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시우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한민아의 말.
채린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물끄러미 한민아를 바라봤다.
그런 채린의 모습 때문일까.
‘시우라는 이름에 저렇게 반응을 보이다니.’
평소 얼음장 같은 분위기의 채린이었다.
그런데 남자 이름에 저리 반응을 보인다?
한민아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채린이, 너는 시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시우 씨를요?”
“그래.”
한민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던 시우와 채린.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민아의 오해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
하긴, 채린이가 남자랑 사귄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이상 불가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착각했구나, 넘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한민아는 못내 아쉬웠다.
솔직히 채린이 시우와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한민아의 입장이었다.
당사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혹시 채린이가 시우에게 마음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지금 한민아의 생각은 주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민아는 확인하고 싶었다.
시우에 대한 채린의 진심.
적어도 호감이 있기는 한 걸까.
만일 그러하다면 한민아는 적극적으로 도와 줄 요량이었다.
한민아는 채린의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채린은 쉬이 답을 해 오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는 고민.
이윽고 채린이 답을 해 왔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사람….”
한민아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왜인지 김새는 답이었으니까.
“단지 그뿐이니?”
“강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해요.”
하아….
한민아는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런 거 말고 다른 생각은 없어?”
“어떤 생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루 종일 시우만 생각난다거나. 시우만 보면 가슴이 떨린다거나. 안 보이면 보고 싶다거나.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다거나. 그러한 생각 말이야.”
한민아의 물음에 채린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
“하루 종일 시우 씨를 생각하고 있기는 해요.”
눈이 번쩍 뜨이는 답변이 들려왔다.
“정말이니?”
“네.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매일 시우 씨와 대련하거든요. 매번… 지기는 하지만요.”
그러면서 채린은 약간 분하다는 기색을 드러내었다.
감정 하나 내보이지 않던 채린에게 정말 드문 감정의 표현이었다.
“......”
그러나 한민아에게는 딱히 유의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얘를 진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니 시우가 채린이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지.’
여신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미인이면 뭐 하는가.
정작 여자로서의 매력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여자라면 조금은 응석도 부리고.
애교 같은 것도 떨고.
일부러 연약한 척하면서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우 같은 면도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채린은 그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시우 씨를 떠올리기도 해요.”
감정 표현이 서툴다 못해 없는 아이.
한민아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채린이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한 심정이었다.
결국.
시우와 채린은 사귀고 있지 않았다.
더하여 채린은 시우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
아니, 감정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또한 일종의 호감과도 같은 감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아니었다.
사랑의 감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진짜 오해였구나….’
한민아는 굉장히 아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시우만 한 남자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얼굴은 그 정도면 괜찮지.
능력은 두말할 것도 없지.
실력은 장 웨이와의 비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S급 헌터 정도는 가볍게 넘어설 터.
게다가 장 웨이가 태사조의 후예라며 극진히 모시는 이였다.
인성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건 시우의 여동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픈 여동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온 오빠.
내 사람, 내 여자에게는 한없이 헌신적인 남자.
무엇보다 지난 번, 납골당에서의 일을 보라.
시우만 한 최고의 남자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냥 내가 잡아채 가?’
농담이라도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마냥 농담이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그 정도로 시우는 괜찮은 남자였다.
그래서일까.
“채린아, 세상에 반은 남자라지만 괜찮은 남자는 그렇게 많지 않아.”
한민아는 살짝, 오지랖을 부려 보기로 했다.
“그러니 이 남자다, 라는 생각이 들면 확실히 잡아 두어야 할 때도 있어.”
물론 채린은 시우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언제든 변할 수 있었다.
특히나 사랑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들 하지 않은가.
비록 채린은 일반적인 여자와 경우가 달랐다.
그래도 여자는 여자다.
조금 차갑고, 애교 없고.
귀여운 구석이 1도 없는 여자였지만….
여자가 맞긴 할까 싶지만!
그래도 한민아에겐 사랑스러운 조카였다.
그런 조카가 처음으로 호감을 가진 남자였다.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호감이라는 감정을 가진 남자다.
실로 긍정적인 신호.
아직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행여 그런 남자가 나타나거든. 확실히 내 남자로 만드는 방법을 이 고모가 알려 줄게.”
한민아는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채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 경험이 없는 조카를 위해 이 고모가 특별히 전수해 주는 비법이란다.”
다름 아닌 저 한민아의 말.
한민아도 남자 경험이 없는 건 매한가지 아니었나?
채린이 알기로는… 그러했다.
한민아는 남자 한 명 사귀어 보지 못했다.
워낙에 바쁜 영향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혼사가 들어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장 한민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민아는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예뻤다.
거기에 SH그룹의 이사진이라는 배경.
일등 신붓감이란, 한민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당연하게도 한민아를 향한 구애는 수두룩했다.
그런데 한민아가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잘 알지 못했다.
진정한 사랑 어쩌고 하는 말만이 기억 날 뿐이었다.
다행히 할아버지, 한태산은 그런 한민아에게 결혼을 강제하지 않았다.
오로지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한 한민아.
한태산은 그런 한민아에게 정략결혼을 강제하지 않았다.
어쨌든.
채린이 알기로 한민아 또한 남자 경험이 없었다.
남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것이 한민아였다.
그런데 지금.
“책임을 지게 하면 돼.”
“책임이요?”
그러자 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임을 지게 하다니?
“어떤 책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채린은 한민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민아가 묘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보다 정확히는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채린을 바라봤다.
“어떤 책임이긴. 바로 채린이, 너를 책임지게 하는 거지.”
“저를요?”
채린은 한민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채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니 언제든 말만 하렴. 이 고모가 SH호텔을 전체를 싹, 비워 둘 테니까. 대신 확실히 책임지게 해야 한다? 그러니까 다른 여자는 생각도 안 나게 아주 꽉….”
한민아는 저 혼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띠링!
채린의 스마트폰에서 알림음이 들려왔다.
확인한 스마트폰 화면에는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창이 떠 있었다.
채린은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한민아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응? 누구길래 갑자기 그래?”
한민아가 약간 서운한 표정으로 말해 왔다.
“이 고모를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시우 씨요. 시우 씨가 잠시 보자네요.”
“어머. 그래?”
그러자 한민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그럼 어서 가 봐야지. 뭐 하고 있어? 얼른 안 일어나고.”
되려 채린을 내쫓듯 독촉하는 한민아였다.
그렇게 채린은 쫓겨나듯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채린아 내가 방금 한 말 기억하지? 책임을 지게 하는 것! 알았지 채린아? 확실히 너를 책임지게 해야 한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
“......”
채린은 굳게 닫힌 집무실의 문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SH헌터 길드 사옥 앞.
“타시죠, 아가씨.”
채린의 개인 비서, 김민재가 차의 뒷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채린은 작게 감사를 전하고는 뒷좌석에 자리했다.
이윽고 운전석에 자리한 김민재가 물어 왔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씨 공방으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김민재의 답과 함께 세단이 부드러운 엔진음을 내며 움직였다.
채린은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휙휙, 스쳐 가는 도심의 풍경.
채린은 도심의 풍경을 눈으로 담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름 아닌 한민아가 말한 책임을 지게 하는 방법.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 걸까.
바로 그때.
“외람된 말씀이오나, 아가씨.”
운전석의 김민재가 문득 말을 걸어 왔다.
“한민아 이사님이 말씀하신 방법은 확실한 방법이긴 합니다.”
채린은 시선을 돌려 김민재를 바라봤다.
혹시 김민재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걸까.
“그런데 자칫 역효과가 날 우려도 있습니다. 특히나 시우 님 같은 유교 보이라면 더더욱 역효과가 날 겁니다.”
“역효과요?”
“그렇습니다.”
김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먼저 시우 님의 마음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제가 시우 님의 마음을 열 멋진 멘트를 몇 개 알려드릴 테니, 요긴하게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더니 큼큼.
김민재가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시우 님을 만나시면 이렇게 한 번 물어보시죠. 혹시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 그러면 시우 님이 O형이든 A형이든 뭐든. 답을 하실 겁니다. 그럼 아가씨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김민재는 잠깐의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시우 님의 혈액형이 인형이실 줄 알았는데.”
그와 동시에 김민재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본인 스스로의 위트에 참을 수 없다는 걸까.
김민재의 표정 또한 뿌듯함으로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또 하나 알려드리자면, ‘시우 님은 정말 거품이 아닐까 싶네요.’라고 말씀해 보세요. 그리고 이번엔 기다리지 말고 바로 치고 나가셔야 합니다.”
김민재는 그렇게 치고 나가는 시범을 보인다는 듯.
채린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곧장 입을 열었다.
“언빌리버블.”
씰룩거리던 김민재의 입가가 좌우로 꿈틀거렸다.
도저히 자신의 센스를 참을 수 없다는 걸까.
김민재의 표정은 이제 황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시우 님의 평점을 내리자면 4.9점이라 할 수 있어요. 시우 님께는 오점이 없기 때문이죠.”
그 이후로 방언이 터진 것처럼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김민재의 말에 채린은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앞서 한민아도 그렇고.
지금 김민재도 그렇고.
“이제 슬슬 어느 정도 넘어왔다 싶을 때 필살기 멘트를 쓰시면 됩니다. 어떻게 된 게 시우 님을 볼 때마다 비가 오는 거 있죠. 심.장.마.비.”
도무지 뭐라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 * *
어느덧 도착한 서씨 공방.
딸랑.
공방의 문을 열자 경쾌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공방 내부.
“채린 씨… 오셨어요?”
공방 안쪽에서 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딘가 거칠어져 있는 목소리.
채린은 걸음을 옮겨 시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악…! 하악…!”
아니나 다를까 시우가 공방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흘러내린 식은땀이 온몸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어디 안 좋으신 건가요?”
“아, 아뇨. 그냥… 하아…! 힘이 좀… 빠진 것 뿐입니다.”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꾸역꾸역, 자리에 앉았다.
대체 뭘 했길래 저렇게 땀을 흘린 걸까.
채린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바쁘실 텐데 갑자기 불러낸 것도 죄송한데, 이런 꼴을 보여서 참….”
“아니에요. 마침 계약 건도 다 끝난 참이라 한가하던 차였어요.”
채린은 살며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보다 어쩐 일로 저를?”
그리고는 곧장 시우에게 용건을 물었다.
“아, 그게 다름이 아니라….”
그러자 시우가 굉장히 난처한 표정으로 말해 왔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채린은 그런 시우를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우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진행한 마오타오와의 계약 말입니다. 정확히는 제가 받을 수수료…요.”
시우는 채린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던 찰나.
“혹시 가능하다면 가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채린의 일순간 고개가 좌로 기울어졌다.
가불?
미리 돈을 당겨서 달라는 뜻의 그 가불?
“가불이요?”
“...네.”
시우는 여전히 채린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채린은 가불의 또 다른 의미를 떠올렸다.
그러나 떠오르는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 말씀은 미리 수익을 당겨서 받을 수 있냐는 말씀이신가요?”
“전부는 안 되더라도 조금만이라도요.”
하하하….
시우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얼마 정도가 필요하신데요?”
“한….”
잠깐의 시간이 지나.
“1,200억 정도요?”
“......”
채린은 이번에도 이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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