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왜입니까?
대연무장을 떠난 한설빙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서탁 한 켠에 곱게 접혀 있는 서찰.
내용은 모두 빙천궁, 그것도 한설빙의 가문인 한가의 암어로 적혀 있었기에.
그녀가 아니면 알아볼 수가 없었다.
길지 않은 내용이다.
귀환요망.
탁가준동.
단 여덟 글자.
암어를 해석하여 알게 된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만든 암어의 한계 때문이다.
다만.
탁가가 빙천궁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었다지만, 저렇게 준동이라 표현할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무슨 변화가 생겼다는 것인데.
너무 갑작스러웠다.
게다가 평소의 서찰과 달리 굳이 암어까지 사용한 것이.
그래서 당황스러웠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제 하무백이 돌아왔으니.
오랜만에 귀환을 해야 할 듯했다.
몇 년 만인지······.
오늘 채비를 마치고 내일 새벽녘에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외유를 끝내고 온 하무백과 제대로 인사는 하고 떠나야 했으니.
애초에 교룡관까지 제멋대로 쫓아온 것은 한설빙 자신 아니었던가.
***
"헉. 헉. 헉."
"우웩······."
"크헉······."
맹룡대 칠 조는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하무백이 단상에 올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내공을 익힌 이들의 내공을 금제하는 것이었으니까.
확실히 한설빙의 수련은 할 만했다.
그녀는 내공을 금제하지 않았다.
동작과 동선, 전술을 익히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체력이 힘든 상태에서는 동작과 동선, 전술을 익히기도 힘들다고 여겼기에.
허나.
하무백은 아니었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굴리면 어떻게든 된다는 주의였다.
일단 몸이 먼저 익힌 후 머리로 생각을 하는 것이 더 낫다.
급박한 상황에서 생각하고 움직이면 이미 늦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알아서 반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확률이 일 할이라도 올라가는 것이다.
그게 하무백이 오랜 세월 가지고 있는 소신이었다.
실제로 수하들을 그렇게 굴려왔고.
맹룡대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확실히 설빙이 좀 무른 면이 있어······. 이건 어쩔 수가 없군.'
알게 모르게 잔정이 많은 한설빙이다.
그런 그녀의 성향이 드러난 것.
그녀에게 무작정 맡기고 떠난 것은 하무백이었기에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제대로 굴리면 되는 일이니까.
한설빙에게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녀가 있었기에 안심하고 자리를 비울 수 있었고.
소림의 일에, 공야휘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날의 수련은 지옥이었다.
하무백 직속인 맹룡대 이 년차 칠 조 생도들마저 퍼져버릴 정도였으니.
다른 생도들은 어떠할까.
그럼에도 하무백은 담담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뭐, 아직 오늘은 많이 남았으니 수련을 더 할 사람은 자율적으로 하도록."
그 말에 얼굴이 핼쑥해지는 생도들.
마치 나는 들어가지만 너희들은 훈련을 계속하라는 말 같았으니까.
"훈련 강도는 며칠 안으로 제대로 맞춰갈 테니까."
생도들의 동공에서 거센 지진이 일어났다.
저 말의 의미는 곧 오늘은 봐줬다는 것 아닌가.
인간이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드는 차에.
하무백은 단상에서 내려가 사라졌다.
단목운뢰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후아···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교관님께서 돌아오신 것에 대한 소감은 어때?"
당진산이 잔뜩 지친 얼굴로 단목운뢰와 백리평을 바라보며 물었다.
"헉. 헉. 헉. 오랜만에 제대로 수련한 느낌?"
단목운뢰의 대답에 당진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리평은 가부좌를 틀었다.
"응? 뭐야?"
"이제 내공 금제가 풀렸으니. 운공 후에 수련해야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백리평.
당진산의 눈이 떨렸다.
여기에 있었다.
하무백이 말한 자율적인 수련을 하겠다는 인간이.
"에휴."
당진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가부좌를 튼다.
여기에서 자신만 쉬겠다며 숙소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연하민과 낙우진도 어느새 가부좌를 틀고 있었기에.
내공을 금제하고 한 방패술 수련이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힘든 것은 맞았다.
다만 자신들은 다른 맹룡대 생도들과 달랐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내공을 지니고 있었기에.
운공으로 이러한 육체의 피로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으니까.
오늘 한 것은 단체 훈련이다.
개인적인 수련은 없었기에.
결국 운공으로 체력을 회복 후 자신들의 무공을 수련하려는 것이다.
주우명과 하설란 역시 이미 운공에 들어 있었다.
어쩌겠는가.
당진산 자신 역시 수련을 해야지.
자습.
너무도 익숙한 단어였다.
***
하무백은 교관들의 숙소로 향했다.
이곳 역시 남녀의 구분은 있었다.
생도들의 숙소처럼 아예 다른 곳에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하무백은 기감으로 한설빙의 위치를 확인했다.
[잠깐 보자.]
먼 거리를 격하고 그녀의 머리에 울리는 하무백의 전음.
하무백은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극상승의 경지에 오른 전음입밀의 수법이었다.
혜광심어에 더해 먼 거리를 격하고 전음을 보내는 천리전음을 함께 펼친.
갑작스러운 하무백의 전음에도 한설빙은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 예상했으니까.
두 사람은 하무백이 늘 가던 허름한 객잔으로 향했다.
오늘도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늙은 주인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하무백이 한설빙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한설빙은 그저 입술을 삐죽였다.
"뭐, 제가 달리 방도가 있나요. 까라면 까야지."
그녀의 너스레에 하무백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운 하무백.
두 사람은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각자의 입으로 가져갔다.
"내일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먼저 잔을 내려놓은 한설빙의 말.
움찔.
하무백의 술잔이 멈줬다.
바로 식탁에 잔을 내려놓고 한설빙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궁으로요."
빙천궁을 이름이다.
"갑자기?"
"급보가 전해져서요."
그녀의 대답에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급보라 하면 보통은 나쁜 소식이거나 안 좋은 일일 경우가 많았으니까.
"궁에 변고가 있는 모양이에요."
"흐음."
하무백이 팔짱을 꼈다.
고민에 빠진 모습.
그 모습에 한설빙이 빙긋 웃었다.
왜 저러는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을 도울 방법을 궁리하는 게다.
하무백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사람을 챙기는 데에 진심인 사람.
그러나 맡은 일이 있었다.
맹룡대의 책임 교관.
관주인 팽도율이 맹룡대의 휴관기는 없을 거라 했고.
그 기간 맹룡대의 훈련을 하무백이 책임지기로 했다.
하무백이 맡기로 한 일인 것이다.
결국 자리를 비우려면 하무백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지금까지 그 역할을 하던 게 한설빙이다.
헌데 한설빙이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우는 판국에, 그녀를 돕겠다고 하무백까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자신이 팽도율에게 약조한 것을 어기게 되는 것이니까.
하무백이 인정하는 사람에게 대신 맡기는 것 정도가 용인할 수 있는 한계였다.
다른 맹룡대 교관들이 하무백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한설빙이었기에 믿은 것이다.
"변고라고 해도. 대단한 일은 아닐 거예요."
그리 말하지만.
그녀에게 귀환을 재촉할 정도면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대단한 일이라 한들. 산월마림만 할까요. 마교만 할까요."
빙긋 웃으며 말하는 한설빙.
그녀의 말대로다.
한설빙은 하무백의 곁에서 그 수라장을 모두 거치고 살아남은 무인이다.
현 강호에서 그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백아를 보내라."
백아.
한설빙만을 따르는 천리흑구를 말함이다.
그 녀석이라면 다시 한설빙을 향해 움직일 테니.
"알겠어요."
그렇게 다음 날 새벽.
한설빙은 교룡관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
새까만 비둘기 한 마리가 그런 그녀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며 따랐다.
***
교룡관의 일상은 매일 같이 반복되었다.
수련.
훈련.
수련.
훈련.
그 와중에 느긋한 인물이 있었으니.
위지군이다.
그는 오늘도 교룡관 곳곳을 비질하며 다니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져 있었다.
요즘은 빗자루에 내공을 실어서 쓸고 있으니.
위지군이 지나간 후 한동안은 정말로 먼지가 생기지 않았다.
오늘 하루의 훈련이 모두 끝난 시간.
아직 해가 길었기에 사방이 환했지만 서쪽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려 하고 있었다.
하무백이 위지군을 찾았다.
"사부님."
"오랜만이로구나."
위지군이 하무백을 반겼다.
하투제가 끝난 직후 떠났다가 돌아온 날.
하무백이 귀환 인사를 하러 찾아왔었다.
그때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기색이었으나 아무 말도 않더니.
드디어 결심이 선 듯한 모양새였다.
"그래. 무슨 일이 있더냐?"
위지군은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교룡관에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심연이라고 아십니까?"
깊은 고민 끝에 물었다.
장경각에서 마지막에 얻은 기운.
그것은 분명 무극여의심법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의 기운과 같았기에.
"······."
위지군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태초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시 던진 물음.
위지군의 빗자루가 멈췄다.
그의 시선은 제자를 향했다.
"어찌 알게 된 것이더냐?"
이번에는 위지군이 물었다.
하무백은 현황과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길의 이야기도.
장경각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도.
두 사람은 걸었다.
위지군은 빗자루를 들고 걷고 있었다.
어느새 빗자루질은 멈춘 채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위지군.
"하긴 너에게 거기까지 가르치지는 않았구나."
하무백은 성취를 얻은 후 곧바로 출도했다.
혈교와 마교를 향한 복수를 이루기 위해.
그 과정에서 더 강해졌고.
교룡관에 와서 다시 더 강해졌다.
사부를 뛰어넘을 정도로.
거기에 지금 다시 보니.
소림사에서 겪은 일 때문인가.
다시 한번 더 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뛰어넘어 이런 경지까지 이르다니. 참으로 대견하다."
사부의 칭찬에 하무백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허나."
이어진 위지군의 말.
"아직은 알 때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사부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왜입니까?"
하무백이 물었다.
그가 다급한 이유는 하나였다.
하설란.
하무백의 동생.
그녀 역시 위지군의 제자로 하무백과 같은 무공을 익혔다.
무극여의심법.
아직 경지가 낮은 그녀가 그 심연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의지를 가지고.
사람의 의지에 침습하는 존재인 것을.
하무백은 이미 이룬 경지가 있기에 스스로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심연을 받아들인 현황을 쓰러뜨린 것이 하무백이었으니까.
"란아가 걱정인 게로구나."
위지군은 그런 하무백의 염려를 읽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게다. 무극여의심법에 심연은 없으니."
위지군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하무백의 두 눈이 빛났다.
역시 사부도 심연을 알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도 심연을 만나셨습니까?"
위지군이 빙긋 웃었다.
"방금 무얼 들었느냐? 심연은 없다 하지 않았더냐."
허면 어찌 심연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의문은 늘어만 갔다.
사부의 말씀에 따르면 때가 되어 알게 될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때가 언제인지 궁금해졌다.
"때란 언제입니까?"
그래서 결국 물었다.
하무백답지 않은 모습.
그만큼 이번에 겪은 일이 하무백에게 남긴 인상은 깊고도 강렬했다.
위지군의 얼굴에 맺힌 웃음이 진해졌다.
제자의 이런 모습이 참으로 오랜만인 탓이다.
청란도에서 무공에 입문한 후의 하무백이 이러했다.
의문이 나는 것은 참지 못하고 궁구하고 궁구했다.
그래도 해결하지 못하면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게 사부를 물고 늘어졌었다.
잠시 그 시절이 떠올랐다.
하무백과 하설란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위지군에게 그 시절은 참으로 행복한 때였으니까.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처음 알게 된 때가 그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네 몸에 깃든 피 냄새가 아직은 더 빠져야 한다."
잠깐의 회상을 마친 위지군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