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바른 기운···
현길의 얼굴은 난처한 기색으로 가득 찼다.
그럴 수밖에.
외인이 지금 장경각에 들겠다고 선언한 격 아닌가.
막아야 했으나.
막을 수가 없는 인물인 것이 문제다.
"장경각은 소림의 최중지 중 한 곳이외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특히나 외인에게는요."
그럼에도 현길은 해야 할 말을 했다.
하무백이 물었다.
"하면. 내가 들어가려면 어찌해야 하지?"
"장문인, 그러니까 방장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요."
"방장이라······. 흠. 현광?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닐 텐데?"
하무백의 말대로다.
현재 현광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쩍쩍 금이 가고 갈라진 단전.
아무리 운기행공을 해도 그 상처가 닫히지 않았다.
운공을 멈출 수 있는 시각은 고작해야 일 각.
그 이상 멈추면 단전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고 산산이 부서질 상태였다.
현광은 지금 사력을 다해 운공 중이었기에.
하무백의 장경각 출입을 허락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대체 방장 사형에게 어떤 수를 쓰신 겁니까?"
암수(暗手)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으나 꺼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 광경을 모두 보았기에.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제 놈 스스로 때문이지."
하무백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스스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길.
"현광의 단전을 손상시킨 기운은 네가 지닌 기운의 성격을 따라 한 기운이야."
깜짝 놀라는 현길.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기운의 성격이란 개인과 무공의 고유한 특질이 아니었다고?
현길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저리 태연히 한다니.
저래서 괴물인 것인가.
"본디 네 기운의 성격이니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하무백의 물음에 현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역근세수경을 익히고 수련한 기운이다.
그 속에서 태초의 파편 중 한 조각이란 놈이 불쑥 튀어나왔고.
'심연은 광휘의 일부로 세상을 밝힐 바른 기운이라 했던가
처음 심연과 조우했을 때 현길에게 전해진 심연의 의지였다.
"바른 기운······."
하무백이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불광이라 표현하더군. 너희 땡중들은."
현길이 처음 현황을 상대로 기운을 발했을 때를 말함이다.
"심중 깊은 곳에 사파에 대한 복수심이라는 심마를 품고 있는 그놈의 내공으로 아무리 운공을 해봐야. 단전에 균열을 만들어 둔 내 기운을 몰아낼 수 있을까. 균열이 심해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고작일 거다."
하무백이 그답지 않게 순순히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책도 나왔다.
심마를 없애면 된다.
광해성승을 속이기 위해 그저 심마를 없앴다고 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명경지수 같은 마음으로 심마와 번뇌를 떨쳐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단전이 깨지리라.
운공을 멈출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일 각.
먹고 배설하는 정도의 행위는 할 수 있는 시간이라지만.
사람인 이상 하루 한 시진이라도 잠을 자야 했다.
운공 중에는 피로 또한 풀려 수면시간을 극도로 줄일 수 있다 해도.
그것도 하루 이틀의 일이다.
결국은 수면을 취해야 한다.
몇 달은 몰라도 일 년이 넘어가면 한계에 부딪힐 터.
그러면 현광의 단전은 결국 깨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마에서 벗어난다면?
더 이상 그런 비뚤어진 눈으로 사파를 멸시하지 않을 터.
제마멸사.
척마멸사.
파사현정.
소림이 가는 길을 굳건히 가면서, 거기에 사심이 섞일 일은 없는 것이다.
심마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면 소림에 어울리는 진정한 방장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요.
실패한다면 단전을 잃고 한 사람의 필부(匹夫)로 돌아가는 것.
이래도 저래도 현광은 목숨만은 건진다.
현길이 내공을 불어넣어 주면 현광이 조금은 수월하게 균열을 막을 수 있기도 했다.
하무백의 말을 듣고 나서야 현길의 내공이 효과적인 이유를 찾은 지금이지만.
현광이 행한 일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관대한 처사다.
현광은 현황을 풀어주었다.
한 사람을 잡기 위해.
그 사람이 하무백의 은인의 딸.
현길이 현광과 독대했을 때 들은 이야기다.
그러니 현황이 그리 죽은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현광 사형에게 들은 하무백이라는 인간은 은과 원에 철저한 괴물이었으니.
그런데 현광 사형에게는 저런 관대함을 보이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시선을 느낀 것일까.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빚이 있거든. 현광 땡중에게는."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지난 무림대전에서. 내 밑에 있는 애들 몇이 도움을 좀 받았어. 목숨 빚을 졌지."
수하들이 현광 사형에게 구명지은을 입었다는 이야기.
현광이 과연 그것을 의도했을까?
혈교와 마교의 악적들을 때려잡겠다고 날뛰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의도가 어떠하였든 결과가 그러하였으니.
"현광을 살려주고, 또한 회복할 방법까지 알려줬어. 거기에 죽이지 못해 봉인만 해둔 무림공적을 내가 처리했지. 그 대가로 우리 애들 목숨 빚에 더해 내가 장경각에 들어가는 걸로 계산 끝내지."
사파에 대한 현광 사형의 심마가 재앙을 몰고 왔으나.
소림이 더욱 바르게 나아갈 길 또한 가지고 왔음이니.
세상사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미타불. 불존이시여······."
하무백의 제안에 대답 없이 불호만 외는 현길.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논의를 해야 하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 말한 현길이 몸을 훌쩍 날려 소실봉 중턱 소림사를 향해 내려갔다.
***
"······."
굳게 다문 입.
현광은 운공에 열중했다.
쩌적쩌적 균열이 가서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단전.
이대로 두면 당장이라도 깨질 듯했다.
전력으로 내공을 불어넣어 균열을 수복하고자 했다.
다행이랄까.
수습이 가능한 균열이었다.
여기서 더 깊은 균열이었다면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치료가 어려웠으리라.
'사부님······.'
단전에 정신을 집중하는 와중에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현광.
그 생각은.
사부에 대한 원망이다.
자신이 익힌 내공심법.
반야대능력(般苦大能力).
칠십이종절예 중 최상위권을 다투는 심법이다.
현광이었기에 전수받아 익힐 수 있었던 심법이지만.
지금 그는 그런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현길이 익힌 역근세수경.
오직 그것만이 떠올랐다.
현길이 불어넣어 준 내공이 잠시지만 일부 균열을 붙였다.
그의 내공이 소진되자마자 다시 벌어졌지만.
그러니 사부에게 원망이 생길 수밖에.
반야대능력이 아닌 역근세수경을 익혔다면 이깟 균열 따위 금세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
그럼에도 지금 현광은 반야대능력을 열심히 운용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단전의 균열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이니.
방장실 한 곳에 제자들이 가져다준 벽곡단을 씹으며 오직 운공에만 매달리는 현광.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현길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방장 사형."
그날.
현황이 죽은 날.
금강나한을 비롯한 소림의 명숙에 해당하는 제자들 앞에서 까발려진 현광 자신의 민낯.
그럼에도 아직 제자들은 현광을 소림 장문인, 방장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날.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저 현길마저도 말이다.
"무슨 일이냐?"
그리 묻는 현광의 눈에는 은근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다시 한번 내공을 불어넣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때뿐이라는 건 알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좀 편해지니.
"하 시주가 찾아왔습니다."
기대와 다른 대답에 현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조금 전의 진동이······."
방장실의 현광 또한 소실봉의 떨림을 느꼈다.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없다."
현광이 짧게 말했다.
그랬다.
고작해야 일 각뿐.
현길은 재빠르게 자신이 하무백에게 들은 이야기를 간략히 전했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현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참견이란 말인가.
심마를 떨쳐야 단전을 회복할 수 있다니.
"그냥 내가 역근세수경을 익히면······."
현광의 말에 현길이 고개를 저었다.
"심마가 든 채로 익혀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형. 역근세수든, 반야대능력이든요."
그것은 태초의 파편 중 하나, 광휘의 조각이 지닌 특질이었으니까.
"하무백······."
뿌드득.
현광이 이를 갈았다.
"하 시주는 사형께 빚이 있어 이 정도로 마무리한다고 하였습니다. 사형께서도 이참에 심마에서 벗어나심이······."
현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빚이라고? 그가?"
"수하들의 목숨 빚이라고."
"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난 무림대전에서.
위기에 처한 호천단을 자신이 금강나한들과 함께 구원한 적이 있었다.
적들을 때려 부수다 보니 그곳에 호천단이 있었다.
그들은 함정에 빠졌다고 했었다.
그곳에 하무백은 없었다.
다른 곳을 공략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하무백이 있었다면 그리 위기에 빠지지 않았겠지.
"잠시 기다려라."
현광은 다시 운공에 들었다.
어느새 시간이 일 각이 다 된 것이다.
운공에 든 현광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살 방도가 나왔다.
단전을 잃고 범인(凡人)이 된다니, 현광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승려이기 이전에 무인이자, 강호인이었기에.
대략 반 시진.
그 정도의 운공으로 다시 급한 균열은 막았다.
현광이 두 눈을 떴다.
"그리고 그가 장경각에 들고 싶다 했습니다. 마공의 흔적을 찾겠다고. 그걸로 빚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건방진······."
현광은 그런 하무백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놈이라면 억지로라도 들려고 할 것이고.
그것을 저지할 사람이 소림에 없었다.
아니, 천하에 있기는 할까.
장경각에서 불경을 탈취하고 그것에 들어있던 무엇을 익힌 현황이라면 자웅을 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겼는데.
현황의 착각이요, 자신의 착각이었다.
그렇다면.
하무백이 제안한 대로, 자신의 회복 방법을 알려준 것에 대한 대가라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다.
단전을 망가뜨린 것도 하무백이었지만.
'병 주고 약을 준다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알았다. 현축과 의논해 보거라. 나는 허락했다 이르고."
그리 말한 현광이 두 눈을 감았다.
"부디 심마에서 벗어나 대성을 이루시길. 아미타불."
사형을 향해 합장한 현길은 방장실을 벗어나 장경각을 찾았다.
그 뒤로는 순조로웠다.
하무백의 신위를 이미 모두 본 터였다.
결사항전을 한다면.
소림의 모든 이들이 나선다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그가 장경각의 비급들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마공의 흔적만 살피겠다는데?
그리고 방장도 이미 허락했다는데?
그렇게 현축도 몇 가지 조건을 건 채 하무백이 장경각에 드는 것을 허락했다.
다른 명숙들 역시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현길은 그 소식을 가지고 다시 소실봉을 올랐다.
"너무 늦어."
짤막한 말.
"장경각에서 딱 한 시진. 한 시진이외다. 하 시주."
도착하자마자 현길이 한 말.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리고 어떠한 무공비급도 열람해서는 아니 됩니다."
"관심도 없어."
"그리고 혹시 모르니 장경각주인 현축 사제가 동행할 것입니다."
"방해만 안 하면 돼."
그렇게 조건의 조율은 금세 끝났다.
"그러면 언제 장경각에 드실 겁니까?"
"지금."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하무백.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소림사로 걸음을 옮겼다.
"장경각에 들었던 침입자. 현황 그 새끼가 맞지?"
"그렇습니다."
이미 그때 듣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그 새끼는 장경각에서 뭘 가져간 거야?"
"천수사리보리경이라는 불경입니다."
"비급이 아니라?"
"불경입니다."
묘하게 변하는 하무백의 표정.
"그걸 가지고 사라졌던 현황이 갑자기 튀어나온 곳이 저쪽."
준극봉을 쳐다보는 하무백.
"이런. 정신이 없어서 더 중요한 곳을 잊었군."
그랬다.
현황이 숨어 있던 암동.
천수사리보리경이라는 불경을 가지고 숨어들어 그곳에서 더 강해져 나타났다.
하면 장경각의 잔향보다 진한 무언가가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천수사리보리경의 비급 역시도.
"저곳 먼저 가봐야겠어. 소림사에서 좀 기다려."
"알겠소이다. 아미타불."
하무백이 훌쩍 허공으로 몸을 띄워 준극봉을 향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