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백선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경이로운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던 찰나.
“자네, 정말 가더가 될 생각이 없나?”
백선제가 뜬금없이 스카웃 제안을 해 왔다.
지난 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원한다면 부국장 자리를 줄 수도 있네만.”
뜬금없음을 넘어 급발진을 해 오는 백선제였다.
대체 뭘 보고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부국장이면 연봉이 어느 정도 됩니까?”
“대략 10억 정도 될 걸세.”
10억.
많다면 많을 수 있지만 사실 적은 금액이었다.
시찰국의 부국장이면 최소 S급은 되어야 할 터.
S급이면 레이드로 벌어들이는 연봉이 최소 100억이다.
최소치만 따져도 무려 10배 차이.
“죄송하지만 연봉이 너무 적습니다.”
“연봉이 얼마 정도면 할 생각이 있는가?
시우는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최소 5,400억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레이드 관련 수익은 제쳐 두고 당장 한채린에게 받는 수수료가 연간 5,400억이었다.
가더가 된다면 이 돈을 포기해야만 했다.
가더는 곧 국가 공무원.
공직자로서 불법 청탁과도 같은 수수료를 받을 수가 없었으니까.
“......”
백선제는 아무런 답을 해 보이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한 50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기사, 5,400억은 너무 많긴 했다.
아무리 시찰국이 정부 기관이라고 하지만 개인에게 5,400억을 줄 수가 없었다.
되려 정부 기관이기에 줄 수가 없었다.
국민들의 혈세로 이루어진 예산을 함부로 쓸 수는 없었으니까.
“아쉽게 되었군.”
백선제는 결국 스카웃을 포기했다.
그리고 잠시.
“자네의 추측은 모두 사실이네. 그러나 약간의 사실을 정정할 필요는 있겠군.”
백선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 아버지께서는 동료분들과 뜻을 합치어 인류를 위해 싸우셨네.”
13인의 영웅.
“세상의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하셨고, 끝내 마왕의 베어 내 인류를 구원하셨지.”
“그 말씀은…?”
“영웅분들께서 마왕의 목을 베어 낸 건 사실이네. 인류를 위협했던 악마들 또한 모두 영웅분들의 손에 의해 처단된 것도 전부 사실이고.”
시우는 잠시 백선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달라진 이야기가 없었으니까.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가 진실이고 곧 사실이란 뜻이지 않은가.
악마들은 13인의 영웅에 의해 죽었다.
그렇다면 부활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나 ‘모든’ 악마들이 처단된 것은 아니었지.”
백선제는 차분히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네. 또한 아버지께 들은 것이 아니야. 지금은 돌아가신
루도레아 성녀님께 들은 이야기네.”
성녀(聖女), 루도레아.
지금은 명을 다해 한 줌의 흙이 된 13인의 영웅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백선제가 루도레아에게 들은 이야기.
“마왕은 최강의 악마도, 마지막 악마도 아니었다.”
시우는 백선제의 말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다른 악마가 있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아버지는 부정하시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백선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시우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백선제의 말에 따르면….
과거, 마왕과 악마들이 모두 죽은 것이 맞았다.
그러나 악마 전체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마족(魔族)이라 불리는 악마들이 멸족된 것은 아니란 뜻이었다.
마왕은 최강의 악마도, 마지막 악마도 아니었다.
이 말은 즉.
“또 다른 마왕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어쩌면 과거의 마왕을 넘어서는 존재.
진정한 마왕이 있을 수 있다는 뜻과 다름 없었다.
“글쎄, 거기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네.”
백선제는 살며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실 악마 부활도 그렇게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네. 저런 말씀을 하신 건 13명의 영웅분들 중 루도레아 성녀님 말고는 없었으니 말이네. 무엇보다 그 이후로 악마의 자취는 한 번도 보고되지 않았고.”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마따나 엄청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일인 것도 마찬가지라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하여 지금.
“그럼 저를 만나고자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우는 다시 백선제에게 물었고.
백선제는 잠깐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판데모니움은 악마 부활과 관련하여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네. 그리고 우리 시찰국은 그 계획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있지. 하지만….”
백선제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
“현재로서 그 계획을 막을 방도가 없네. 일단 판데모니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네.”
백선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정적.
백선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계획이 실행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도 없네.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 행동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무엇보다… 그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해가 속출될지 전혀 알 수가 없네. 해서….”
백선제는 다시 시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네.”
“제 도움이라면 어떤…?”
“외람된 말이지만, 현재 자네는 판데모니움의 표적이 되어 있는 상황이네.”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지 않은 사실이었으니까.
서울 지역의 판데모니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경고를 함은 물론.
경기 지역의 판데모니움을 완전히 발본색원했다.
더하여 대놓고 유투브에 저격 영상까지 올리지 않았는가.
당연하게도 판데모니움이 시우를 가만 두고 볼 리가 만무했다.
“판데모니움은 자네를 처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시우는 이 역시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시우는 백선제가 말하는 도움이 무엇인지 또한 알 수가 있었다.
“저보고 미끼가 되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판데모니움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염치없지만, 그렇다네.”
백선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시우가 미끼가 된다면 판데모니움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로써 이쪽도 주도권을 얻을 수 있었다.
판이 짜이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판을 먼저 짜고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판데모니움이 저라는 미끼를 물 거란 확신이 있습니까?”
어디까지나 미끼를 물었을 때의 경우였다.
백선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판데모니움은 현재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과연 판데모니움이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까?
시우라는 미끼를 물까?
아마 무시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당연히 백선제라고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터.
“시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해 봐야 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백선제는 행동할 뿐이었다.
시민들을 보호하는 시찰국의 가더.
백선제는 그런 가더들의 최정점에 서 있는 이였다.
“물론 자네를 미끼로 던지면서 할 말은 아니네만… 정말 면목이 없네.”
백선제는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시찰국의 가더로서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는 커녕 도움을 바라는 상황.
백선제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시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여러모로 시우가 나설 이유는 없었다.
미끼가 되는 위험을 뭐 하러 감수한단 말인가.
시우는 가더가 아닌 헌터다.
돈이라도 많이 준다면 모를까.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시우는 입을 열었다.
“계획은 있으신 겁니까?”
“그 말은… 미끼가 되어 주겠다는 뜻인가?”
백선제는 놀라 물었고.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째서…?”
백선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염치없지만, 자네에게 많은 돈을 줄 수가 없네.”
“아뇨.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대체 왜…?”
“부탁을 하신 건 국장님이십니다만?”
“그건 그렇네만… 자네가 이렇게 선뜻 응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네.”
백선제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사실 시우도 잘 알지 못했다.
얼마 전, 한채린의 물음이 생각나는 건 무얼까.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냐는 한채린의 물음.
백선제의 물음 또한 한채린의 물음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그렇기에 시우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군자는 언제나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한다.]
여민동락(與民同樂).
언젠가, 공자께서 말씀하신 바였다.
참으로 씹선비… 아니.
고상한 선비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저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받는 것을 가만 보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아니, 이것도 아니었다.
“제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서요.”
그냥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
백선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한 눈으로 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오주원.”
백선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자네와도 꽤 깊은 인연이 있는 이름이네만.”
“오주원….”
시우는 그 이름을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었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만.”
그러나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정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한국의 판데모니움을 총괄하는 자이네.”
“아.”
시우는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계획의 핵심은 자네가 오주원을 끌어내는 것에 있네.”
* * *
서울 외곽에 위치한 호텔.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오주원이 묻자 수하가 한 발 나서며 답했다.
그런 수하의 답에 오주원은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상황이 괜찮게 흘러가는군.”
앞선 실패는 너무나도 뼈아팠다.
와해 직전의 교단 상황.
경기 지역 판데모니움의 완전 붕괴.
그러나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흔한 일이라고 하던가.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가장 큰 싸움에서는 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에서 질지언정.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법.
“제물의 존재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어.”
오주원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제물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계획의 핵심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동시에.
“SH그룹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라….”
예상치 못한 조력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러면 활동하기가 정말로 편해졌다.
이 말은 즉.
대한민국 정부를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뜻과 다름 없었으니까.
“아주 좋아.”
상황이 정말로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앞선 실패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되려 앞선 실패가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의 길흉은 점칠 수 없는 법이라 하더니.
이로써.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계획은 완성되었고 이제 실행만이 남아 있었다.
다만 우려되는 건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
그 중 오주원이 경계하는 변수는 총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백선제….”
시찰국장, 백선제.
백선제는 오주원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다.
교단의 간부 조북천에게서 정보를 얻어 냈을 테니까.
사실 금제가 걸려 있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태범의 상황을 미루어 보면 백선제는 금제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믿기지는 않았다.
금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금제를 풀었다고 한들.
백선제가 오주원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변수란,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서 나오는 법.
지금은 백선제가 판데모니움의 계획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이면 그에 따른 대비를 하고 있을 터.
“올가미는 완성했나?”
“차질 없이 준비했습니다.”
오주원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선제를 잡기 위한 계획.
일명 올가미.
이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된다면….
“오랜 악연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군.”
백선제는 반드시 죽는다.
오주원의 두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백선제에게서 특이한 행동은 없었나?”
“그것이… 백선제가 갑자기 제주도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검선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주원의 몸이 순간 멈칫, 거렸다.
검선(劍仙), 백선평.
오주원이 경계하는 두 번째 변수.
그리고 가장 위협적인 변수라 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은 한국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계획이다.
일이 시작되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백선평에게 이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
“행여 검선이 나서게 된다면….”
그러면 방법이 없었다.
13인의 영웅이란 그러한 존재다.
하늘 위의 하늘.
진정한 천외천(天外天).
검선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강자다.
백선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검선은 오주원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
하지만.
“검선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오주원은 개의치 않았다.
검선(劍仙)의 존재가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검선(劍仙)은 나서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검선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에 알려진 13인의 영웅, 검선(劍仙)은 더 이상 없다.
그렇기에 검선(劍仙)은 변수이되 변수가 아니다.
따라서 마지막 세 번째.
오주원이 경계하는 변수는 오직 이 세 번째였다.
“맹시우….”
오주원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 이름.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계획에 있어 가장 큰 변수는 맹시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맹시우는 고작해야 한 명의 헌터.
헌터 한 명 따위로는 이 계획의 판도는 바뀌지 않는다.
이 거대한 흐름은 고작 한 명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어처구니없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맹시우….”
오주원은 맹시우를 백선평보다 더한 변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변수, 백선제는 오주원이 통제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변수, 검선(劍仙) 백선평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예측은 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오주원이 짜 놓은 판 위에 올려놓을 수가 있었다.
헌데, 맹시우는 아니었다.
통제와 예측.
그 어느 쪽도 할 수가 없었다.
“......”
오주원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무시하면 그만이긴 했다.
맹시우가 거슬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거슬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계획에 큰 차질을 빚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맹시우라는 변수를 차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다.
통제도 불가하고 예측도 되지 않는 변수.
맹시우를 처리할 방법이 없─.
“저… 지부장님.”
그 순간 수하가 오주원의 생각을 끊어 왔다.
약간의 짜증이 일며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름이 아니라 헌터 관리국의 내부자로부터 알아낸 내용입니다만….”
수하가 눈치를 보며 뜸을 들였다.
그리고 곧 이어진 수하의 말.
“한채린과 더불어 맹시우의 S급 승격 심사가 논의 중에 있다고 합니다.”
오주원의 두 눈이, 번뜩였다.
초월자의 채널을 구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