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애초에 저 얼굴을 잘못 봤을 리가 없으니까.
“채린 씨가 왜 여기에?”
“보다시피요.”
시우의 시선이 한채린을 훑었다.
예쁜 외모와 유려한 몸매.
그리고 분홍색의 환자복.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한채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한채린의 모습에 시우는 어째서인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전에 한 번 마주한 것만 같은 상황.
“병원장님께 따로 부탁을 하셨고요.”
“네.”
“이렇게 저와 같은 병실을 사용하는 복잡한 사정도 있는 거고요.”
“네. 혹시 불편하신가요?”
그럼 너 같으면 안 불편하겠니?
시우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꾹, 눌러삼켰다.
예쁜 여자와 같이 있는 걸 싫어할 남자가 누가 있겠냐마는…?
아니, 아니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였다.
남녀가 유별하여 7살이 되면 같은 자리에도 앉지 말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지금….
‘......에라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공자 채널의 영상을 봐서 그런가.
어째, 점점 선비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어떻게 된 건지 묻지 않으세요?”
“던전이 붕괴되었고. 기절한 저를 채린 씨가 데려왔고. 이런저런 치료를 통해 지금 깨어났다. 아닙니까?”
한채린은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뭐라 할 말이 없는 표정.
아무래도 딱 맞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그래서인지 시우의 물음에도 한채린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엔 감정이라고는 엿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사족을 다 자르다 못해 몸통 마저 도려내 버린 대화의 흐름 때문인 걸까.
시우는 한채린이 조금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딱딱 용건만 하는 대화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그런 의문이 들던 찰나.
“일단 시우 씨 말씀대로 던전은 붕괴되었어요.”
한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로써 던전은 클리어되었고요.”
“다행이네요.”
시우는 작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드는 의문에 한채린에게 물었다.
“펜리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흑색 늑대를 말씀하시는 거면… 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에 어디론가 떠나가는 건 보긴 했는데….”
보아하니 한채린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결국 펜리르를 가둬 둔 결계, 던전은 붕괴되었으니까.
해서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걸 봤다는 한채린의 말.
펜리르는 아마 신계로 잘 돌아갔을 터였다.
시우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시우의 모습 때문일까.
시우를 바라보는 한채린의 눈빛이 상당히 미묘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채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던전에서 있었던 일은 밝히지 않았어요. 팀원들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고요. 해서 저희 팀원이 던전을 공략한 것으로 발표가 되었는데….”
그러면서 한채린이 시우를 바라봤다.
“시우 씨가 원하신다면 사실을 정정할 생각이에요.”
“제가 공략한 것으로 정정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네.”
한채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한채린의 모습에 시우는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그냥 채린 씨가 공략한 것으로 하시죠.”
“......”
그러자 한채린이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시우가 그런 답을 할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잠깐의 침묵.
한채린이 입을 열었다.
“혹시 힘을 숨기는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힘을 숨겨요? 누가요? 제가요?”
시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한채린도 똑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한채린의 모습에 시우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말했다.
“아뇨. 전혀요. 그랬다면 제가 유투브 채널을 운영하겠습니까?”
“......”
한채린이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생각해보면 그러했으니까.
“애초에 숨기고 있는 힘도 없습니다만?”
“그게 무슨…?”
“저 그 힘 쓰고 죽을 뻔한 거 직접 보셨잖습니까. 채린 씨가 안 챙겨줬으면 저 거기서 죽었을 겁니다. 힘을 숨기고 있었으면 그 꼴이 되었겠습니까? 저 진짜 죽을 힘을 다한 겁니다만.”
“......”
역시나 한채린은 또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또한 생각해보면 그러했으니까.
“그리고 힘을 숨기려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그럼 왜…?”
“채린 씨와의 계약이 그러했으니까요.”
“계약이요? 아.”
순간 멍해지는 한채린의 표정.
시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냥 채린 씨가 공략한 것으로 하시죠. 무엇보다 지금은 SH그룹의 힘으로 S-등급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사실이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한채린은 쉬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의심인 것 같았다.
S-등급을 클리어할 실력이 안 되는데 그렇게 공표해도 되는 걸까. 하는 그런 의심.
시우는 그런 한채린에게 말했다.
“이번 던전이 특수했던 것일 뿐. 채린 씨는 충분히 S-등급 던전을 레이드 할 능력이 되십니다.”
“위로해 주시는 건가요?”
“아뇨.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만.”
한채린이 시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우 또한 그런 한채린을 마주 바라봤다.
그러다 피식.
“고마워요.”
한채린이 웃어 보였다?
“어….”
시우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얼음 덩어리 같은 여자도 웃을 줄 알았나?
아니,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걸까?
한채린과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예쁘네.’
웃는 모습이 참으로 예뻤다.
평소 청순함과 대비되는 차가운 분위기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저 얼굴엔 화사한 미소가 가장 잘 어울렸다.
뭐, 그건 그렇고.
“하실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십니까?”
“아뇨.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그와 동시에 한채린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하더니, 한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활동하실 생각 없으세요?”
* * *
달칵.
병실을 나온 채린은 곧바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
물론 ‘저 나갈게요.’ 한마디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퇴원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정문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채린의 비서, 김민재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타시죠.”
“고마워요.”
채린은 뒷좌석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이윽고 운전석에 자리한 김민재가 물어 왔다.
“어디로 모실까요.”
“할아버지께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세단이 부드러운 엔진음을 내며 움직였다.
휙휙, 스쳐지나가는 도심의 풍경.
채린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이번 레이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회장님께서도 굉장히 기뻐하고 계십니다.”
들려오는 민재의 말에도 채린은 창 밖의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다행이네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괜시리 차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하지만 민재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채린의 비서로서 채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누가 본다면 채린이 차갑게 대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민재는 채린이 단지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채린이 생각하는 무언가.
정확히는 채린이 생각하는 누군가.
“시우 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아니나 다를까 채린이 반응을 보였다.
백미러로 슬쩍, 보자 채린이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채린이 남자 생각을 하며 놀라 보이다니.
민재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번에도 차이셨습니까?”
“......네.”
그러자 채린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채린의 모습에 민재는 다시 한번 작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음엔 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시우 님이 뭐라고 하시면서 차셨습니까?”
“그게….”
채린이 살짝, 고민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고로 군자란, 사람들과 어울리되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예?”
민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군자라니?
설마 유교에서 말하는 그 군자?
아니, 저게 뭔…?
“반대로 소인은 패거리를 짓되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
민재는 채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니까… 시우 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까?”
“네. 그러니 동료나 팀원보다는 이렇게 가끔가다 일이나 같이하는 정도가 좋다고 했어요.”
“......”
민재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 민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의미로 혹시 검술을 배워 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시던데요.”
“검술이요? 아니, 잠깐. 그 말씀은… 시우 님이 아가씨께 검술을 가르쳐준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채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재는 이걸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라.
채린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검재[劍材](S)와 육감[六感](S).
둘 모두 S등급으로 각성한 희대의 천재였다.
S+급을 바라보는 세계적인 인재였다.
물론 채린은 현재 마땅한 검술을 배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채린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도 맞았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우가 특출난 능력이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채린을 가르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또한 검술이라는 건 쉬이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상급의 검술은 쉬이 얻을 수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채린이 상급의 검술을 배우지 못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옆에서 봐 왔지 않은가.
시우가 그런 상급의 검술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채린의 자존심을 긁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그래서 한 번 배워 보겠다고 했어요.”
“예에에에에?!?”
“앞을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빠아아아앙!
끼이이이익!
-야이 새끼야! 운전 똑바로 안 해?!
창문 밖으로 화가 잔뜩 난 운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민재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그럼 지금 회장님을 만나러 가는 이유가…?”
“수강료가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
턱 하니 막혀버린 말문.
내가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 채린과 시우.
둘이서 대체 무슨 대화를 한 걸까.
-너 이 새끼 당장 내려! 내 확, 그냥!
민재는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한채린이 떠나가고 난 병원 특실.
시우는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미친….”
정확히는 어이가 출타했다고 표현함이 바람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우가 바라보는 스마트폰 화면.
그러니까 갓튜브의 스마트폰 화면 위로 보이는 개성의 숙련도.
<통찰력(S+) 숙련도 36.5%[+11.7%]>
<괴력[怪力](SS) 숙련도 18.98%[+13.1%]>
<헤라클레스 신투술[神鬪術](SSS) 숙련도 9.38%[+9.3%]>
<군자심[君子心] - 인의예지[仁義禮知](SSS) 숙련도 3.61%[+3.1%]>
“미친!”
숙련도가 그야말로 미쳐있었다.
초월자의 채널을 구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