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수고가 많다
현길이 하무백에게 내어준 지객당의 방은 무척 좋은 방이었다.
일파의 장문인급은 되어야 배정받는 방이다.
이보다 상급의 방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장문인에게 배정되는 방 정도뿐.
그러나 하무백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저기 하인들이 묵는 골방을 내줬어도 몰랐으리라.
그저 자신이 마지막에 받아들인 기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단전이 흡수하려는 걸 막고 따로 격리시켜 둔 기운.
하무백은 그 기운에 집중했다.
'이게 어떻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기운은 모르려야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기운이다.
익숙하다는 표현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여의!'
무극여의심법.
그중 여의편을 수련하게 되면 얻게 되는 내공.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장경각의 불경 속에 숨어 있단 말인가.
'현황이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심연을 만나지 못했다는 소리를 했던 것이.
자신이 현황의 기운에서 익숙함을 느낀 것이.
여의 또한 어쩌면 태초의 파편이라는 그것일지도 몰라서였다.
현황도, 현길도.
소림사에 보관된 경전의 글자 속에서 기운을 얻고, 심연을 만났다.
어쩌면 자신이 읽었던 흔하디흔한 불경.
천수경(千手經).
그곳에도 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격리된 기운을 세세히 살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역근세수경이 없었군.'
장경각에서 광휘의 기운이 담긴 대장경판은 보았지만.
역근세수경의 흔적은 남은 것이 없었다.
당연한 일.
그것이 보관된 곳은 장경각이 아닌 조사전이었음이니.
물론 하무백은 모르는 일이다.
천수경에서 얻은 기운은 아무리 살펴도 여의의 내공.
그 자체였다.
다른 것은 없었다.
자신의 내공과 사부의 내공, 그리고 설란의 내공이 다른 정도의 차이.
딱 그 정도의 차이만을 지닌 기운.
심연이라는 존재를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하무백은 격리를 풀고 단전이 그 기운을 흡수하게끔 두었다.
스스슥.
단전이 순식간에 기운을 흡수했다.
그때.
무언가가 하무백의 의식 속에서 고개를 들려 하는 듯.
무언가 전하려 하는 듯했으나.
파삭.
사라졌다.
대신.
단전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광휘, 여의.
거대한 두 가지 기운을 흡수한 단전이 껍질 하나를 벗으려는 듯.
기운이 날뛰었다.
황급히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운공을 시작하는 하무백.
그렇게 기운을 안정시키면서 운공에 빠져드니.
결국 단전은 한 번의 탈피를 거쳐 더 크고 단단해졌다.
내공이 더욱 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의의 기운은 그저 내공으로 화해 하무백의 단전에 흡수되었다.
광휘의 기운은.
단전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며 자리했다.
그것은 허무와 어두운 기운, 어지러운 기운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 셋은 워낙 미미했기에 자리라 할 것도 없었다.
다만.
허무는 하무백이 허무호연심결의 구결을 알고 있음 때문인지.
조금씩.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끝인가?"
몸을 일으키는 하무백.
문을 열고 나가니 현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취는 있으셨습니까?"
담담한 얼굴로 묻는 그.
"글쎄······."
하무백은 즉답하지 않았다.
"사흘입니다."
무얼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잠깐인 줄 알았는데 벌써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단 말인가.
"용케도 들어오지 않았군."
"식사를 가져다드리는 사미승이 하 시주가 무서워 도저히 안으로 들어가질 못해 앞에 두기만 했다 하더군요. 그 식사가 이틀간 그대로 있었기에 그 아이가 제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빙그레 웃는 현길.
지객장의 잡무를 보는 사미승들이 하무백이 무서워 안으로 들어서지 않은 것이란다.
대체 그에 대해 무슨 소문이 나있기에.
"소림에 첫 방문을 살벌하게 하시긴 하셨지요."
단번에 담장을 넘어 방장실 앞까지 갔던 때.
어린 사미승들 몇몇은 멀리 구석에 숨어서 그 모든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고는.
다른 이들에게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전해질수록 덩치를 불려가는 소문의 특성상.
하무백은 어느새 소림사의 사미승들에게는 삼두육비(三頭六臂)의 야차 괴물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저쪽 구석에 사미승 몇몇이 몸을 감추고는 이곳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선명한 계인.
아직은 앳된 얼굴.
하무백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흐익!"
깜짝 놀라는 사미승.
하무백이 싱긋 웃어주었다.
나름대로 따뜻한 웃음이었지만, 사미승에게는 공포스러운 살소일 수도 있는 것.
허나 웃음과 함께 하무백이 보낸 따스한 기운이 사미승들을 감싸 안았다.
"어어······?"
자신들의 몸을 감싼 기이한 감각을 느낀 사미승들.
그사이 하무백의 시선은 현길에게로 향해 있었다.
"현광은?"
"고작 사흘입니다. 성과가 있을 시간은 아니지요."
하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든 이제 내 알 바 아니다."
현길은 불호를 외며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부처께서 굽어살피실 겁니다."
피식.
하무백이 다시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뭐, 나는 간다. 이제."
몸을 훌쩍 날리는 하무백.
그렇게 소림을 떠났다.
***
산월마림.
옛 혈교의 터 지하 깊은 곳.
그곳에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 어디 간의 토굴.
운공삼매경에 빠져 있던, 혈교의 당대 교주 개세악이 잠시 눈을 떴다.
흰자위라고는 없는 시꺼먼 두 눈.
어둠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눈이 없는 듯했다.
가부좌를 튼 채로 운공에 빠져든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간 먹고 싼 횟수를 세어 보면 대강 가늠은 되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고.
단지 더 강해지기만 하면 될 뿐이다.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지하로 파고들 일이 없도록.
지상으로 나가는 날이 그런 날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운공하고 있는 무공이 그리 말해주는 듯했다.
한 번 실패한 무공일진데.
왜 이토록 파고들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성취는 무엇일까?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과 욕망의 이끌림 대로 다시 운공에 빠져들 뿐.
어디선가 스멀스멀 흘러나온 어둠이 그의 몸에 끊임없이 흡수되었다.
허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계속 운공만 할 뿐.
그럴수록 흘러나오는 어둠의 양은 많아졌고.
마침내.
푸스스슥.
토굴의 벽 한쪽이 무너졌다.
무너지고 드러난 곳은 짙은 어둠만이 자리한 공간.
개세악은 이곳에 들어온 후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행동 외에 처음으로 가부좌를 풀고 그곳을 향해 걸었다.
굳은 다리를 움직이느라 휘청거리는 걸음.
도착한 곳은 짙은 어둠밖에 없는 공간이었지만.
개세악의 눈에 선명히 보이는 것이 있었다.
"계단?"
어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더 짙은 어둠이 흘러나오는 것이 개세악의 눈에 보였다.
뚜벅.
한걸음 내디뎠다.
뚜벅.
다시 한 걸음.
뚜벅. 뚜벅. 뚜벅.
개세악은 계단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이곳에 왜 이런 공간이 있으며, 계단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 따위는 없었다.
그저 이끌림에 몸을 맡길 뿐.
***
"타핫!"
" 핫!"
"아악!!"
연무장에는 커다란 기합성이 울리고 있었다.
하투제가 끝나고 교룡관은 휴관기에 들어갔다.
여름 휴관기를 보내고, 후반기가 시작될 터.
허나.
지금 이곳 대연무장은 더위 속에서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생도들이 있었다.
모두 맹룡대 소속의 생도들.
하투제가 끝날 때.
관주인 팽도율이 말했었다.
맹룡대는 맡게 될 임무에 비해 수련 기간이 너무 짧아 생환율을 올리기 위한 방책으로.
올해부터 휴관기가 없다고.
덕분에 맹용대 생도들은 모두 땀을 흘리며 수련에 빠져 있었다.
이 수련의 책임 교관은 하무백이라 하였는데.
정작 그 책임 교관인 하무백은 없었다.
일이 있다고 떠난 후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는 당연하게도 한설빙이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생도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 속에는 맹룡대 이 년차 칠 조와 이십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연차를 가리지 않고 모두 휴관기가 없다고 했으니.
"좋아. 일 각 휴식."
한설빙의 선언에 생도들은 그 자리에 널브러지듯 주저앉았다.
정말 인정사정 안 봐주는 수련이었다.
"후우. 교관님은 언제 오시지?"
단목운뢰가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글쎄··· 그런데 최대한 늦게 오시는 게 우리한테는 낫지 않을까?"
당진산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하 교관님이 계시는 게 더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백리평의 의견.
연하민과 낙우진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이 대화도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으니까.
하투제가 끝나고 사흘이 지났을 무렵부터 반복된 대화였다.
하설란은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무사히 돌아올 오라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동생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니.
생도들에게 잠시 휴식을 부여한 한설빙.
그녀의 심사도 복잡했다.
편히 쉰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교룡관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궁에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이 인간은 대체 언제 오려고······.'
하무백이 부재중이라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교관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지만.
그래도 하무백이 없는 이상 자신이라도 챙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휴관기 동안의 훈련이야 방패술에 대한 단체 전술 훈련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이게 가장 중요하기도 하고.'
맹룡대의 수준에서는 산월마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훈련이었다.
그래서 방패술이 휴관기 훈련의 전부인 것이다.
"에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흘리는 한설빙.
시간을 가늠하니 슬슬 일 각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 훈련을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
한설빙이 몸을 일으켜 단상으로 향할 때.
하늘을 올려다보던 하설란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왔다!"
그리고 나직이 흘린 탄성.
그 말에 칠 조와 주우명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설마?"
단목운뢰가 물었다.
그녀의 능력에 대해 대강 알고 있는 이들이지 않은가.
하설란이 이렇게 탄성을 흘리며 반길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응. 오라버니가 지금 막 무창에 들어섰어."
하설란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기감으로 느꼈기에 알 수 있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아니. 조금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하무백이 기도를 숨기고 있다지만, 하설란의 예민한 기감은 그 속에서도 변화를 느낀 것이다.
"거기. 이제 수련 다시 시작할 시간이니까 잡담은 멈춰."
단상에 올라선 한설빙이 맹룡대 칠 조를 향해 외쳤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교관님이 귀환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당진산이 외쳤다.
그 외침에 한설빙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당진산이 귀환했다고 할 교관은 하나뿐이었으니까.
한설빙이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기감을 펼쳤다.
그녀가 평소에 펼쳐둔 기감은 대연무장을 덮을 정도.
그것만 해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하무백과 하설란이 기감에 있어 인외(人外)의 존재인 것.
위지군은 인외의 강함을 지닌 존재였고.
점차 넓게 퍼져가는 한설빙의 기감.
오로지 기감에만 집중하니 교룡관 전체를 뒤덮고도 더 번져 나갔다.
확장의 한계에 이른 순간.
기감 속에 들어서는 익숙한 기척.
물론 기도를 숨겨 평범한 필부처럼 느껴졌으나, 어찌 그 기척을 모를까.
하무백이 분명했다.
한설빙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펼친 기감의 범위에 들어갔음을 느낀 것일까?
하무백이 땅을 박차 훌쩍 날아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대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가 많다."
한설빙을 처음 보고 건넨 말이다.
이미 상대의 기감을 느낀 순간 그녀임을 알았던 터.
자신을 향해 싱긋 웃는 하무백의 모습에.
한설빙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화를 내야 할지.
반가워해야 할지.
아니면 이제 궁으로 떠나야 할지.
"응? 뭐야?"
그런 복잡다양한 한설빙의 표정에 하무백이 물었다.
"그럼 전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 말을 남기고 획 몸을 돌려 단상을 내려가는 한설빙.
"응?"
단상에 덩그러니 남은 하무백은 눈앞의 생도들이 방패술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에.
얼결에 수련을 시작했다.
귀환하자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