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풀어주시오
"놓쳤다?"
"무백이라는 놈이 나타나서······."
현황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무백이라는 말에 현광의 얼굴이 대번 일그러진 것이다.
"후우··· 하무백······."
그리고 이어진 깊은 한숨.
그 속에 담긴 깊은 울화를 현황은 읽을 수 있었다.
"하무백이었군. 그놈이."
무백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던 터.
"네놈도 그놈을 감당 못 한 거냐?"
그 음성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놈 때문에 현황 이놈을 풀어 주었던 것인데.
설마 하무백에게 사해련주의 친족을 빼앗기고 도주한 것이라니.
그러고 장경각에 침입해?
"지금이야 그렇소만, 하루 뒤면 달라질 예정이었다오."
아쉽다는 듯 말하는 현황이었다.
그런 사제의 모습에 현광이 피식 웃었다.
"고작 하루 만에? 그러려고 장경각을 털었다?"
조소 어린 물음이었지만 현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그 여아에게 수작을 좀 부려놓았는지라. 그놈이 소림으로 올 게외다."
현황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광.
사제의 안배를 하무백이 풀지 못한다고? 그 괴물이?
"흘흘. 아무나 풀 수 있는 게 아니외다. 그러니 그놈도 날 찾아 소림으로 올 수밖에 없지. 그런데 사형이 막을 수 있겠소?"
샐쭉 웃는 현황.
자신은 하무백과 손속을 겨뤄봤다.
눈앞의 사형 새끼의 수준이야 자신보다 조금 낮거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
그렇다면 답은 뻔하다.
박살이 날 거다.
현광이 그런 현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날 그렇게 도발하는 네놈의 속셈을 모를 것 같으냐? 나야 그냥 네놈을 하무백에게 넘겨주면 끝이다."
무심히 말하는 현광.
현황은 그런 사형 새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은 아무 상관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그럴 리가.
현황은 저 사형 새끼를 잘 알았다.
사부 광해성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 아니던가.
비록 현황은 학승으로 시작했고, 현광은 처음부터 무승(武僧)이었다 할지라도.
"하무백 그놈. 사파 계집년을 구하려고 아주 전력을 다하더군요. 더군다나 그 계집년의 어미가 딸년 구하겠다고 쫓아왔는데 말이오. 하무백이 그 어미년에게 은인이라 부르며 아주 간, 쓸개 모두 빼 줄 것 같더이다. 그 정도면 하무백이라는 놈, 그놈도 사파나 마찬가지 아니오?"
현황의 말에 현광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염주를 굴리는 그의 손에 힘줄이 불룩하니 솟아올랐다.
현황은 현광을 잘 안다.
왜 그가 사파라면 이를 갈고 파사현정 척마멸사를 외치는지도 잘 안다.
정파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의 방장으로서 대의명분을 따른다는 말.
그럴듯한 말이고, 명분이다.
허나.
다 개소리다.
현황은 현광이 왜 저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
현광.
그는 부유한 상단주의 아들이었다.
상단주인 현광의 아버지는 상단의 세력을 넓히는 데 소림을 뒷배로 이용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소림의 제자로 넣었다.
그런데 현광의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라 할 만했다.
현광의 재능은 아직 젊었던 광해성승의 눈에도 띄었고, 곧 직전제자로 들어갔다.
광해는 문과 무, 모든 면에서 빼어났는데.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승 중 하나를 또 제자로 들였다.
그리고 그 제자가 무에도 재능이 있음도 알게 되어 무공 역시 익히게 하였다.
그가 바로 현황이다.
그래서 현황은 어린 시절부터 현광과 함께 동고동락했다.
그에게 어떤 절망이 찾아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사파의 한 문파가.
그의 아비의 상단과 상권 다툼을 벌였고.
그 결과.
현광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소림에서 소식을 듣고 중재를 위해 나섰지만.
소림승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현광의 집이 잿더미로 화한 다음이었다.
살아남은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노인도, 여인도, 아이도.
하다 못 해 집 안에서 키우던 개마저도 모두 죽었다.
그때부터 다.
현광에게 사파라는 족속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귀였다.
현생과 중생을 구제하고 평안하기 위해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마귀요, 야차들이었다.
혈교와 마교라는.
더한 마귀 새끼들이 나타나.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손을 잡았지만.
현광에게는 사파 또한 마귀일 뿐이다.
사해련 또한 이 사실을 알았다.
산하 문파가 상단 하나를 쓸어버렸는데.
그곳이 소림의 방장인 광해의 제자와 관련이 있는 곳이었으니.
단순한 관련이 아니었다.
아무리 속세를 떠났대도 부모와 가족인 것을.
사해련에서 모든 것을 파악했을 때는 일이 이미 끝나 있었다.
소림에서 그 문파를 제압한 후.
사해련은 산하 문파를 돕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해련은 사파다.
사파의 연합체다.
당연히 소속 문파를 돕기 위해 나서야 했다.
그 문파가 행한 일의 정당성은 중요치 않았다.
그런 걸 따지는 것은 정파 놈들이고.
사파 놈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최우선이었다.
그렇게 소림과 지난한 충돌을 일으켰다.
공야장천이 련주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소림과 사해련의 충돌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은 혈교와 마교 때문이었다.
더 큰 공동의 적이 등장했기에.
무림대전 때문에 과거의 은원을 잠시 덮어두었을 뿐.
이런 이유로 공야휘연을 잡으려 소림이 나선 것이고, 제자들 역시 파사현정 척마멸사를 외치며 그녀를 추적한 것이다.
소림은 혈교와 마교와의 전쟁 이전에 있었던 사파와의 충돌을 여전히 잊지 않았기에.
다만 사해련은 잊었다.
두 번의 무림대전을 겪으며 정파와 손잡고 싸웠으니까.
과거의 묵은 은원은 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손을 잡고 싸울 수 있으랴.
아군이 내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소림과 사해련은 오월동주와 같이 무림 대전 동안 손을 잡았고.
그 곪은 상처가 작금에 이르러 터진 것이다.
소림사의 방장인 현광의 개인적인 복수심이 더해진 상태로.
"그런데, 그 사파 새끼가 소림사에 찾아왔는데 순순히 나를 내주겠다? 크크.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크크크큭."
현황의 웃음소리.
손바닥 안을 구르던 현광의 염주는 어느새 멈춰있었다.
대신 힘이 꽉 들어간 손아귀.
염주알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네놈이 하고 싶은 말은?"
"풀어주시오."
"······."
"쇠사슬만이라도 풀어주시오. 저 서책의 내용만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면 그딴 새끼 당장에 쳐 죽일 수 있소이다."
현황이 현광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심 웃음 짓고 있었다.
그가 아는 사형 새끼라면 반드시 넘어온다.
사파에 대한 복수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네놈이 도망치면?"
'넘어왔다.'
현광의 반문에 마음속 현황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봉인구가 있지 않소이까?"
현광의 손에 들어있는 염주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저 서책이 대체 뭐길래? 천수사리보리경이라 하였거늘."
"클클. 말해줄 것 같소이까?"
현황의 밑천이다.
그것을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
염주가 계속해서 굴러갔다.
"시간이 별로 없소이다. 내가 저 서책의 내용을 제대로 내 것으로 하기 전에 그 새끼가 오면 모든 게 틀어질 거외다."
"그놈이 온다는 근거는?"
아무리 현황의 안배를 하무백이 해결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선유곡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하무백은 그들과 사이도 좋았고 말이다.
"후후. 한낱 의원 나부랭이들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짙은 어둠이 스며들게 해두었으니. 서서히 죽어갈 거외다. 클클. 거기에다가, 그 새끼가 가진 힘의 원류는··· 나와 같소이다. 그러니 알 테지.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그년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현광의 눈썹이 꿈틀했다.
정파의 이름 없는 영웅이 하무백이다.
천하는 소휘웅을 찬양했으나.
음지에서 하무백이 이루어낸 수많은 전공들을, 아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현광 역시.
그가 입안의 가시와 같았지만, 무림대전에서 정파의 무인으로 하무백이 이루어 낸 성과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두나 다름없는 자신의 사제.
무림공적인 이놈과 무공의 원류가 같다고?
거기에 사파의 여인, 그것도 공야장천과 깊은 관계가 있음이 틀림없을 여인을 은인이라 부르고 따른다고?
"사파다."
현광은 결론을 내렸다.
그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현광이 몸을 돌렸다.
"사, 사형······."
그 모습에 현황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자신의 술수가 실패했단 말인가?
저 사형 새끼가 그 복수심을 참고 자신을 이곳에 봉인한 채 돌아간다고?
그리 절망에 빠지려는 순간.
촤르르르륵.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현황의 견정혈과 명문혈에 박힌 쇠사슬이 스르륵 현광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네놈을 내일 이 시간에 참회동에 가둘 것이다. 봉인구 셋 모두 그대로 둔 채로. 아마 무척 괴로울 거다. 감히 참회동을 탈출하는 죄를 지었으니. 그때까지 이곳에서 참회하고 있도록."
그 말을 남기고.
현광의 모습이 훌쩍 사라졌다.
일견 자신에게 벌을 주는 듯했으나.
지금 현황을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유의 몸이라는 뜻이다.
현황은 황급히 천수사리보리경을 다시 집어 들었다.
사형의 갑작스러운 주문으로 중단되었던 것을 계속해야 했다.
그놈이 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감도 아니고, 본질을 본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몸에 담긴 힘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놈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그렇게 현황은 허무를 몸 안에 받아들였다.
***
숭산 소실봉.
험준한 산봉우리가 하무백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중턱에 자리한 거대한 사찰.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사.
하무백의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땅을 치달렸다.
오래지 않아 소림의 산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수문승들이 하무백을 발견했다.
"멈추시오! 시주! 소림을 찾은 용건을 밝히시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하무백의 모습에 수문승들은 깜짝 놀라 외쳤으나.
그들이 채 기수식을 취하기도 전에 하무백은 소림의 산문을 훌쩍 뛰어넘어 소림사의 경내로 훌훌 날아 진입했다.
뎅뎅뎅뎅!
종소리가 급박하게 울렸다.
침입자를 알리는 종소리.
하무백은 아랑곳 않고 소림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그의 기감은 이미 소림사는 물론이고 소실봉 절반 이상을 뒤덮었다.
'없다.'
찾는 놈이 없었다.
현황이라는 땡중 새끼.
하무백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대로 소림사 한가운데 두 발을 디딘 하무백.
소림사는 크고 넓었다.
도처에 중요한 곳들이 산재해 있는 고찰 중의 고찰.
그런 소림에서 중심부 또한 큰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바로 방장실이 소림사 경내의 정중앙에 자리한 탓이다.
하무백의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아미타불."
낮은 불호성과 함께 방장실의 문이 열리고.
백염백미의 고승이 인자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소림 방장 현광대사.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사제의 말이 하나 같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외다. 하 시주. 갑자기 소림에는 어읜 일이오이까? 그것도 이리 무례하게 말이오?"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 현광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그사이 소림의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방장실 바로 앞에 난입한 침입자를 제압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벌써 방장께서 나서셨기에.
일단은 주변만 에워쌌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백팔나한대진이 펼쳐졌다.
백팔나한진이 중첩되고 중첩되어 펼쳐지는 백팔나한대진.
총 삼백이십사 명의 나한들이 펼치는 어마어마한 대진이었다.
하무백은 가만히 현광을 노려보았다.
분노에 휩싸여 이곳까지 단숨에 찾아왔지만.
'명분이 부족하다.'
그랬다.
소림이 정파의 중요 영역에 들어온 사파의 무인을 쫓은 것은 그들의 명분에 따른 일.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묻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하무백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다짜고짜 박살을 내는 것은 쉽다.
소림인들이 하무백의 안중에 있으랴.
다만.
그리하면.
하무백이 경멸하던 그들과 자신이 똑같아지는 것이다.
현재 하무백의 명분은 단 하나다.
현황.
광사괴승.
소림으로 곧장 오는 길에 잠시 짬을 내서 개방을 통해 얻은 정보다.
혈교와 마교가 세력을 발호하기 이전의 강호.
당시의 무림공적이었던 광사괴승.
그가 현황이었다.
무림공적을 세상에 풀어놓은 소림사.
거기에 대한 책임.
이것이 하무백의 명분이었다.
"현황, 아니 무림공적 광사괴승은 어디에 있지?"
하무백의 차가운 목소리가 소림 경내의 승려들 귀에 똑똑히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