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그놈이 분명합니다
"부인이 보낸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흑오단에 전해진 우문가율의 전서를 전달받은 문인백송은 그 길로 련주의 집무실을 찾았다.
얼마나 기다리던 소식인가.
갑작스레 나타난 문인백송이었지만, 공야장천이 더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 되었나? 연아는?"
"저도 받자마자 곧바로 온지라······."
공손히 봉서를 전하는 문인백송.
공야장천은 서둘러 봉서를 뜯고 안의 내용을 살폈다.
다급한 눈길로 서둘러 전서의 내용을 확인하는 공야장천.
"후우."
가장 먼저 공야휘연이 무사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나머지 내용을 모두 확인한 후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말없이 문인백송에게 전서를 건넸다.
공야장천으로부터 건네받은 전서의 내용을 모두 살핀 문인백송이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현황이라······."
침중한 표정의 문인백송.
공야장천의 안색 역시 어두워졌다.
"현황이라면 그 인간이겠지? 역시?"
"광사괴승. 그놈이 분명합니다."
문인백송이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허. 그놈이 소림 밖으로 나왔다고? 거참······."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공야장천.
게다가 그 빌어먹을 놈의 손에 손녀딸이 잡히고 며느리가 욕보일 뻔했다.
하무백이 아니었다면.
"하 교관에게 도움을 청하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문인백송의 말에 공야장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문인백송은 사해련의 단 하나뿐인 군사였다. 그의 의견은 대부분 옳았으니.
"그보다··· 현황 그 새끼가 감히 연아의 몸에 수작을 부려 놨다라······."
태사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는 공야장천.
"하 교관도 당장은 파훼를 못 할 정도라 하니까요. 과연 광사괴승이라 해야 할까요."
"그 빌어먹을 새끼가 어떻게 소림 밖으로 나온 거지? 광해성승이 제압해서 가둔 것 아니었나? 절대 바깥세상에 나가지 못하도록 유지까지 남긴다고 했었는데?"
혈교와 마교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
천하를 어지럽히던 무림공적이 있었으니.
그가 광사괴승이었다.
천하에 그 악명을 떨친 소림 출신의 무림공적.
정파와 사파 할 것 없이 놈에게 치를 떨었다.
허나 그 강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결국 전대 사해련주가 나서려 하기 직전.
당시 소림 장문인이던 광해성승이 직접 산문을 나섰다.
그리고 힘겨운 전투 끝에 기어코 놈을 제압해 소림으로 데리고 갔었다.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나?"
공야장천이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시는 공야장천이 아직은 젊은 시절.
지금만큼 그의 의견에 힘이 실리지 않을 때였다.
"그리 결정된 연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문인백송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쓰읍."
그 연유를 떠올린 공야장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놈은 진정한 의미의 괴물이었다.
인외(人外)의 존재를 칭하는 괴물.
그 누구도 그놈을 죽이지 못했다.
제압은 할 수 있어도 죽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강기로도 그놈의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뚫을 수 없었다.
단전을 부수려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보호하고 있었으니.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도.
광해성승의 무공만이 놈을 구속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소림이 가지고 있는 봉인구.
그래서 광해성승의 의견을 따른 것인데, 그 괴물이 세상에 나왔다.
"그래도 놈이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하니 하 교관은 진정 괴물인 듯합니다."
"글쎄··· 그 새끼를 죽일 수 있어야지."
문인백송의 말에 공야장천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보다. 그 새끼가 어떻게 소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 완벽히 금제 당하고 있을 텐데?"
"소림에서 풀어주었겠지요."
"광해성승의 유지가 있는데?"
"현 장문인의 녹옥불장은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문인백송의 말에 공야장천이 한 대 맞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결국 현광. 그 땡중이 벌인 짓이란 말이군······."
공야장천의 두 눈이 분노로 가득 차 새파랗게 빛났다.
"현광······. 그라면 그럴 만하지요. 아가씨의 존재를 알았다면요. 그놈에게는 사파가 불구대천의 원수일지니."
문인백송의 말에 공야장천은 여전히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중놈이 속세를 등졌으면, 속세의 인연도 잊어야지. 그 인연에 얽매여 자신의 힘을 사사로이 쓰고 있는 꼬라지가······. 무려 녹옥불장을 사용해서 무림공적을 풀어놓다니."
"척마멸사 파사현정. 소림이 가는 길 중 하나입니다. 련주."
"백송, 자네. 소림인가? 사해련인가?"
"당연히 사해련이지요."
"헌데 뭔 그 땡중 놈 편을 그리 들고 있어?"
"저야 이치에 따른 말씀을 드리는 거지요. 항시 이성은 차갑게 유지해야 합니다. 저는 대사해련의 군사이니까요."
그리 말을 하고 있지만. 소매 속에 감춰진 그의 손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고 있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그렇다고는 해도, 소림 방장 독단으로 무림공적을 세상에 풀어 놓았으니. 정천맹 쪽에 항의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인백송이 차갑디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숭산 준극봉.
소림사가 자리 잡은 소실봉 옆의 봉으로, 험준하고도 험준한 산자락이었다.
"크흐흐. 여긴 여전하군."
준극봉 깊은 곳.
그곳에서도 험준한 절벽 한 가운데의 암동이다.
현황이 예전 숨어서 무공을 익히던 그만의 비밀장소였다.
이곳은 여전히 그 누구도 몰랐다.
이제 이곳에서 새로이 얻은 한 조각을 익히면 된다.
어떤 파편의 조각인지는 현황도 아직 몰랐다.
그때도 이 조각이 풍기는 기운을 보았을 뿐.
확인하지는 않았었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는 아직 혼돈과 암흑의 힘을 모두 갈무리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모두 갈무리한 뒤에는 그 힘에 취해 강호에서 날뛰었으니.
이제야 손에 넣고 확인하려는 것이다.
천수사리보리경을 펼쳤다.
뻔하디뻔한 불존의 말씀이 적혀 있는 불경이다.
허나 그것은 겉보기에 그럴 뿐.
현황의 두 눈에 내공이 실리고 본질을 보기 시작하자.
책 속에 숨어 있는 글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글자들이 간직하고 있는 진득한 기운까지.
'이건. 허무로군. 이 정도면 십분지 일 정도 크기의 조각인가?'
대번에 파악한 본질.
본질을 알아보는 혼돈의 힘이었다.
"우습군. 클클."
어찌 아니 그럴까.
불존의 말씀을 기록한 불경과 불존의 힘을 담은 무공들을 보관한 거룩한 곳이 소림사 장경각이다.
헌데 이곳에서 현황이 발견한 태초의 파편 조각을 보라.
혼돈과 암흑, 그리고 허무.
하나같이 불존의 힘과는 대척되는 곳에 있을 법한 것들 아닌가.
'조금만 기다려라. 무백이라는 새끼.'
이제 이 조각만 모두 읽고.
허무의 힘을 손에 넣고.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딴 놈 따위야.
현황의 얼굴에 득의만면의 미소가 어리는 순간.
"크아아아악! 크악! 아악!"
현황은 갑자기 느껴지는 격통에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다.
머리와 심장, 단전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격통!
빌어먹을 사형 새끼가 주문을 외고 있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쾅! 쾅! 콰쾅!
우두두둑.
땅을 뒹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여기저기 마구 부딪히니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럼에도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안간힘을 써 금제와 고통에 저항하려 하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혼돈과 암흑의 힘을 사용하려 해도.
세 개의 봉인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야말로 상극의 힘에 봉인 당한 느낌.
"끄윽. 끅. 끅."
현황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비, 빌어먹을. 어, 어떻게 벌써······.'
들킬 거라 생각은 했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최소 하루의 여유는 있을 줄 알았건만.
어찌 고작 한 시진 만에.
고통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현광이 계속해서 주문을 외고 있는 것이다.
현황이 숨은 곳을 찾는 현광은 현재 자신의 기감을 최대한 넓게 펼치고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놈이 고통에 차 발작을 하면 그 기척이 분명 느껴질 터.
그렇게 주문을 외우며 소실봉 곳곳을 누비던 현광이 고개를 저었다.
소실봉에는 없었다.
"하면."
그의 시선이 준극봉으로 향했다.
일단 저곳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넓디넓은 숭산을 모두 뒤지게 될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사제 놈 때문에.
시킨 일이나 잘할 것이지.
그렇게 준극봉으로 들어선 현광의 입에서는 여전히 주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준극봉에 들어서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찾았다.'
기감에 확실히 느껴지는 사제 놈의 기척.
현광은 곧장 그곳을 향해 달렸다.
깎아지른 단애.
그 중간의 암동을 향해 현광이 몸을 날려 들어갔다.
암동은 제법 깊었다.
쿵! 쿵! 쾅! 쾅!
세차게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암동을 통해 울렸다.
고통으로 벽에 몸을 박고 있는 것이다.
현광은 온몸의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일단 놈을 제압 먼저 해야 했으니.
철커덩.
챙겨온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울렸다.
깊숙한 암동의 끝에 도착하니.
"컥. 크윽. 끄윽."
사방 벽에 몸을 부딪치던 현황이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당장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광은 그 모습에 속지 않았다.
촤르르르륵!
손에 들고 있던 쇠사슬이 현황의 어깨에 박히고 명문혈에 박혔다.
그렇게 완벽히 금제한 후에야.
현광은 주문을 멈췄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던 비명은 멈췄다.
그러나 현황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현광이 주문을 외운 시간만 한 시진에 달한다.
오히려 넓디넓은 소실봉을 수색하고 준극봉으로 넘어와 이곳을 발견하기까지 고작 한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
허나 현황의 입장에서는 무려 한 시진 동안이나 지옥 같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세 개의 봉인구에 봉인 당한 이후.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주문에 고통을 당한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현황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
이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현황의 두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크, 크윽······."
작은 신음이 흘러나온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현황.
참회동에 갇힌 것과 똑같이 금제 당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도 왔구려."
앞에 있는 현광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현황.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놈이 네놈밖에 없으니까."
현광의 대답에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긴 현황.
"클클클클."
이내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맞다.
사형 새끼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일을 벌이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것이 자신일 텐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형 새끼는 틀림없이 자신을 의심할 텐데.
얼굴만 안 들키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니.
무백이라는 그놈에 대한 복수심에 머리가 굳은 듯했다.
결국 무백.
그 새끼 때문이다.
"씨발. 족같네."
현황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현광이 그런 현황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여아는?"
사해련주의 혈족임이 분명한 여인.
그녀를 잡아 오라고 보냈건만.
장경각에서 불경을 훔쳐내서는 이곳에서 이러고 있었다니.
연진이 이놈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제대로 일을 수행 중이라 여겼는데.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한 수작이었던가?
역시 이놈을 믿는 게 아니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큰 실책을 저질렀다.
다시 이놈을 참회동에 가두어야지. 강호에 소문이 돌기 전에 말이다.
그리 생각하는데.
"놓쳤소."
현황의 답이 현광의 귀에 들렸다.
그것도 미처 예상치 못한 답이다.
놓쳤다니?
하면 목란산 인근까지 가서 그 아이와 조우하고 놓친 후 다시 숭산으로 돌아와 일을 벌였다고?
대체 왜?
아니, 그리고 이놈이 놓쳐?
어떻게?
그런 의문이 현광의 얼굴에 떠올랐다.
***
하무백은 달리고 달렸다.
이제 소림까지는 여섯 시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쯤에서 잠시 멈춰서 쉬었다.
아무리 하무백이라 하지만 그놈을 완벽히 제압해서 박살 내려면 온전한 상태로 회복해야 할 듯했기 때문이다.
더이상 방심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멈춰 운공을 마친 하무백은 다시 소림을 향해 달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현황, 현광.'
놈들이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공야휘연의 안위가 걸린 일이다.
이전에는 그냥 맹룡대의 생도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려 자신의 은인인 우문가율의 딸 아닌가.
이제는 하무백 자신의 일과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