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부술까?
하무백이 현황과 난투를 벌였던 곳.
이곳은 여전히 초토화된 상태다.
말라비틀어져 죽은 나무들이 가득했고, 파괴된 땅과 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생기를 빨아먹는다니··· 쯧."
혀를 차는 하무백.
담담히 상대하기는 했지만.
정녕 악마의 무공, 아니 악마의 힘이라 할 만했다.
심연.
그리고 태초의 파편.
아니, 태초.
이게 무엇인지.
의문을 가슴에 둔 채 하무백은 몸을 움직였다.
무극명륜안을 운용하면서 당시 현황이 나타났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니.
현황을 처음 조우했던 절벽.
그곳에 암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수련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듯한 암동이다.
아마 소림사의 고승이 만들어 둔 것일 터.
소림이 자리한 숭산과 무당이 자리한 무당산에는 이런 암동이나 암자 같은 곳들이 도처에 있었다.
그렇게 암동의 끝에 도달하니.
하나의 서책이 있었다.
현길에게 들은 대로.
천수사리보리경이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집어 들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불경이 맞았다.
소림의 무공 중에는 불경 같은 이름을 가진 것들도 있었기에.
현길이 하무백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으니 믿었으나.
그 속 어디에서 심연이라는 놈이 튀어나왔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은 것이다.
한 번 읽어서는 별 다를 것 없는 불경이었다.
다시 읽었다.
무극명륜안으로는 분명 장경각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여기서도 보였다.
훨씬 더 진하게.
그렇다면 이것이 맞다는 것인데.
'뭘까?'
허무호연심결은, 비급 자체엔 아무런 기운도 없었다.
단목운뢰가 그것을 익힌 후에야, 그리고 하무백이 비급을 모두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고서야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이건 비급 자체에 기운이 담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찾아서 흡수하라는 것처럼.
이것이 지녔던 기운, 그 성격은 분명 허무호연심결, 그리고 천마신공과 같은 부류였다.
얻게 되는 정보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의문만 더 늘어갔다.
두 번의 완독.
그 속에서 희미한 기운을 느꼈다.
내용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글자.
그 자체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운을 느낄 수 있게끔.
비슷한 기운을 지니고 있다면 훨씬 쉽게 그 기운을 느낄 수 있게.
하무백이 처음 기운의 흔적을 발견한 것처럼.
아마 현황도 그렇게 이 불경의 기운을 알아차렸으리라.
기운을 느낀 후 다시 한번 읽으니.
현황이 미처 모두 흡수하지 못한 잔여 기운이 스르르 하무백의 몸으로 파고들려 했다.
하무백은 일단 받아들였다.
그렇게 몸속에 들어온 기운은 슬금슬금 하무백의 단전으로 접근했다.
가만히 그 기운을 관찰하는 하무백.
공야휘연의 몸속에 자리 잡았던 기운을 떠올리며 자신의 몸에 들어온 녀석을 유심히 살폈다.
그처럼 움직일까 하여.
하무백의 단전에 달라붙은 기운은, 처음에는 공야휘연의 몸속을 침범했던 기운처럼 움직이려 하였으나.
우웅.
단전이 잠깐 떨리는가 싶더니.
그 기운을 흡수해 버렸다.
너무도 자연스레 하무백의 내공에 흡수되어 버린 마공의 성격을 띤 기운.
허탈했다.
이렇게 쉽게 흡수되다니.
무언가 다른 움직임을 보여서 어떠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했는데.
그래도 자신의 내공에 무슨 변화가 생겼을까, 하무백은 가부좌를 틀고 운공에 들었다.
큰 변화는 없었지만.
변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미했지만.
하무백의 내공이 허무의 성격 또한 지니게 되었다.
흡수하니 알 것 같았다.
허무호연심결과 같은 성격의 기운이라는 것을.
그것이 가졌던 특질.
이름 제일 앞에 쓰인 두 글자 그대로 정의 내릴 수 있었다.
허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마교의 천마신공도 허무라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니 그 또한 허무.'
처음 느꼈을 당시에는 마공과 비슷한 흔적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결국은 허무라는 같은 뿌리를 둔 기운이었던 것.
왜 마교에서 단목세가의 비급을 그리 애타게 찾았는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다.
천마신공에서 부족한 부분이 허무호연심결에 있는 것일 터.
거기에 더해 현황의 무공에 마지막으로 더해진 특질이 바로 이 허무였다.
"이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거야."
하무백의 시선이 암동 밖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을 소림사.
장경각.
현황이 처음 지녔던 기운은 분명 이와 달랐다.
그것 역시 장경각에서 얻었으리라.
하무백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장경각을 살필 차례다.
몸을 날려 암동을 벗어나 소실봉을 향해 움직였다.
소림사의 산문 앞에 당도하니 이전과는 달리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미리 위에서 명이 내려온 듯했다.
하무백은 아무런 방해 없이 장경각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오셨군요. 하 시주. 아미타불."
현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곁에는 무표정한 현축이 있었다.
내심 가진 불만을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막을 방도가 없으니 허락은 하였으나, 장경각주로서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그런 불만.
"들어간다."
짧은 한마디.
하무백은 거침없이 장경각 안으로 향했다.
장경각을 지키는 삼십육금강나한이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막으려 했다가, 이내 하무백 그의 입장을 허락했다는 현축의 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런 금강나한을 힐끔 본 하무백은 곧장 장경각 안으로 사라졌다.
그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무극명륜안을 운용한 채로 장경각의 서가 하나하나를 훑었다.
장경각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하무백이 얻어낸 시간은 한 시진.
'빠듯할지도 모르겠어.'
자신만만하게 충분하다고 했는데.
좀 서둘러야 할 듯했다.
하무백의 걸음이 빨라졌다.
기감도 장경각에 집중했고, 무극명륜안을 극성으로 운용하면서 서가를 빠르게 훑었다.
'저기 하나.'
일단 지나쳤다.
'저기도.'
다시 지나쳤다.
일 층은 이렇게 끝났다.
이어서 위층으로 올랐다.
'흠. 여기도.'
또 지나쳤다.
계속해서 올랐다.
'저기도 있군.'
하나 더 지나쳤다.
이제 한 층이 남은 상황.
최상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은 거대한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응? 여긴 뭐지?"
하무백이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현축을 향해 물었다.
"금지(禁地) 다."
현축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현길은 이 빌어먹을 놈에게 깍듯이 경어를 사용한다지만.
현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현축의 입장에서 하무백은 침입자요, 정복자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감히 이 소림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런 현축의 말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하무백이 다시 말했다.
"나는 장경각이라 분명 말했는데. 저기는 장경각이 아닌 건가?"
"장경각이 맞다. 허나 소림에서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지다. 현황 사형도 저곳에 들어간 적은 없다. 학승은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니."
"약속과 다른데? 전부 살피게 해준다고 했을 텐데?"
"저곳에는 네가 볼 수 있는 비급이 단 한 권도 없다. 어떠한 무공비급도 열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텐데?"
지지 않고 받아치는 현축.
"저곳에 무공비급만 있나? 불경은 단 하나도 없이?"
하무백이 다시 물었다.
그 물음에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현축.
당연히 무공비급만 있지 않았다.
소림사는 사찰이다.
부처를 모시는 사찰.
불경 중에서도 무가지보와 같은 귀중한 경전들이 장경각 최상층에 보관되어 있었다.
목판본 역시 다수 존재했다.
하무백이 잔뜩 찡그리고 있는 현축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있지?"
"······."
대답하지 못하는 현축.
"열어."
하무백이 짧게 말했다.
허나 현축은 여전히 망설였고.
"부술까?"
이어진 하무백의 물음에 그제야 마지못해 움직였다.
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그냥 단순히 열쇠로 여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현축이 내공을 운용해 열쇠와 자물쇠에 주입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열리지 않게끔 만들어진 기물.
그런 만큼 파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하무백이라면 왠지 쉽게 할 것 같았기에.
현축은 결국 문을 연 것이다.
최상층에 오른 하무백.
그의 시선은 무공비급이 소중하게 보관된 곳으로는 한 번도 향하지 않았다.
그가 가만히 보고 있는 곳은 목판본이 꽂혀 있는 서가였다.
반야바라밀다대장경.
불경이었으나 그 가치는 이곳에 보관된 무공비급 못지않은 귀중한 경전이었다.
하무백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머, 멈춰라. 그건······."
현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가지고 가거나 훼손하거나 그럴 생각 없으니까. 진정해. 무공비급이 아니라 불경이잖아."
하무백의 말이 맞았다.
반야바라밀다대장경이라지만.
그 내용은 결국 반야바라밀에 관한 것.
소림의 보물이라는 것 외에는 하무백이 보지 못하게 막을 명분이 없었다.
헌데 하무백이 먼저 말했다.
가져가지도 않을 것이오, 훼손하지도 않겠다고.
막을 명분에 대한 싹을 자르는 말.
하무백은 수많은 대장경판 중 하나를 빼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현축의 눈에는 그저 대장경판을 보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하무백은 그 내용을 읽고 있었다.
내용이 아닌, 글자에 담긴 기운을 제대로 일깨우기 위해.
그렇게 읽어서 깨워낸 기운.
'이건··· 역근세수경의 그것이군.'
현길이 역근세수경을 익혀 만났던 심연.
거기에서 얻었던 기운.
그것이었다.
광휘.
현길은 심연이 광휘라 말했다고 했었다.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에 깃들어 있던 기운과 같은 것이었다.
하무백은 담담히 흡수했다.
"가지."
경판을 제자리에 꽂아놓고 몸을 돌린 하무백이 말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하무백을 이끌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다시 굳건히 잠기는 자물쇠.
예상한 것과 달리 별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순순히 열어주는 것이 맞는 선택이었다.
"이제 끝인가?"
현축의 물음에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 각 남았어."
"한 시진이면 충분하다 했다더니. 설마 꽉 채울 생각인 줄은 몰랐군."
현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치 하무백이 들으라는 듯.
허나 하무백은 그 중얼거림을 무시할 뿐이다.
그렇게 하무백은 미리 봐두었던 곳들을 차례대로 들렀다.
한 곳은 역시 광휘의 기운이 있었다.
현황이 익힌 것과는 다른 기운이었기에 그가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다음에 간 곳.
역시 불경이었으나.
기운은 희미한 흔적만이 자리했다.
허무도 광휘도 아니었다.
하무백은 희미한 흔적을 흡수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는 듯한 기운.
그 정체는.
'혈교!'
하무백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몸에서 순식간에 살기가 폭사했다.
"히익!"
그 모습에 현축이 깜짝 놀랐다.
멀쩡히 불경을 보다가 갑자기 왜 저런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현축은 체통에 맞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 하무백의 살기는 가라앉았고, 현축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몸을 일으켰다.
하무백은 관심도 없다는 듯 불경에만 집중한 상태다.
"흠흠."
현축은 무안한 마음에 헛기침을 내뱉었으나.
하무백은 미동도 없었다.
'혈교 새끼들의 기운이야, 이건······. 그러면 혈교 놈들도 태초의 파편이라는, 심연이라는 새끼의 힘과 연관이 있었단 말이지?'
마교는 허무.
그리고 혈교는 그와는 다른 힘.
그 성격을 찬찬히 살피니.
'어둠?'
어둠이 떠오르는 힘이다.
남아 있는 양이 제법이었다.
암동의 천수사리보리경에 남아 있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다섯 배는 더 남아 있었다.
잔향이 이리 많다는 것은 애초에 담겨 있던 기운도 훨씬 많았다는 것.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천수사리보리경의 그것에 비해 다섯 배는 많은 기운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하무백.
일 층이다.
여기에는 두 곳이 있었다.
그중 한 곳.
역시 흔적만 남았다.
현황이 가장 먼저 발견한 힘이 아마도 이것이었을 터.
이것이 현황이라는 미래가 기대되는 학승을 무림의 공적이요, 악적이자 마두로 만든 것이다.
하무백은 그 흔적을 흡수하여 역시 찬찬히 살폈다.
허무와도 어둠과도 다른 성격이다.
'혼란? 어지러움?'
그런 것이 떠올랐다.
이 불경을 어찌나 읽었던지 책 곳곳이 닳아 있었다.
이렇게 읽은 이는 현황일 터.
그랬기에 이 속에 잠자고 있던 그 심연 새끼를 만날 수 있었던 거다.
여기에는 남아 있는 기운의 향으로 추정해보니 허무의 여섯 배 정도.
결국 현황의 가장 큰 힘은 이 혼란한 힘이었다.
그에 조금 못 미치는 어둠의 힘.
그리고 마지막에 약간의 허무가 더해진 것이었다.
'허무에 담긴 힘도 어둠에 담긴 힘만큼 컸다면 어땠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기는 것은 자신이었다.
하무백은 마지막 남은 곳으로 향했다.
"반 각 남았다."
뒤따르던 현축이 말했다.
어서 빨리 이곳에서 나가라는 재촉.
하무백의 걸음이 살짝 빨라졌다.
한 시진이라는 약속은 지켜야 했으니까.
약조는 반드시 지킨다.
그것은 하무백의 신조였다.
그렇게 당도한 마지막 불경이 있는 자리.
책을 펼치고 한 번 읽는 순간.
'이, 이, 이건······.'
깜짝 놀란 하무백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되었을까.
"이제 끝났다. 나가자."
현축의 말에 하무백은 멍한 얼굴로 그대로 장경각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현길의 인도에 따라 지객당의 한 방에 자리했다.
하무백을 안내하는 현길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하무백은 그런 현길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