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죄송해요, 할아버지
우중충한 하늘이다.
잔뜩 낀 구름이 당장에라도 비를 쏟아낼 것만 같았다.
꼭 지금의 공야휘연의 심정을 보여 주는 듯한 하늘.
힐끔 하늘을 올려다본 공야휘연은 포구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도착한 남창.
잠시 후면 배가 선착장에 도착할 것이고, 그러면 내려야 한다.
갑판은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마다의 사연과 일이 있는지 승객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면사 아래 가려진 공야휘연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저 하늘보다 훨씬 더 어둡고 우중충한 심정이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기에 그런 내색을 비출 수 없는 탓이다.
'교관님······.'
그리고 하무백을 믿어서이기도 했다.
선착장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커졌다.
각자의 심정이 담긴 말소리가 커지는 탓이다.
그런데.
더 가까워지니.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윽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야휘연이 강물에서 선착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조용해진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그런 공야휘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람에 나부끼는 커다란 깃발이었다.
깃발에 적힌 세 글자.
사해련(邪海聯).
깃발 아래 모여 있는 일단의 무인들.
그들이 풍기는 무겁고도 살벌한 분위기.
선착장의 사람들도, 갑판 위의 사람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문가율 역시 사해련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련주께서 마중 나오신 모양이구나.]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무인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 공야장천의 기세를 우문가율은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배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잔뜩 상기되었던 분위기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기에 급급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는 그대로 선착장을 벗어나는 사람들.
선원들의 움직임도 바빴다.
사해련의 무사들을 힐끔거리면서.
"이 배도 아닌가······."
무인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이 배가 맞다."
공야장천이 낮게 말했다.
그의 말에 무인들 사이에도 침묵이 내려앉았다.
공야장천은 멀리 배의 돛대가 아스라이 보이는 순간.
그때 이미.
우문가율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기감에 좀 더 집중하니 함께 있는 공야휘연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갑판에는 면사를 쓴 우문가율과 공야휘연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선원들이 그녀들을 힐끔거렸으나.
곧.
사해련의 무인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들의 시선은 그 사이에 선 백발 백염의 노인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이내 내리깔았다.
노인이 풍기는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일초반식의 무공도 알지 못하는 선원들에게도 느껴졌으니까.
우문가율과 공야휘연이 배에서 내렸다.
"어서 오너라. 고생 많았다."
공야휘연이 공야장천의 품에 푹 안겼다.
그 모습에 선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럴 수밖에.
남창까지 오는 여정에서 수없이 힐끔거리며 봤던 여인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조금 전 배에서 내리지 않는 그녀들을 보고 망측한 생각을 잠깐 품었던 선원도 있었음이니.
그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공야장천의 품에서 나온 공야휘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야장천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되었다. 무사하면 되었어. 어서 가자꾸나. 아가야. 너도 수고가 많았다."
공야장천의 말에 우문가율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들은 남창에서 가장 큰 객잔의 별채로 향했다.
별채라 해도 작은 장원 정도의 크기였는데, 그곳 전체를 빌린 터였다.
사해련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기에 별채 근처로 함부로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공야장천이 공야휘연의 맥문을 잡고는 두 눈을 감았다.
천천히 내부의 기운을 살핀 그가 두 눈을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 음성에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손녀의 몸에 들어온 사특한 기운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에서 오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무백이 해결방안을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우문가율의 말에 공야장천과 문인백송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당혹한 얼굴.
무백이라니.
무백이라니.
설마 자신들이 아는 그 하무백을 지칭함인가?
적어도 두 사람의 상식선에서 하무백을 무백이라 저리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강호인은 없었다.
그 존재조차 모를 하무백의 사부라면 저리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
"하무백을 말씀하심입니까?"
문인백송이 조심스레 물었다.
"네."
담담히 답하는 우문가율.
두 사람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짙은 의문이 차지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공야휘연의 두 눈이 빛났다.
간질거리는 입을 금세 조잘거리며 움직였다.
이 순간만큼은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도 사라졌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죠. 할아버지. 진짜 신기한 인연이에요."
우문가율은 잠자코 있었고, 공야휘연의 입에서 쉬지 않고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모든 사연이 끝나자.
공야장천과 문인백송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믿어야 할 이야기란 말인가?
"허··· 그러니까 그날. 그랬던 이유가··· 이거 참······."
공야장천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우문가율은 그날.
늦어서 련에 피해를 입혔기에 지금도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늦었던 이유.
지금껏 몰랐던 사연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니까.
스스로에 대해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자신의 아들인 공야정문이 더 날뛰지 않았던가.
못난 놈.
헌데 그 사연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본인도 아닌 손녀의 입을 빌려서.
그러니까.
그날 한 아이, 아니 두 아이를 구하느라 늦었던 것인데.
그때 구한 그 아이가 하무백이라고?
그 하무백?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란 말인가.
믿어야 한다고?
그것은 문인백송 역시 같은 심정인 듯했다.
그의 두 눈이 연신 떨렸고, 동공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머릿속은 무언가를 하느라 바쁜 듯한데, 제대로 결론은 나지 않는 듯했다.
하무백.
유명했다.
은(恩)과 원(怨)이 확실하기로.
그런데 공야장천의 며느리에게 하무백이 은을 입었다.
그것도 구명지은(救命之恩)이다.
하무백 혼자도 아니고, 그의 동생까지.
이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과(過)가 아니라 오히려 공(功)이 아닐까 싶은 지경이다.
하무백에게 구명지은의 은을 입히다니 말이다.
잠깐 서로 눈을 마주친 공야장천과 문인백송의 시선이 우문가율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경외였다.
그 말고 어떤 감정을 담을 수 있으랴.
"대단하구나. 정말이지."
공야장천의 말에 우문가율은 묵묵히 고개를 숙일 뿐이다.
"정말입니다. 대단하고 말고요. 사해련 전체가 해도 못 할 일을 하신 겁니다. 정말로······."
이어진 문인백송의 극찬.
공야장천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우문가율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
과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다.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지."
공야장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에요? 하 교관님을 구해준 게?"
공야휘연이 진실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하무백 교관.
그가 천하제일인임은 알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구명지은을 베풀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도.
그런데 할아버지와 군사는 공야휘연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대단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고말고. 하무백. 그 인간인데."
그리 말하는 공야장천의 말에는 정말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천하제일인이라 하시긴 하셨죠."
그 때문에 그를 만나러 공야휘연이 가출을 했던 것이고.
"단순한 천하제일인이 아니다. 한 개인이 하나의 집단을 궤멸시킬 수 있는 인간이다. 그 인간은."
"집단이요?"
"그래. 가령 팽가와 같은 집단."
공야장천의 대답에 공야휘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팽가라면 단순히 집단이라 평하기에는 너무 거대하지 않나요?"
"그런 팽가도 홀로 무너뜨린 인간입니다."
문인백송이 끼어들었다.
"팽가 정도는 우습지. 어쩌면······."
공야장천은 뒷말을 삼켰다.
허나 대강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기에.
"하, 할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야휘연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밖에서 무인의 기별이 들렸다.
때아닌 손님의 방문이라니.
공야장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기감에 걸리는 인간이 없었으니까.
공야장천의 기감을 피할 이는 천하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그들 중 하나가 지금 방문했다고?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 인간이다.
"허허. 제 놈이 호랑이라도 된 모양이로군."
"호랑이가 아니라 사람이외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하무백이 들어왔다.
뒤에는 난감한 표정의 무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되었다. 가보거라."
공야장천의 말에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문을 닫는 무인.
방에 들어온 하무백은 우문가율을 향해 먼저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공야장천과 문인백송이 있는 자리에서 두 사람을 무시하고 곧장 자신에게 인사하는 하무백의 모습에 우문가율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도 오랜만이외다."
하무백이 공야장천과 문인백송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우문가율의 곤란한 기색을 읽고 취한 행동이었다.
"허, 허허. 허허허허."
듣는 것과 보는 것이 이리 다를 줄이야.
공야장천도 분명 조금 전에 그 사연을 들었건만.
지금 이리도 정중한 하무백의 모습을 보자니, 정말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비록 자신을 향해서가 아닌 며느리를 향해서였다지만.
저런 하무백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 상상도 못 했었으니.
"그 모습을 보아하니, 정말로 맞는 모양이로구나. 아가가 네 녀석을 구해줬다는 게."
"련주의 자부(子婦)께는 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공야장천의 말에 뻣뻣하게 대답하는 하무백.
그 태도에 공야휘연과 우문가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 어느 무인이 감히 대사해련의 련주 앞에서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상상도 못 한 일이다.
그 일을 지금 하무백이 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공야장천은 언짢아하지 않고 있었고.
하무백의 강함을 인정했기에, 그 태도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능히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그래. 광사괴승, 아니 현황 그 새끼는 어찌 되었느냐?"
그리 묻는 공야장천의 두 눈은 진득한 살기로 물들었다.
"염라 앞으로 보냈소이다."
하무백의 대답에 빙긋 웃는 공야장천.
살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이놈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
"하면 연아의 몸에 들어온 그 잡스러운 것은?"
본디 목적은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조금 전 공야장천이 직접 그것을 살폈으나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니.
"방도를 찾았으니, 그 새끼를 저승으로 보낸 것 아니겠소. 그깟 기운 태워버리면 그뿐."
피식 웃는 하무백.
공야장천은 고까운 표정으로 하무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다만 그깟 기운이라는 녀석을 태워버릴 방도를 찾지 못한 것 아닌가.
태우려면 태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내공을 밀어 넣는다면야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다만 손녀가 그 기운을 버티지 못한다.
기운을 태우기 전에 손녀의 혈맥이 먼저 터지리라.
반면 공야휘연은 몸을 떨었다.
그럴 수밖에. 방도가 있다 하였으니까.
저 웃음이 세상 그 무엇보다 밝은 빛으로 그녀에게 다가왔으니.
지금도 자신의 단전을 조금씩 파고들려 하는 정체불명의 기운.
그것을 파훼할 방법을 찾았다니.
"연아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는 거겠지?"
"은인의 따님이오. 설마 내가 그러겠소?"
"난 은인의 시부이다만?"
"혼약만 파기하면 남남이 될 사이오."
하무백이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말하자.
"크하하하하!! 하하하!!"
공야장천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저리도 즐거운 것일까.
"그래. 그렇지. 헌데 정문이 그놈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내 아들놈이지만 참으로 못난 놈이야."
"처리해 드리오?"
하무백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우문가율의 남편이자, 공야장천의 아들인 공야정문.
그 때문에 우문가율이 고생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것은 우문가율이다.
"절대 안 될 말이다! 입에도, 아니 생각조차 하지 말아라!"
당장 터져 나오는 다급한 외침에 하무백은 순순히 물러났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 순한 양 한 마리와 같은 모습.
문인백송은 그 모습이 너무도 신기하기만 했다.
절대 길들일 수 없는 광룡과도 같은 모습만 보았으니까.
"방법이 있으면 어서 파훼해야지. 뭔가 필요한 게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자리를 피하던가?"
"맥문."
하무백의 짧은 말에 공야휘연이 맞은편에 앉아 손목을 내밀었다.
자신의 기운을 공야휘연의 몸에 밀어 넣는 하무백.
두 눈을 감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 멀쩡히 눈을 뜬 모습이다.
슬금슬금 그 기운을 찾아가는 하무백의 기운.
단전에 이르자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제법 커져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한 달이 한계였겠군.'
그 뒤가 되면 이 기운에게 잡아 먹혔으리라.
'심연. 대체 어떤 존재냐······.'
잠깐 얼굴을 찡그리는 하무백.
그런 그의 표정에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은 가슴이 철렁했다.
혹여라도 잘못된 것인가 하여.
그럴 일은 없었다.
하무백이 본격적으로 기운을 운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