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거보라니까
장강의 물은 도도히 흘렀다.
넓디넓은 강은 이것이 과연 강인지 바다인지 헷갈릴 정도.
흐름을 거슬러 안경보다 상류로 가는 여정이었기에 배는 느렸다.
적당한 바람 덕에 쉼 없이 나가고는 있었지만.
배의 난간에서 공야휘연이 강바람을 맞고 있다.
그녀의 미간에 검은 기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지 이틀째.
단전에 붙어 있다는 그 정체불명의 기운 탓일 거라 생각되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상태로 강물을 바라보는 공야휘연의 안색은 그럼에도 밝았다.
믿고 있는 것이다.
하무백을.
"바람이 시원하구나."
우문가율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 역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상태.
"네. 그러네요."
여전히 갈라지고 거친, 탁한 공야휘연의 목소리다.
"몸은 좀 어떠니?"
"조금씩 영향을 받는 것 같긴 해요. 머리가 무거운 것도 미세하게나마 더 진행되는 것 같고요."
공야휘연의 대답에 우문가율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의 시선이 딸의 미간으로 향했다.
면사로는 가리지 못하는 곳.
그곳에 자리 잡은 거무스름한 기운.
어제부터 보였다.
이것만으로도 그 괴승이 딸의 몸에 심어놓은 기운이 계속해서 그 세를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백아. 부디.'
지금 그녀가 기댈 곳은 하무백밖에 없었다.
"하교관님은 정말 대단해요."
그때 들려온 공야휘연의 말소리.
"어떻게 그 상황에서 동생을 그렇게 지켜낼 수가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없는 어린아이가요. 제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전 못 했을 거예요. 절대."
우문가율이 공야휘연에게 해줬던 이야기였다. 공야휘연이 듣고 싶다 해서.
"그 여동생. 교룡관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정말 아름답고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하설란의 모습을 떠올리는 공야휘연.
"무공은커녕 아무것도 없던 열 살의 아이가, 젖먹이 동생을 지켜내고 훌륭하게 키워내다니······."
우문가율은 묵묵히 딸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 그 괴승을 제압하고 제 몸의 기운을 없애는 일 따위는,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거예요. 지금은 그때처럼 아무것도 없는 꼬마가 아닌 당당한 천하제일인이니까요."
우문가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야휘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은 태연했으나, 이 아이도 두려운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의 단전에 들러붙어 서서히 몸을 잠식해 가고 있는 이 상황이.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하무백을 믿고 있는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험난한 상황도 헤쳐 나온 하무백의 능력을.
***
정천맹 맹주실.
"군사."
"네. 맹주님."
소휘웅의 부름에 공손단경이 담담히 답했다.
"이 서신들 어찌 생각하는가?"
소휘웅이 한곳에 모아둔 서신들.
모두 소림 장문인 현광에게서 온 것이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보고서들이 쌓여 있었다.
개방에서 들어온 정보를 취합해 분석한 천목각의 보고서였다.
"소림에서 무리하는 겁니다."
맞다.
소휘웅의 생각도 그러했다.
그랬기에 논의해보겠다는 답신만 보냈을 뿐, 실질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대신 그 주변으로 개방과 천목각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사해련과의 갈등은 정천맹의 입장에서도 유심히 살펴야 했으니.
더군다나.
그 사파를 잡겠다고 나선 이가 다른 이도 아니고 소림의 현광이다.
그의 개인사는 정천맹에서도 파악하고 있는 터.
거기에 더해.
"아니, 무리가 아니라 현광대사가 미친 거지요."
공손단경이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리며 말했다.
현광의 서신에는 없는 내용.
허나 개방에서 파악한 사실.
광사괴승.
그가 세상에 나왔다.
광해성승이 열반에 들기 전 정천맹에 알려 왔었다.
자신이 유지로 남겨, 광사괴승은 죽기 전에 참회동을 나올 수 없게 하겠다고.
"광사괴승··· 그를 풀어주다니. 미친 게 맞지."
소휘웅 역시 인상을 썼다.
그는 젊은 시절.
광사괴승과 겨뤘던 경험도 있었다.
괴물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만 따진다면, 그때 이미 혈교 교주나 마교 교주에 거의 버금가는 경지에 올랐었으니.
"그렇게 쓰라고 있는 녹옥불장이 아닌데 말이야."
굉장히 불쾌하다는 듯 말하는 소휘웅.
그와 공손단경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광사괴승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탈출한 것이 아니라면 방장의 녹옥불장밖에 없었음이니.
"이번에도 그 친구를 믿을 수밖에 없겠군."
그 친구가 누구인지 공손단경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에서 만나고 오셨었군요."
그 말에 소휘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모르쇠.
그 이유를 짐작하기에 공손단경은 굳이 따져 묻지 않고 웃으면서 넘어갔다.
"그래서. 그는 뭐라 했습니까?"
잠시 천장을 올려다 본 소휘웅.
"자신만의 길을 갈 생각인가 보더군."
"그러고도 남을 경지이니까요."
공손단경의 말에 소휘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진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
우문가율이 보낸 전서응이 형산에 자리한 사해련으로 날아들었다.
전서는 즉시 공야장천에게 전해졌고 그는 자리에서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채비를 하게. 직접 가봐야겠어."
그 말에 문인백송이 대경했다.
저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사해련주가 미리 통보도 없이 다짜고짜 정파의 영역으로 들어가겠다니.
"안 됩니다! 련주님!"
즉각 말리는 문인백송.
"현광 그 새끼가 약속도 어기고 광사괴승 새끼를 풀어놨을 때 이미 파국은 예정된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서신을 집어던지는 공야장천.
무사히 공야휘연을 구했다는 소식에 안심하고 있었건만 이게 대체······.
문인백송은 서둘러 전서를 집어 들었다.
그 내용을 살피는데······..
"이, 이런 쓰부럴 새끼가!!"
문인백송의 입에서도 분노에 찬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광사괴승. 아니 현광.
그놈이 공야휘연의 몸에 수작질을 부려 놓았다지 않은가.
하무백조차 당장 파훼하지 못하는 수작을.
"당장 가시··· 아, 아, 안 됩니다."
순간적으로 문인백송마저 이성을 잃고 당장 가야 한다고 말할 뻔했을 정도다.
"것 보게. 자네도 그러는구만."
"시, 심정은 십분 공감이 가나 그래도 련주님의 위치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지금 당장 정천맹에 통보해. 내 손녀딸이 광사괴승 그 새끼의 수작에 당해 생명이 위태로워 내가 직접 데리러 간다고. 그리고 나는 지금 출발하지."
"려, 련주님······."
"자네도 봤잖은가. 하무백 그 인간도 파훼를 못 해서 광사괴승 그 새끼 잡으러 갔다고!"
공야장천의 몸에서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하무백. 그 인간도 파훼하지 못한 걸 련주님이 가신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난단 말입니까?'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솟아올랐지만 애써 삼켰다.
지금 분노로 눈이 돌아간 공야장천에게, 그가 무능력하다 들릴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였기에.
문인백송이 정천맹에 해당 사실을 통보하러 자리를 뜨고.
공야장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사의 뒤에 걸려있던 대도.
그것을 손에 쥐었다.
암룡대도(暗龍大刀).
사파십병 중 당당히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신병이었다.
***
"끄··· 끄··· 끄어억······. 끄억."
현황의 입에서 고통에 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현황을 바라보는 하무백.
이윽고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주변으로 뻗어갔다.
나무가 말라비틀어졌다.
풀들이 파사삭 바스라 졌다.
들쥐가 말라비틀어져 쓰러졌다.
막 날아오르려던 꿩 한 마리가 그대로 말라비틀어졌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검은 기운은 소림승들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으 으힉!"
"이, 이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깜짝 놀란 소림승들.
"갈!"
그 모습에 현광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손바닥을 뻗었다.
금강여래불광대수인의 신성한 기운이 검은 기운을 모조리 튕겨냈다.
상극의 기운.
불존의 힘은 저 검은 기운이 감히 범접지 못하게 막아섰다.
그 장엄한 광경에 소림승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소림 방장다운 능력이라는 생각이었다.
현황이 펼쳤던 그 사이한 대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불존의 힘이 담긴 진정한 금강여래불광대수인!
그 사이.
현황은 모든 상처를 회복했다.
하무백은 그런 현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목숨. 살려는 줄게."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하무백.
"대신. 단전은 터뜨린다."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현황의 검은 눈이 떨린다.
"왜 그래? 살려는 준다니까. 네놈도 좋은 거 아냐? 목숨을 건지는 건데?"
계속해서 말하는 하무백.
허나 현황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이 잘게 떨리는 것이 마치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어떠한 힘이 그것을 막고 있는 듯했다.
"거보라니까."
하무백의 입가의 웃음이 살소(殺笑)로 바뀌었다.
"대답이 없으니. 죽어야지, 뭐. 단전도 터뜨리고."
그 말과 함께 하무백의 손이 날아갔다.
무극박투 중의 조법爪法).
새하얀 백강을 머금은 하무백의 손이 그대로 현황의 단전에 틀어박혔다.
꽉 움켜쥐는 손.
이내 고개를 갸웃거린다.
단전을 움켜쥐는데 손에 걸리는 것이 있었던 탓이다.
굉장히 단단한 물건이었다.
하무백의 강기를 머금은 손아귀의 힘을 버티고 있었으니까.
"방장 사형."
그 모습을 보던 현길이 나직이 현광을 불렀다.
"······."
"어이해 금제를 발동하지 않는 겁니까? 이제 다 끝났습니다. 사형도 조금 전 그것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직접 금강여래불광대수인까지 펼치지 않았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현광.
결국 결심을 한 것인지.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반야바라밀다······."
반야심경으로 시작한 그의 읊조림은 곧이어.
"긴고주, 금고주, 금고주······."
봉인구의 금제 주문으로 이어졌고.
"크아아아아악!!!!"
현황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 움직임에 하무백의 손이 현황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갑자기 일어난 변화에 하무백이 손에 힘을 뺀 탓이다.
'변했어? 기운을 뿜어내면서?'
하무백의 손아귀에 쥐이던 그 단단한 물건.
그것이 기운을 뿜어내며 수축했고.
그와 동시에 현황이 비명을 지르며 저리 날뛴다.
'저게 금제를 가하는 봉인구였군.'
하무백의 무극명륜안에 금제의 기운이 피어오르는 곳이 보였다.
'머리, 심장, 단전.'
하무백이 시선을 틀었다.
그곳에는 연신 주문을 외고 있는 현광이 있었다.
"너 이 새끼. 저런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분노가 하무백의 얼굴에 자리했다.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현황.
하무백이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없었다.
심연이라는 그 빌어먹을 새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것이야말로 진정 상극이라 할 힘이었다.
단전을 당장이라도 터뜨릴 듯 수축하는 봉인구.
허나 단전은 터지지 않고 버텼다.
상극이라서다.
현황이 얻은 힘의 상극이 봉인구의 힘이었지만, 동시에 봉인구의 힘에 대한 상극 역시 현황이 얻은 힘.
둘은 묘한 균형을 이루며 대치 상태를 지속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하무백.
다시 현황을 향해 움직였다.
봉인구가 발동하면서 그 기운을 통해 형태를 명확히 파악하였기에.
이번에는 양손을 사용했다.
예리하게 세운 손날.
백화강이 손에 입혀졌다.
백화수강.
그것이 좌우에서 동시에 현황의 단전을 향해 파고들었다.
푹! 푸욱!
동시에 살을 찢고 틀어박힌 양손은 금고아(禁箍兒)의 틈 사이를 찾아 들어 그대로 단전을 꿰뚫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비명.
현황은 몸부림도 멈춘 채.
비명만을 내질렀다.
하무백이 두 곳을 찢은 덕인가.
금고아의 수축이 이어졌다.
한없이 쪼그라드는 현황의 단전.
이제는 호두알만 해졌다.
하무백의 손이 파고들 틈도 없을 정도.
허나.
현황의 단전은 여기서 또 버텼다.
심연의 마지막 몸부림이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무백이 현광을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풀어."
여전히 주문을 외고 있는 현광의 두 눈에 의문이 어렸다.
"이 새끼 단전에 심어 놓은 거 풀어서 꺼내라고. 터뜨려야 하는데 그게 방해하고 있잖아."
지금 상황은 하무백의 말대로였다.
금고아는 호두알만 해진 현황의 단전을 터뜨리겠다며 계속 수축하려 했지만.
더 이상 작아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금고아는.
오히려 하무백의 손아귀로부터 단전을 지키는 갑옷과 같이 되어버린 형세였다.
"하 시주. 소승이 잠시 손을 보태도 되겠소이까?"
그때.
현길이 나섰다.
"넌 또 뭐야?"
거친 물음이 돌아갔다.
현광의 금제 주문을 본 순간.
하무백의 눈에 소림승들은 모두 똑같은 잡쓰레기로 비쳤으니까.
"사숙, 광해성승의 유지를 이은 후인입니다. 아미타불."
그 말에 경악한 것은 하무백이 아니었다.
현길에 뒤에 있는 소림승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현광의 두 눈은 당장에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광해성승의 유지를 이은 후인이라는 말에 하무백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무백이 출도했을 때, 이미 세상에 없던 광해성승이지만.
그가 얼마만 한 존경을 받고 있는지 잘 알았기에.
무당의 무연진인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
광해성승.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혈교와 마교와의 싸움이 훨씬 손쉬웠을 거라고.
하무백이 미처 대답하기 전.
현길의 몸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