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고마우이
온몸에서 은은히 비치는 상아빛 서기.
노란빛을 머금은 상아빛이다.
지금까지 하무백이 보여줬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어딘가 신성하고 경건한 모습.
공야장천이 알고 있던 하무백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에 놀란 것은 문인백송 역시 마찬가지.
우문가율은 감격한 얼굴로 하무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자신의 선행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것에 대해 감사하며.
공야휘연은 움찔했다.
하무백이 기운을 운용한 것뿐일 진데.
단전에서 반응이 있었던 탓이다.
마치 겁에 잔뜩 질려서 짖어대는 하룻강아지 같다고 할까?
정체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기운에게서 하룻강아지라는 느낌을 받는 것이 웃겼다.
하무백이 피어올린 기운이 그렇다는 사실에.
'천하제일인······.'
지금 그 말만이 공야휘연의 머리에 떠올랐다.
마침내 그녀의 맥문을 타고 하무백의 기운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곧장 단전을 향해 치달렸고.
"크윽."
공야휘연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이를 악물었다.
보통 이런 대법 중에는 피시전자가 입을 꽉 다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벌린 입으로 기운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괜찮아. 비명이 나오면 마음껏 질러라."
하무백이 무던한 얼굴로 말했다.
여타의 대법과는 전혀 다른 모양.
그 모습에 더욱 믿음이 갔다.
공야휘연의 단전이 날뛰었다.
정확히는 단전에 들러붙은 회색빛의 기분 나쁜 기운이다.
마치 천적이라도 만난 양 도망가려고 안달이었지만.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러자면 단전에서 떨어져야 하는데.
그러기에 공야휘연의 단전은 너무도 탐스러운 먹이였으니까.
하무백은 기운을 곧장 단전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지만.
최대한 고통을 줄여줄 요량이었다.
전신 대맥과 세맥에 먼저 기운을 불어넣었다.
회색빛 기운이 단전에서 떨어져 나와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하무백의 기운을 채웠다.
그에 따라 공야휘연의 몸 역시 은은하게 노란색 상아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무백의 기운이 발현된 것이다.
세 사람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떻게 저런 기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는 공야장천.
'분명 하무백이 다루지 않던 기운일 텐데··· 어디에서······.'
하무백의 새로운 모습에 호기심을 가지는 문인백송.
'참으로 훌륭하구나. 고맙다.'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우문가율.
그런 세 사람의 눈빛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하무백을 향한 믿음이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절로 믿음이 생기는 모습.
모든 도주로를 우선 차단한 하무백은.
사방에서 서서히 자신의 기운을 단전으로 밀어 넣었다.
끼에에에엑!!!!
마치 그런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현황이 지르는 최후의 단말마와 같은 비명.
단전을 완전히 에워싼 하무백의 기운이 단숨에 현황의 기운을 집어삼켰고.
파사삭.
그 기운은 그대로 바스라져 소멸했다.
"윽."
순간.
단전에서 현황의 기운이 떨어져 나올 때.
공야휘연은 다시 한번 신음을 흘렸다.
그 고통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기운이 하무백의 기운을 피해 전신 대맥에서 날뛰면서 움직였다면. 어마어마한 고통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됐다."
어느새 하무백은 모든 기운을 회수했다.
은은한 서기 또한 씻은 듯 사라졌다.
그저 무심한 한 무인이 앉아 있을 뿐이다.
공야휘연의 몸에는 대번에 변화가 나타났다.
미간의 어두운 기운이 씻은 듯 사라지고, 새하얀 그녀의 피부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 고마, 고맙습니다. 은인."
그때.
우문가율이 하무백의 손을 잡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녀가 하무백의 생명을 구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지금 하무백이 딸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이러지 마십시오. 부인.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부인께 입은 은혜는 고작 이 정도로 갚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무백이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야말로 쩔쩔매는 모습.
교룡관의 사람들이 보았다면 절대 믿지 못할 모습이었다.
"고마우이."
"정말 감사합니다."
공야장천과 문인백송의 감사가 뒤를 이었고.
공야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무백에게 절을 했다.
"구명지은에 소녀 성심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인사였다.
진실로 그녀는 혹시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도 떨었으니까.
할아버지도 방도가 없다고 했을 때는.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듯도 하였다.
천하제일인인 하무백이 못하더라도, 어쩌면 사해련주인 할아버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기에.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구명지은의 은인을 뵐 수 있었으니."
하무백이 우문가율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힘이 닿는 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개방을 통해 연락을 주시면 될 겁니다."
하무백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기색에 우문가율이 하무백의 손을 잡았다.
"설마 이대로 가려는 건 아니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쥔 손.
"아직 끝내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은인의 걱정이 깊을 것 같아 우선 서둘러 온 것입니다."
끝내지 않은 일이 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소림과 관련된 일일 터.
큰 은혜를 입고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무슨 대접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할 일이 있어 가겠다는 사람을 마냥 붙잡을 수도 없었다.
스르르.
우문가율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꼭. 꼭. 사해련에 들려줘. 반드시. 알겠지?"
우문가율의 당부.
하무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때는 란아도 데리고 갈 수 있으면 그리하겠습니다."
"꼭 와주게나. 기다리고 있겠네."
공야장천이다.
그에게는 살짝 고개만 까딱인 하무백.
공야휘연과 인사를 나눈 후 문을 열고 나선 그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은 숭산 쪽이었다.
"갔네요."
이제는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하무백의 뒷모습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우문가율이 말했다.
"그렇구나. 갔구나. 저 괴물이."
공야장천의 대답은 참으로 복잡했다.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문인백송이 냉철히 평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무백보다 최소 두 단계 이상 강해졌다.
그 이상은 문인백송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천하제일인이에요."
공야휘연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진정한 천하제일인이야."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공야장천.
공야휘연의 시선이 그런 그에게로 향했다.
"할아버지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백 초?"
손녀의 당돌한 물음에 인상을 살짝 찡그리는 공야장천.
"예끼. 아무리 그래도 이 할애비가 백 초라니. 적어도 천 초는 나눠야 자웅을 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만만한 대답.
진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당당히 할 수도 있는 것일까?
일말의 불쾌함도 없이.
공야휘연의 시선이 문인백송에게로 향했다.
천재적인 그의 평이 궁금한 것이다.
"사부. 정말이에요?"
사해련의 소공녀가 아닌, 한때 문인백송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공야휘연의 물음.
문인백송은 그에 맞게 답을 했다.
"글쎄다. 지금 내 식견으로는 가늠이 안 되는구나······. 그렇다면 천 초까지는 못 버티실 게다."
슬쩍 시선을 돌리는 문인백송.
그런 그의 옆얼굴로 공야장천의 따가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제 련으로 돌아가야지요."
우문가율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오늘 하루 이곳에서 여독을 풀고.
내일은 형산을 향해 길을 떠나야 했다.
공야휘연의 몸 상태도 더없이 좋았으니.
그렇게 휴식을 위해 응접실에서 각자의 방으로 움직일 때.
공야휘연은 하무백이 나가고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꼭. 강해져서 당당히 련을 나갈 거예요. 본 모습을 찾은 사일자뢰궁을 가지고.'
***
하무백은 빠르게 치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다시 도착한 숭산.
소실봉의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서 기운을 끌어올리는 하무백.
점점 끌어올릴수록 주변에 광풍이 몰아치는가 싶더니.
이윽고 소실봉이 낮게 떨며 울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하무백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정신없는 며칠이었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다니.
지난 무림대전 이후 오랜만의 일인 듯도 했다.
갔다가 왔다가 다시 갔다가.
소림 현광의 수작질 덕이다.
잠시 후.
하무백이 기다리던 사람의 기척이 점점 정상으로 올라왔다.
"아미타불. 역시 하 시주셨구려."
나타난 이는 현길이었다.
하무백이 일으킨 기운은 현길의 기운을 보고 얻은 상아빛의 기운.
현길 역시 그 기운을 읽었다.
소실봉이 떨고 울음을 흘릴 정도라니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괴물이다.
"할 이야기 남았다고 했잖아."
그렇긴 했다.
하지만 떠난 지 고작 사흘? 나흘? 정도 만에 이리 나타날 줄이야.
"무엇이 궁금한 것이외까?"
현길이 염주알을 쥐며 물었다.
"심연. 만났지?"
직설적인 물음.
"그러하오이다. 하 시주."
현길은 부정하지 않았다.
만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리고 하무백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무엇이 궁금한 겁니까?"
"그놈. 대체 어떤 놈이야?"
하무백이 물었다.
현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답은 이내 나왔다.
"모르겠습니다."
"몰라?"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습니다. 저는 스승님의 유지에 따라 그 힘을 얻기 위해 역근세수경을 수련하였고 이윽고 만났습니다. 불과 얼마 전이지요."
하무백은 잠자코 현길의 말을 들었다.
"힘을 주겠다더군요. 세상 모든 마를 멸할 힘을. 자신은 태초의 힘의 파편이 지닌 의지라면서. 세상의 마를 멸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했지요."
하무백이 눈썹을 찌푸렸다.
현황의 심연과 이름은 같았지만, 성질은 전혀 다른 녀석이었다.
현황 새끼의 심연은 그야말로 세상 모든 사악한 것을 모아둔 듯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신의 의지를 받아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파편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그것이 네가 보여주었던 힘인가? 그런 것 치고는 어설프던데?"
현황과 비교하자면 정말이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현황이 말했던 상극.
그래.
상극이 분명한 힘이었기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현황의 것은 자신이 제대로 망가뜨려 놓은 후였고.
그렇지 않고 온전한 상태에서 현황과 현길이 붙었다면.
십 중 십.
현황의 승리였다.
아무리 상극이라 하지만, 현황이 가진 기운의 크기와 숙련도가 훨씬 크고 높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그날. 심연을 받아들였으니까요."
하무백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그런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다.
"제가 심연을 처음 만났던 것은 두 달쯤 전. 그 만남에서 저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멸마를 이야기했지만. 무공이 가진 의지라니. 그것은 신공이 아니라 마구니가 아닐까 했지요. 그래서 외면했습니다. 광해 사숙께서 말씀하신 힘이 이런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요."
하무백의 두 눈에 은은한 감탄이 어렸다.
힘의 유혹이다.
현황 놈을 보면 알다시피, 넘어가기 너무도 쉬운 유혹.
승려이기 이전에 무인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힘을 주겠다는 존재를 오히려 의심하고 외면하다니.
"그날. 현황 사형을 보고, 참회동을 확인하고 깨달았습니다. 사형을 열반에 들게 하려면 심연의 힘을 얻어야 한다고."
"그래서 손을 잡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현길.
"'나는 태초의 수많은 파편 중 하나. 그것의 의식이다. 나의 의지는 곧 태초의 의지. 그 힘을 받아들이겠느냐, 인연자여?' 이것이 그 순간 심연이 저에게 한 말이지요."
"그 뒤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만날 이유가 없으니까요."
담담히 답하는 현길.
그가 심연을 만나고 손을 잡았던 이유는 단 하나.
현황의 열반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지금.
굳이 다시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그 힘. 내가 파괴해도 될까?"
하무백이 물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제는 필요도 없는 힘입니다."
즉시 튀어나오는 대답.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그 모습에 하무백은 결정을 내렸다.
"뭐, 잠시 더 지켜보도록 하지."
"하면 이제 용건은 끝난 겁니까?"
현길의 물음에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네게 있던 용건은 끝났는데, 아직 소림사에 용건이 남았어."
"그게 무슨······."
"장경각."
짧은 말.
그제야 현길은 하무백이 소림사에 난입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장경각에 마공의 흔적이 있다고 했던가?'
하무백이 현길을 똑바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확인해야지. 그곳에 뭐가 있어서 그런 괴물이 탄생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