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놀랐느냐?
'피냄새······.'
미처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사부에게 이 이야기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기도 했다.
설란이 더 이상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은 이후로는 잊고 지내기도 했고.
사실 피냄새를 신경 쓴 것은 오랜만의 청란도 방문 때였다.
처음 귀가할 당시, 하설란은 하무백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오직 그것만을 신경 썼었는데.
설마 사문의 무공과도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다.
"설란 때문만은 아니었군요."
하무백의 말에 걸음을 옮기며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게 가장 중요했지."
입가에 빙그레 다시 웃음이 맺힌다.
이들 남매는 위지군에게 그런 존재였다.
"사실 나는 네가 그 경지에 오를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어진 위지군의 말.
대체 어떤 경지를 말씀하시는 것일까.
"작년. 네가 칠 년 만에 청란도로 돌아왔을 때 말이다. 사실은 내심 깜짝 놀랐었다."
하무백이 그때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한번 보자 하셨고.
검을 뽑아 기수식을 취했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사부는 그 모습에서 하무백 자신에게 밴 피냄새를 맡으셨다.
그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었던가.
"무극여의팔절검해. 그 마지막 오의를 펼쳐내는 데 성공했더구나."
하무백의 눈이 떨렸다.
다만 기수식이었을 뿐인데.
검법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셨었을 줄이야.
하무백 자신은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솔직히 기수식만 보아서는 검법의 경지가 어찌 되었는지 알아볼 자신은 없었다.
현재 무공의 경지는 자신이 더 높았음에도.
하무백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위지군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리 놀랄 것 없다.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아는 것뿐이니까."
하무백은 모르고 위지군은 아는 것.
과연 그것이 무엇이길래.
"무극여의팔절검해의 십이 성 대성은 무엇이더냐?"
사부의 물음.
"팔 절 무극을 완벽히 펼치는 겁니다."
하무백이 답했다.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마지막 초식의 완성. 그것이 십이 성 대성이지. 하면 네가 청란도를 떠나 출도할 때의 경지는 어느 정도였지?"
"십 성이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당시 하무백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 약관.
게다가 열세 살부터 무공 수련을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울 지경의 재능이었다.
물론 피나는 노력도 하였지만.
노력만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하무백은 당도해 있었음이니.
찬란한 재능 덕이었다.
"그랬지. 참으로 놀라웠다. 무극검문 역사에 이런 천재가 있나 싶었어. 입문한 지 고작 칠 년만에 무극여의팔절검해 팔 절을 전부 펼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다니 말이야."
위지군은 하무백이 처음 팔 절 무극을 제대로 펼쳐내는 모습을 보았던 날을 떠올리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항시 가르치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던 제자였지만, 그날은 유독 더 그러했으니.
무극여의팔절검해의 십 성은 여덟 초식을 모두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경지였다.
거기서 더 가다듬어 무극을 완벽히 펼칠 수 있게 된다면.
대성인 십이 성이 되는 것이다.
"하면 십이 성이 끝이더냐?"
하무백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시작입니다. 하나의 검을 찾아가는 시작. 사부님께서는 제가 출도할 때. 사부님의 검을 보여주셨죠."
일 절부터 팔 절까지 여덟 개의 초식.
그것을 일 검에 녹여낸 오의.
하무백에게는 마지막 오의였다.
그것을 위지군은 하무백이 떠날 때 보여주었다.
하무백은 그렇게 보고 익혔으나.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정확히는, 펼칠 수가 없었다.
"쉬이 펼칠 수 없었을 게다. 아니, 나는 사실 네가 십이 성 대성을 이룰 것이라 생각지도 않았다."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부께서는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것일까.
"무극을 완성하려면 먼저 여의를 완성해야 하지."
당연한 말이다.
"육 절까지는 몰라도. 칠 절인 여의와 팔 절인 무극은··· 피냄새가 가득한 몸과 마음으로는 절대 완성할 수 없는 초식이다."
우뚝.
사부의 말에 하무백이 멈춰 섰다.
그럴 리가.
자신은 완성했는데?
위지군도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제자를 보았다.
"놀랐느냐?"
"······."
하무백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때 내가 더 놀랐었다."
그런 기색은 일절 없었다.
그저 피냄새가 옅어졌다고, 너에게 좋은 일이라고만 하셨었다.
"여의는 피냄새를 싫어한다."
짤막한 말.
하무백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특질의 무공이라고?
무공인데 피냄새를 싫어한다라.
"여의를 완성치 않고는 무극을 완성할 수 없음인데. 피가 가득한 수라장에 너는 복수를 위해 몸을 던졌지. 해서 나는 당연히 네가 대성할 수 없다고 여겼다만."
잠시 말을 멈춘 위지군.
"너는 대성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보여준 마지막 오의까지 네 것으로 하였더구나. 일 절부터 팔 절까지의 이치를 관통하는 일 검. 그것을 펼칠 수 있게 되면 기수식에서 보이는 기도가 달라진다."
기도가 달라진다고?
하무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란을 보면 내 말을 이해할 게다. 네가 본 기수식은 너의 것과 나의 것밖에 없음이니. 너와 나의 기수식에서 다름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곧 네가 오의를 깨달았다는 의미니."
하무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조차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너는 피냄새를 싫어하는 여의의 특질마저 무시하고 무극여의팔절검해의 대성을 이루었다. 네 재능의 그릇이 그 정도로 크다는 것이지. 해서 내가 무척이나 놀랐던 것이다. 내 상상을 넘어섰기에."
하무백은 낯 뜨거움을 느꼈다.
결국 자신의 재능에 대한 칭찬으로 끝맺었음이니.
"허나. 지금 네가 궁금해하는 것은 그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무공의 특질마저 뛰어넘은 재능이라 할지라도 안 된다는 말.
"피냄새를 완전히 지워야 가능한 일이다. 허니 더욱 정진하거라. 네 경지가 더 높아진다고, 더 강해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
위지군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다시 빗자루를 내려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빗자루에 내공이 실렸다.
하무백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서.
현광에게 심마를 떨쳐낼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며 단전의 상처를 주었건만.
그것은 다른 이만의 일이 아니었다.
하무백 자신의 일이기도 했다.
그의 몸에 밴 피냄새는 다른 이의 심마와도 같은 것일지니.
"알겠습니다."
하무백이 낮게 대답했다.
그 사이 위지군은 제법 멀어져 있었다.
그런 사부의 등에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하무백이 걸음을 돌렸다.
피냄새.
넘어서야 할 화두를 받았다.
***
"교룡관으로 소식은 전했겠지?"
탁가의 가주.
탁요범의 물음.
"네. 한가에서 전서응을 급히 보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탁요범.
그의 눈빛이 사납게 일렁거렸다.
"감히. 내 아들을 그 꼴로 만들고 망신을 줘? 한설빙. 이 년이. 빙천궁이 아직도 제 년이 궁을 떠날 때와 같은 줄 알고 있는 건지······."
몹시도 짜증이 가득한 음성이다.
마치 자존심이 심히 상한 듯한.
뿐만 아니다.
그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면 궁주전의 봉쇄는 언제까지······."
수하의 말에 탁요범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한설빙. 그 계집년을 잡을 때까지다. 지금 풀어버리면 한가에서 다시 소식을 전할지도 모를 일이니."
"알겠습니다."
수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탁요범의 집무실을 나왔다.
'한설빙이라······.'
탁요범의 오른팔이자 책사인 양적산.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때가 무르익기는 했지.'
탁가의 힘은 십 년 사이 엄청나게 강성해졌다.
중원은 무림 대전으로 치열한 소모전을 펼치고 있었으나.
빙천궁은 전력의 절반 정도로 그 전쟁에 참여했다.
중원에서 신진팔문이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일을 주도한 곳이 현 궁주의 가문.
빙가(氷家).
그들의 우호 세력 중 가장 강성한 곳이.
한가(寒家).
탁가는 그 두 가문과 대척점에 있는 가문이었다.
해서 십 년 전.
중원에 무인들을 보내는 데 가장 소극적이었고.
무림대전이 끝난 후.
성세가 뒤바뀌어 있었다.
이미 탁가의 힘은 궁주 가문인 빙가를 넘어서서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약해진 빙가의 그늘을 벗어나 탁가로 전향하는 가문들도 계속해서 늘어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궁주 빙취설.
그녀는 그저 궁주의 자리에 있는 것일 뿐.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탁요범이 쥐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금만 보아도 그렇다.
탁가가 궁주전을 봉쇄하고 있지 않은가.
한설빙을 빙천궁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탁요범의 아들이 교룡관에서 당한 치욕과 망신을 되갚아 주겠다는 명분이지만.
'핑계지. 수많은 서자 중 하나인 탁무전을 위하면 얼마나 위한다고······.'
북해는 춥고 거친 척박한 땅이다.
사람이 살기 힘들고도 힘든 땅.
그런 만큼 사람이 귀했고, 사람이 힘이었다.
남자는 더더욱 귀한 곳.
사냥을 하든, 농사를 짓든.
거칠고 척박한 대지에 내던져지는 것은 보통은 남자들이다.
가혹한 환경에서 힘겹게 일해야 하다보니 자연히 남자들이 귀해질 수밖에 없었다.
죽거나 다치는 이들이 많았으니.
그랬기에 정실뿐 아니라 첩을 들이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땅이다.
수많은 첩을 들여 수많은 자손을 생산하는 것.
그것이 곧 힘인 대지, 북해.
탁가는 그중에서도 자손을 늘리는 것에 가장 힘쓴 가문이었다.
가주인 탁요범에게 수많은 첩이 있고, 더 많은 자식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많은 첩의 자식 중 하나를 이번에 교룡관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것도 수발들 고아 새끼 하나를 붙여서.
헌데 어떤 꼴로 돌아왔던가.
그 하찮은 고아 새끼와 비슷한 처지의 놈들, 이 다섯에게 당하고 돌아왔단다.
그것도 후반기에는 맹룡대의 다른 놈들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빙천궁 탁가 가주의 아들이 맹룡대 허접쓰레기들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니.
처음에 탁요범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분노를 토했다.
비천한 그놈들에게.
그놈들에게 힘을 보탠 이들에게.
그리고 그런 놈들에게 당한 못난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 내기에 한설빙 역시 연관되었다는 소리에 표정이 급변했다.
그리고 양적산을 불러 이 일을 어찌 이용할까 논의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일을 핑계로 한가를 무너뜨리고, 그 기세를 몰아 빙가 역시 무너뜨린다. 이제 빙천궁의 궁주는 탁가의 것이야.'
당시 탁요범의 말이었다.
힘이 넘쳐흐를 만큼 있었으나, 명분이 없었다.
정말 작은 꼬투리 하나만 있어도 되는데.
그것을 탁무전이 교룡관에 가서 만들어 온 것이다.
개똥도 쓸 데가 있다더니.
설마 이런 식으로 명분을 얻게 될 줄은 양적산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
"설빙은?"
"출발하였다고 급보로 연락이 왔습니다."
한가의 가주.
한고적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었다.
"탁가의 움직임은 여전히 없는가?"
이어진 한고적의 물음에.
한가의 총관인 나홍련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대답을 확인한 한고적의 얼굴은 더욱 침중하게 굳었다.
"의도는?"
"빙천궁을 집어삼키려는 심산이겠지요."
"그렇지.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그딴 일로······."
빙천궁도 아닌 교룡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것도 한가에서 알아본 바에 따르면 공정히 규칙대로 진행되었고, 거기에서 탁무전이 패한 것이다.
헌데.
그 패배의 원인에 한설빙을 이용한 한가의 암수가 있었다며.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전력의 절반을 포기하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으니.
그리고 탁가에서 보인 움직임이 궁주전의 봉쇄다.
한가와의 시비에 애꿎은 궁주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한가의 입장에서는 사죄까지는 몰라도 전력의 절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야말로 목숨줄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니.
탁가의 의도는 알았으나, 그 의도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탁가와의 전면전.
언제 터질지 모를 일이었기에.
한고적으로서는 급보로 한설빙을 가문으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한가의 전력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무척이나 컸기에.
"참. 설빙의 부탁은 어찌 되었는가?"
한고적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나홍련이 쓴웃음을 지었다.
"궁주님께 보고를 올려 시도는 했습니다만, 탁가의 반대에 막혀······."
한고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터다.
그녀의 강력한 요청에 일단 시도는 했으나, 역시나 막혔다.
고아들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빙천궁에서 당연히 해왔던 일이다.
탁가 놈들이 지금처럼 바꾸기 전에는 말이다.
사람 하나가 귀한 북해에서 저런 짓거리라니.
"다만, 그 아이의 여동생은 일단 궁주전의 청소일을 하도록 조치를 해두었습니다."
한설빙의 강력한 요청의 근저에는 그 사연이 담겨 있었기에.
탁무전이 궁에 귀환했을 때.
혹여나 임대치의 동생들에게 해코지를 할까 걱정이 되었기에.
거기에 대한 것만이라도 나홍련이 손을 쓴 것이다.
"그 정도가 한계인가 보군······."
한고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