 뚫고는 그대로 치달렸다.
사형 새끼가 오기 전에 벗어나야 했으니까.
현황은 그대로 소실봉 깊은 산속으로 달렸다.
그가 사라진 후에야 현광이 현장에 도착했다.
"허허. 아미타불. 괴한의 침입이라고?"
금강나한들은 고개를 숙였다.
이곳까지 괴한이 접근하는 것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산문과 소림의 주변을 지키는 제자들 역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현광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장경각의 각주인 현축이 있었다.
"아직 살피는 중입니다만.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불경 하나입니다. 워낙 짧은 시간이었기에 아마 그 하나가 전부일 겁니다. 방장 사형."
현축의 말에 현광은 인상을 찡그렸다.
소림에 침입하여 장경각에 들었는데 겨우 불경 하나를 가지고 도주했다?
그 불경이 무엇이기에?
천하에 이런 일을 벌일 이가 있단 말인가?
"흐음."
침음을 삼키는 현광.
"알았다. 침입자의 색출에 전력을 다해라. 소림의 장경각이 뚫렸다니. 조사들을 뵐 낯이 없구나. 아미타불."
현광의 말에 제자들은 고개를 더욱 깊이 푹 숙였다.
그대로 걸음을 옮긴 현광은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서가로 향했다.
단순히 불경들이 모여 있는 서가다.
흔적을 보니 뚫고 들어와서 빠져나갈 때까지 망설임이 없었다.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서 작정하고 들어온 거다. 그리고 속전속결로.'
"사라진 불경은?"
"천수사리보리경입니다."
현광의 물음에 곁에서 함께 움직이던 현축이 답했다.
"흐음."
인상을 찡그리는 현광.
귀한 불경이기는 했으나, 소림 장경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돈을 들인다면 구하지 못할 불경이 아니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소림에 침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알았다."
모든 곳을 둘러본 후 방장실로 돌아온 현광.
그는 손안의 염주를 가만히 굴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현광 자신이 알고 있는 자들 중 소림사 전체에 펼쳐져 있는 자신의 기감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있는 자들을 추렸다.
소림사의 경계 상태와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자를 다시 추리고.
장경각의 구조 또한 잘 알고 있는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소거했다.
남은 인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인물들은 모두 소림의 사람들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소림의 사람이 아니고서야 소림 경내와 장경각에 대해 해박하게 알기는 어려운 일들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사라진 서책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자.
여기서 다른 이들은 모두 지워졌다.
현광이 용의자로 꼽은 인물 중 학승 출신은 단 하나였으니까.
'현황이다.'
범인을 확신했다.
현황은 애초에 학승 출신이었다.
무승으로 소림에 들어온 녀석이 아니었다.
학승으로 장경각을 드나들며 경전과 무공서를 연구하다가 무공을 익히게 된 경우였다.
학승임에도 그 재능이 빼어나 무공을 익히는 것을 허락하였던 것인데.
'야차의 길로 들어섰지······.'
장경각에 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그 똑똑하던 사제가 그렇게 되었을까.
어쩌면 오늘 그 단서를 잡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솔하게 장경각을 침입했으니.
기척을 감추고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자신인 줄 모를 것이라 여겼던 것인가?
방장실을 다시금 나선 현광은 몸을 날렸다.
그 방향은 장경각의 침입자가 도주한 쪽.
소림의 담장을 훌쩍 넘은 현광은 소실봉 울창한 숲으로 들어서며 반야심경과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긴고주, 금고주, 금고주······."
***
우문가율과 공야휘연은 안경의 포구에서 배에 올랐다.
공야휘연의 계획대로 남창까지 수로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 도착할 때쯤이면 사해련에서도 사람들이 나와 있을 것이다.
우문가율이 사해련에 소식을 전한 터.
그 전에 하오문을 통해서도 소식이 들어갔겠지만 자세한 내막을 궁금해 할 것이라 생각한 우문가율의 조치였다.
"···저 괜찮겠지요?"
도도한 장강의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에서 공야휘연이 조용히 물었다.
우문가율은 미소를 지었다.
"네 우상이라 하지 않았느냐? 천하제일인. 그를 보기 위해 이런 위험천만한 가출까지 감행했으니. 그를 믿어야지."
어머니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공야휘연이었다.
"하 교관님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다시 또 묻는 공야휘연.
우문가율은 다시 같은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함께한 시간은 고작해야 이틀이야. 그 사이에 무얼 알 수 있겠니? 네가 믿으니 나도 믿는 거란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였잖아요. 그때 하 교관님은."
당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들어야 만족할 모양새였다.
결국 우문가율은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주었다.
기억을 더듬어 가며.
공야휘연에게도 좋은 기억은 아닐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어리디어린 나이에 어미와 생이별에 가깝게 떨어져 지냈으니까.
철이 든 후로는 자주 보러 가긴 했으나, 징벌동을 오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호위무사들이 데려다 준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오직 하무백의 어린 시절이기에 그녀는 당시의 일을 계속 물어왔다.
'대체. 네게 있어 강함이 무엇이길래······.'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고 우문가율은 자애로운 목소리로 당시의 일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기감을 최대한 넓게 퍼뜨리고 전력을 다해 소림을 향해 달리는 하무백.
아직 기감에 현황 놈은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하룻밤을 보낸 터라 그사이 벌어진 거리가 제법 될 터.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소림으로 가면 될 일이니까.
하무백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강호에 출도한 후 처음 겪는 유형의 무인이었다.
강하기도 강했고.
직접 손속을 나누어 본 바.
혈교 교주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
자신에게 보인 모습이 전부라면.
이 년 전의 하무백이었다면 제압하는 데 상당히 고생했을 터.
지금은 아니었다.
그 사이 하무백의 경지는 더욱 깊어졌으니.
'기다려라. 곧 잡아주마.'
능광만리행은 더욱 강렬한 폭풍을 남겼다.
이제 소림까지는 하루거리.
아마도 놈은 이미 소림사에 도착했을 터.
딱 하무백이 지체한 시간만큼의 차이였다.
전력을 다해 달리되 조급해 하지 않았다.
그놈이 소림에 없다면.
'현광 땡중을 족치면 될 일이다.'
결국 모든 책임은 문파의 장이 지면 되는 것.
소림사는 방장인 현광이 책임을 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