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넌 뭐냐?
검과 권.
권과 검.
흑과 백.
백과 흑.
정명(正明)한 백화(白火)와.
사암(邪暗)한 흑연(黑煙).
두 기운이 사나운 기세를 흩뿌리며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를 악문 현황.
쿠아아아아앙!!!
현황이 상상한 충돌의 굉음이다.
허나.
현황의 상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콰지지지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명한 백화가 사암한 흑연을 그대로 박살 내며 두 쪽으로 가르고 있었다.
하무백과 현황 사이에 뻥 뚫린 대로가 만들어졌고.
새하얀 백화가 현황의 어둡디어두운 기운을 불살라 버리고 있었다.
현황은 두 눈을 치켜떴다.
주먹 끝에서 뻗어나간 검은 기운이 양쪽으로 갈라져 버리고.
자신의 눈앞을 채운 것은 새하얀 세상이었다.
하무백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그 새하얀 기운.
그것이 그대로 현황에게 날아들었다.
"이, 이, 이럴 수는 없어!!!!"
현황의 절규.
백화검강은 그런 절규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현황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아앙!
현황이 상상했던 폭음이 그제야 천지를 울리며 터져 나왔다.
소림승들은 그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중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현광인 듯했다.
"사형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군요."
그 옆에서 담담히 말하는 현길.
그의 목소리에는 소림사의 장문 방장에 대한 존중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정도를 벗어난 동문사형에 대한 멸시와 연민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강기의 폭풍은 세차게 휘몰아쳤다.
그 중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소림승들은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저 속에서 현황의 전신이 갈가리 찢겨 온전한 시신 따위 건지지 못할 거라고.
하무백의 검식이 끝나고.
백화검강의 폭풍도 끝이 났다.
눈앞에 드러난 모습.
사방이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홀로 쓰러진 인영.
현황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전신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살아있었다.
"어, 어떻게······."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소림승들.
자신들의 예상이 너무도 보기 좋게 빗나간 탓이다.
아니, 그래서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 엄청난 기운의 폭풍에서 저리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무백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기감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기에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짜증이 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
"넌 뭐냐?"
하무백이 짜증 섞인 물음을 던졌다.
너는 무엇이냐.
현황이 하무백에게 던졌던 물음.
그것이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크흐흐흐. 크흘. 크흐흐흐."
대자로 뻗어 누운 채 웃음을 흘리는 현황.
온몸에 기운은 하나도 없었다.
방금 전 하무백과의 격돌에서 모조리 사용했다.
그야말로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그 덕에 옷이 멀쩡했다.
전신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잘린 곳도 없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웃은 것은 아니다.
방금 이렇게 당하고 알게 된 새로운 사실 때문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은 현황.
"킬킬킬. 네놈. 나를 못 죽이는군."
바로 그것.
하무백의 백화검강이 현황을 완전히 집어삼켰을 때.
현황의 단전 깊숙한 곳에서 솟아올라 그를 보호한 기운.
암흑. 혼돈. 그리고 허무.
그 세 기운이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그 기운이 현황의 단전을 비롯해 심장과 머리를 보호했다.
그 기운은 하무백도 느꼈다.
그랬기에 현황에게 물은 것이다.
넌 뭐냐고.
정말로 인간이 아닌 존재 같았으니까.
허나 돌아온 것은 저 자신만만한 웃음.
피식.
하무백이 허공을 천천히 밟고 올라서며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어디 정말 그런지 볼까?"
다시 휘두르는 검.
그리고 그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오 절 파천.
그 장엄한 모습이 다시 한번 펼쳐졌다.
현황은 이번에는 마주 기운을 쏘아내지 않았다.
그럴 내공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하무백은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콰콰콰콰쾅!
현황이 앉은 자리 주변이 다시 한번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보란 듯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현황이 히죽 웃었다.
이번에도 견뎌 냈으니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멀쩡하게.
몸 안에서 순식간에 무언가 혹 빠져나간 것을 느꼈다.
암흑, 혼돈, 허무가 끌어다 사용한 힘.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힘이다.
과연 대단한 힘이다.
심연.
어디서인지 그만한 기운을 다시 채워주었다.
참으로 신묘하다.
지금 그것이 자신을 이리 지켜 주고 있었다.
"낄낄낄낄."
현황은 미친듯이 웃음을 흘렸다.
"······."
"···미친······."
소림승들은 그런 현황을 넋이 나간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하무백의 공격에서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지금 현황의 모습은 그보다 더욱 놀라웠으니까.
순식간에 십 년은 늙었다.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저럴 수가.
현황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잠시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스멀스멀 주변으로 흘러나갔다.
그리고.
현황이 천천히 십 년 젊어졌다.
본디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대신.
주변의 초목들이 말라비틀어졌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본 것이다.
"진짜, 너 뭐냐?"
하무백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선천진기를 끌어다 사용한 것도 모자라 주변 생물에게서 생명력을 흡수해 그 선천진기를 회복하다니.
저건.
이미 사람의 범주가 아니었다.
"흐, 흡성대법······."
소림승들 중 누군가가 정신을 차리는 듯하더니 그리 중얼거렸다.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흡성대법이라니.
마교나 혈교의 종자들도 사용하지 않는 최악의 마공 아니던가.
그 공포는 주변의 소림승들에게 전염되었다.
"우우······."
"···으으."
현황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뭐라 했느냐? 흡성대법?"
현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어찌 보고 그런 마귀들의 무공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하찮은 놈이."
그 말에 현황과 눈이 마주쳤던 소림승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현황은 하무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킬킬. 이제 어쩔 거냐?"
현황과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하무백은 검을 검집에 꽂고 팔짱을 낀 채로 현황을 쳐다보았다.
"너. 지금 네놈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지? 모를 수가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
"아마 심연이라 했나? 그놈이 감각까지 간섭하며 장난질을 치고 있나 보군."
얼굴을 찌푸리는 현황.
"방금. 네놈이 사용한 기운. 그거 선천진기다."
한심하다는 듯 하무백이 말했다.
선천진기.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생명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기운.
그 기운을 끌어다 썼는데.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물론 제 기운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삼류 무인이라면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운의 흐름을 어느 정도 느끼는 이류 무인만 하더라도 선천진기의 움직임은 느낄 수 있다.
생명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기운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
즉, 지금 현황의 기운에 대한 감각은 삼류 무인이나 다름없다는 의미.
하무백의 말에 현황이 깜짝 놀라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정도의 선천진기를 끌어다 썼으면 얼굴이 쭈글쭈글해졌어야 정상.
그런데 손끝에 만져지는 피부는 허무를 얻었을 때와 똑같았다.
"어디서 그런 같잖은 수작을······."
적잖이 안도한 표정으로 하무백을 노려보는 현황.
"쯧쯧. 주변은 안 보이는 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보는 현황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당연했다.
주변의 풀과 나무가 비쩍 말라 죽어 있었으니까.
자연스레 말라죽은 나무의 모습이 아니다.
한계 이상으로 누군가 생기를 몽땅 뽑아낸 그런 광경.
"네놈 짓이다."
하무백의 말에 현황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야 소림 제자의 흡성대법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 도대체 뭐냐?"
세 번째 물음이다.
같은 물음을 세 번째 던졌다.
현황은 하무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현황이다. 태초의 힘의 파편을 손에 넣은 무인. 현황."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말고. 네 속에 숨어 있는 새끼. 심연? 그 새끼 말이야."
하무백의 말에.
현길의 표정이 변했다.
심연이라니.
현황이 태초라 말했을 때.
광해성승의 추측이 맞았음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던 현길.
하무백이 심연을 입에 올리는 순간은 경악했다.
자신이 조우했던 존재.
심연.
그를 받아 들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무백은 현황에게서 심연을 찾고 있었다.
마귀가 되어 버린 사형에게서.
"심연은 내가 가진 힘에 내재한 존재일 뿐이다."
현황이 하무백에게 답하자 하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니야. 네놈이 직접 보여줬잖아."
하무백이 현황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도록 하지. 네놈의 선천진기가 무한하지는 않을 테니."
하무백이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펼쳐지는 파천.
그 후로 세 번의 파천이 더 펼쳐진 후.
모두 여섯 번의 파천을 현광은 아무런 타격도 없이 버텨냈다.
대신 주변은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소림승들이 있던 곳의 나무들까지 비쩍 말라 죽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 검은 연기는 사람의 생명력은 취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도 모를 일.
비쩍 말라죽은 나무들 주변으로 들쥐의 말라버린 사체와 마를 대로 말라 바스라진 벌레들의 흔적까지.
동물들의 생기 역시 빨아먹고 있었다.
저 능력이 더욱 거대해져 사람의 생명력까지 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흡성대법을 넘어서는 지독한 악마의 대법이 될 터.
그런 지경에 이르렀을 때의 결과가 심히 두려웠다.
한 번, 한 번의 파천을 버틸 때마다 현황은 더욱 심하게 늙었고, 더욱 많은 생명력을 흡수했다.
네 번째 파천.
현황의 몸을 집어삼켰고.
"크헉. 커허허허헉."
처음으로 현황의 입에서 괴로움이 가득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가만히 앉아만 있던 현황이 바닥에 널브러져 부들부들 떨었다.
온몸은 비쩍 말라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단전만은 무사했다.
주변에 검은 기운이 드리우면 풀과 나무, 그리고 들쥐나 벌레 같은 작은 동물들이 또다시 말라비틀어졌다.
현황이 회복하는 시간도 더욱 길어졌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은데?"
하무백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네놈이 그래도 버티는가 보겠다는 표정.
현황의 두 눈이 변했다.
검은 기운으로 가득 차 흰자위가 완전히 사라진 두 눈.
더욱 검고 검어지더니 이제는 깊어졌다.
무저갱의 어둠과 같은 암흑이 두 눈에 어린 순간.
"네놈."
현황의 목소리가 변했다.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
그 순간.
하무백은 기막을 둘렀다.
굳이 소림승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놈이 심연이냐?"
"······."
대답이 없었다.
하무백의 검에 백화검강이 피어올랐다.
"···그렇다."
"넌 뭐냐?"
다시 묻는 하무백.
"영광인 줄 알아. 내게 같은 질문을 네 번 하게 만든 건 네놈이 처음이니까."
"심연은 심연일 뿐. 무엇이 아니다."
하무백이 삐딱하게 현황, 아니 심연을 바라보았다.
"태초로부터 전해진 인세 밖의 힘. 그 힘에 깃든 의지가 바로 나 심연이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느낌이 안 좋은데? 세상 사이하고 악독한 기운은 모두 모아둔 것 같아."
"사이함과 악독함, 더러움 또한 태초의 일부일 뿐이다."
태초.
세상의 시작.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
그런 의미라면 맞는 말이다.
사이함, 악독함, 더러움 모두 세상의 일부였으니까.
"목적이 뭐지?"
하무백이 물었다.
심연이 답한다.
"목적 따위는 없다. 힘에 깃든 의지인 우리는 그저 그대로 오롯이 존재하고 있을 뿐."
"그럼 지금 벌인 일은?"
"힘을 얻은 현황. 그의 의지일 뿐."
"네놈이 부추긴 것은 아니고?"
"소유자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이어지는 문답.
하무백이 얼굴을 찡그렸다.
결국은 현황의 추잡한 욕망이 자신이 가진 힘에 투영되어 발현된 의지가 이 심연이라는 놈이다.
태초의 의지인 심연이라 했지만.
실상은 시전자의 내면 깊숙한 의지와 염원의 또 다른 모습.
그래서 심연인 것이다.
"뭐, 정말 그런지 보면 알겠지."
하지만 하무백은 그 말을 쉬이 믿지 않았다.
검이 움직였다.
유일하게 멀쩡한 단전을 향해.
콰아아앙!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커어어어억. 커억."
현황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과 달랐다.
온몸이 피칠갑이다.
어마어마한 공격에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고, 얼굴은 흉측하게 찢어졌다.
무릎 역시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오직 단전이 있는 곳만이 무사했다.
멀쩡히.
다시 한번 웃는 하무백.
"것봐. 이건 네 의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