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그, 그게 무슨….”
한민아는 이민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선제는 시찰국장이다.
그런 백선제가 위기에 빠져 있다.
그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이민정은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지금 바깥 상황이 급박하기 때문인 걸까?
백선제를 도울 여력이 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이해는 되었다.
그런데 지금.
“국장님께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을 돕지 말라, 그리 지시하셨습니다.”
한민아는 이민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이민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선제가 돕지 말라고 지시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국장님이 돕지 말라고 했다니요…?”
그러나 이민정은 침묵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콰콰콰콰콰콰─!
사옥 안쪽에서 끔찍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한민아는 마력의 힘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백선제와 오주원.
저 힘이 둘 중 누구의 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민정은 아니었다.
이민정은 이 불길한 기운이 누구의 힘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민정이 재촉하며 말해 왔다.
한민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국장님은요. 아무리 국장님이라도 저 안에 있는 남자는 국장님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국장님은 모든 걸 알고 계셨습니다!”
이민정이 화를 내듯 버럭, 소리쳤다.
분노에 가까운 외침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건 한민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민정, 본인 스스로를 향한 감정이었다.
“국장님은 판데모니움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민정은 아랫입술을 까득, 깨물고 있었다.
피가 배어 나오고 있음에도 이민정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이민정의 표정엔 갖가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오주원이 맹시우 헌터님을 따라가지 않을 것도. 이곳에서…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무력함.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민정은 한민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 * *
사방을 잠식하는 무수한 마법진.
어림잡아도 대략 수천 개의 마법진이 주위로 새겨져 있었다.
“증폭 마법진이라….”
백선제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대상의 마력을 크게 증폭시키는 증폭 마법진.
이 수천의 증폭 마법진 모두가 오주원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증폭 마법진은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특정 장소에 국한하여 오랜 기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 준비 또한 상당히 눈에 띄는 일이었다.
서울 중심부에서 대놓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현상 수배가 걸린 판데모니움의 범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
“조력자가 있었나?”
오주원을 도운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이곳은 SH그룹의 사옥.
그 조력자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여, 지금 이 상황이 시사하는 바는 하나.
“처음부터 나를 없애기 위한 함정이었나?”
오주원은 처음부터 백선제를 노리고 있었다.
이 무대는 백선제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다.
“말하지 않았나.”
오주원의 왼쪽 눈의 의안이 번뜩였다.
“나는 단기적인 미래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건 가히 미래를 ‘예지(豫知)’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오주원이 짜 놓은 판에서 놀아난 꼴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백선제가 행하는 모든 일.
그 모두 오주원이 예지하여 본 미래라 할 수 있었다.
정해진 결말 속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일 뿐.
하지만.
“구라도 정도껏 치게나.”
백선제는 실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씀이네.”
아주 오래 전.
백선제가 아버지, 백선평의 밑에서 수련할 때의 일이었다.
백선평이 스스로의 정의에 잡아 먹히지 않았을 때의 일.
하루는 백선제가 백선평과 대련을 하던 때였다.
백선제의 검은 백선평의 옷깃도 스치지도 못했다.
마치 백선제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백선제의 움직임을 미래에서 보고 온 듯한 행동이었다.
‘선제, 네 행동을 미리 알고 피하는 것이니라.’
‘어찌 사람이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백선제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이에 백선평은 이렇게 답했다.
‘선제, 네 앞에 아픈 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리고 두 대의 마차가 있지. 하나는 낡은 마차이고, 하나는 새 마차이다. 어떤 마차가 아픈 아이를 빨리 의원에 데려갈 수 있겠느냐.’
‘그야 당연히 새 마차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낡은 마차는 부서지기 쉽지 않습니까.’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낡은 마차가 부서지지 않을 수 있지 않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만, 부서질 가능성이 더 높지 않습니까.’
백선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단언하고 있구나. 헌데, 어찌 미래의 일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러면서 백선평은 사람의 행동, 성격, 성향.
이러한 면을 파악하면 상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고 첨언했다.
온전한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당시 어린 백선제는 저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세상을 배워 나가면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자네는 그저 판을 짜 놓은 것이지 않나. 확률이 높은 판을 말이네.”
일종의 통찰력이라 볼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계산한 것.
“자네의 단기적인 예지 능력 또한 그러한 것이고.”
극한의 통찰력을 이용해 ‘예측’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가능성의 미래를 엿본 것에 지나지 않다.
10초라는 한계를 지닌 것 또한 그러한 이유였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
그 미약한 힘은 10초가 한계였으니까.
“자네는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지 않나.”
오주원의 예지[豫知](S)는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확정된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결말이 정해진 것 또한 아니었다.
“그런데 미래를 예견했느니 뭐니. 가만 보면 자네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 포장하는 경향이 있어.”
백선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겉멋충 같다는 말이네.”
“......”
“음? 무슨 말인지 모르나?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용어라네. 무지성으로 광신하여 옹호하는 행위를 벌레 충(蟲)자를 붙여 말한다네. 겉멋충, 가오충. 이렇게 말이네.”
“......”
“에잉, 쯧쯧. 어둡고 음침한 곳에 박혀 사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알 턱이 있나.”
백선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주원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왼쪽 눈에 깃든 의안으로 말없이 백선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깐의 정적.
“그래서.”
오주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선제, 결국 너는 내가 짜 놓은 판에 걸려들었지 않았나.”
“뭐, 그렇긴 하지.”
백선제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리고 사실이 그러하기도 했다.
미래를 내다본 것은 아니지만 결국 백선제는 함정에 걸려들었다.
오주원의 통찰력은 미래를 내다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 그거 아는가?”
백선제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보다 훨씬 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이가 있다는 걸 말이네. 자네의 통찰력은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끝까지 허세인가.”
오주원은 단검을 고쳐 쥐며 말을 이었다.
“네 말마따나 허세충이 따로 없군.”
“오. 생각보다 배움이 빠르구만, 자네.”
백선제가 감탄을 터트리며 놀라 보였다.
그리고 이번엔 오주원은 반응하지 않았다.
“장난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키이이이잉─!!
오주원의 검붉은 마력이 폭사했다.
그와 동시에 오주원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풍경은 수천의 참격이 되어 공간을 할퀴었다.
“살벌하구만.”
백선제는 가볍게 실소를 흘려 보았다.
그러나 말과는 얼굴에는 짙은 긴장감이 떠올랐다.
콰콰콰콰콰!
공간 전체를 할퀴며 덮쳐 오는 참격.
살벌하다는 말도 순화된 표현이었다.
백선제는 즉시 몸을 내던졌다.
저 참격은 막을 수 없다.
주변의 공간 모두가 참격으로 덮쳐 오는 걸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백선제는 빠르게 오주원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오주원은 이를 예상이라도 한 걸까.
오주원이 순식간에 백선제를 따라붙었다.
콰자자자작─!
오주원이 움직일 때마다 그 주위의 공간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었다.
건물의 벽이 갈가리 찢어지고.
부서진 잔해들은 다시 분해되어 모래 알갱이로 흩어졌다.
바라본 오주원은 쌍단검을 휘두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주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공간이 마구잡이로 할퀴어졌다.
잔상조차 보이지 않는 속도.
마치 오주원이라는 존재가 참격으로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이건 위험하군.’
백선제는 더 이상의 장난기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오주원이 장기적인 미래를 보는 건 구라였다.
확실한 겉멋이었다.
그러나 단기적인 미래.
10초 앞을 내다보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도 가능성의 미래일 뿐이었다.
그러나 무수한 가능성 중 오주원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었다.
더하여 지금.
키이이이잉─!!
증폭 마법진으로 증폭된 오주원의 힘.
그 때문에 백선제의 개성이 통하지 않았다.
이번엔 오주원이 보는 미래의 일부를 지울 수가 없었다.
현 상황은 명백히 오주원의 손바닥 위에 놓여져 있었다.
백선제는 움직임을 달리했다.
오주원이 내다본 가능성의 미래.
그 미래에서 조금이나마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발악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싸늘한 오주원의 목소리와 함께 촤학!
백선제의 가슴팍이 크게 베어져 튀어 올랐다.
“백선제.”
그리고 다시 들려온 오주원의 목소리.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오주원의 쌍단검이 백선제의 심장을 향해 쇄도해 왔다.
* * *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가파른 산길.
수많은 나무들과 허리 높이까지 자란 풀들이 시야를 가려 오는 이곳.
제주도의 한라산.
“허억…! 허억…!”
박태민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시찰국 광역 수사대 팀장, 박태민.
서울이 난리 통이 난 상황에 박태민이 이곳, 한라산에 있는 이유는 별반 다른 데 있지 않았다.
‘박 팀장. 자네는 아버지를 찾아가 주게나.’
시찰국장, 백선제의 부탁.
‘그럼, 뒤를 부탁하네, 박 팀장.’
정확히는 부탁을 빙자한 명령 때문이었다.
해서 박태민은 백선제의 아버지, 검선(劍仙)을 찾아 이곳 한라산에 찾아왔다.
물론 검선은 세상과 칩거하여 그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그러나 박태민은 검선이 이곳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지난 날에 백선제와 검선을 만나러 온 적이 있었으니까.
비록 검선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략적인 위치는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끄으윽…!”
박태민은 이를 까득, 깨물며 몸을 움직였다.
콰콰콰콰콰콰콰─!!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감.
박태민은 이 압박감을 꾸역꾸역, 버텨 냈다.
“커헉…!”
그러나 쉽사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온몸이 짓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세(氣勢)를 이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도무지…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는 힘이었다.
“끄아아악!”
그러나 박태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온 힘을 쥐어짜 내며 몸을 일으켰다.
뚜둑, 뚝!
관절의 마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꽈지직─!
과부하가 걸린 근육이 찢어지며 파열되었다.
그럼에도 박태민은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지금 서울에서 고생하고 있을 가더들.
그리고 시찰국장, 백선제.
지금쯤이면 백선제는….
꽈득!
박태민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끄으으윽…!”
박태민은 앞으로 나아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박태민의 확고한 의지 때문일까.
사아아아아….
박태민을 짓누르던 기세가 서서히 약해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세는 완전히 사라졌다.
미약한 기세만이 그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
박태민은 그 기세를 표지판 삼아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 간을 움직였을까.
저 멀리, 단출한 초가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깊은 산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박태민은 망설임 없이 초가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선제와 같이 왔었던 이로구나.”
초가집 안쪽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이 검선(劍仙), 백선평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굴하지 않는 의지가 갸륵하여 이야기는 들어 보고자 허락했다.”
다시 들려오는 백선평의 목소리.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아─!!
안쪽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다시금 폭사해 왔다.
가까이서 마주한 백선평의 기세는 가히 초월적이었다.
이건 도무지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박태민은 이를 까드득!
“국장님의… 국장님의….”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끝내 열었다.
“부고 소식을… 전하러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뚝.
짓누르던 기세가 일순간 사그라들었다.
초월자의 채널을 구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