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삽시간에 사그라든 기세.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세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로써 정적이 내려앉았다.
대문 안쪽에서는 역시나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들어가겠습니다.”
박태민은 조심스레 초가집의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당 안쪽으로 발을 들임에.
대청마루에 고고히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헤져 있는 삼베옷.
하얗게 쇠어 버린 백발.
주름진 피부.
그러나 결코.
노쇠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존재감.
“검선님을 뵙습니다.”
검선(劍仙), 백선평.
“저는 시찰국 광역 수사대 팀장이자, 백선제 국장님을 보좌하는 박태민이라고 합니다.”
박태민은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백선평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청마루에 고고히 앉아 박태민을 바라볼 뿐이었다.
“부고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말.”
백선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선제가 죽었다는 뜻이더냐?”
“...그렇습니다. 국장님께서는… 사망하셨습니다.”
기나긴 정적이 이어졌다.
백선평은 자리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박태민은 차마 그런 백선평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산새들의 지저귐마저 들려오지 않던, 어느 시점이었다.
“선제는 왜 죽었나.”
백선평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며 들려왔다.
박태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판데모니움의 함정에 빠지셨습니다.”
박태민은 모든 사실을 솔직히 고했다.
거짓을 말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놈들은 국장님을 없애기 위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국장님은… 그 함정에 빠져 장렬히 전사…하셨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켠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꾹, 눌러 삼켰다.
지금 가장 슬픈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백선평일 테니까.
박태민은 감정을 억누르며 백선평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니, 그걸 묻는 것이 아니다.”
백선평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 백선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제는 ‘왜’ 죽었나. 무엇을 위해 죽었지?”
박태민은 순간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정신이 멍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백선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대체 무엇을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한 것인지.
그건, 박태민도 알지 못했다.
“...국장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언입니다.”
박태민은 주섬주섬,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곱게 접힌 한 장의 편지.
박태민은 그것을 백선평에게 건네었다.
백선평은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안의 내용을 펼쳐 들었다.
사락.
편지는 인쇄된 활자가 아닌, 자필로 쓴 백선제의 필체로 가득했다.
백선평은 말없이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존경하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되도록이면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함을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 * *
땡그렁.
백선제의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륵, 입가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백선제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한 자루의 단검이 가슴을 뚫고 박혀 있었다.
자세를 한껏 낮춘 오주원이 단검의 자루를 쥐고 있었다.
가슴을 뚫고 들어온 단검은 백선제의 심장 앞에 멈춰 있었다.
오주원은 그 이상을 단검을 찔러 넣지 않았다.
단지 언제라도 심장을 꿰뚫을 수 있게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오주원은 백선제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자네답지 않군. 악연도 인연이라는 건가?”
백선제는 물었다.
반항과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의미도 없었다.
오주원의 예지[豫知](S).
오주원은 이미 10초간 펼쳐지는 모든 변수를 차단했을 터.
지금 당장 백선제를 죽이지 않은 이유 역시 백선제의 죽음이 확실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오주원이 물어 왔다.
“전부 알고 있었나?”
심장 끝에 닿아있는 단검의 칼날.
“우리 판데모니움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내가 맹시우를 따라가지 않으리라는 것. 여기가 백선제, 너를 죽이기 위한 올가미라는 것. 그리하여….”
오주원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마주 바라본 시선.
“여기서 네가 죽을 거라는 것 또한, 전부 알고 있었나?”
백선제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주원에게 있어 그것은 충분한 답이 될 수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지?”
오주원이 다시 물었다.
“네가 죽을 자리임을 알면서도 왜 죽음을 자초한 것이지? 이미 알고 있었다면, 오지 않았으면 되는 일이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오주원은 눈을 치켜뜨며 말을 이었다.
“설마, 아까 전의 그 여자 때문인가?”
“민아 씨 말인가? 하하, 자네가 보기에도 민아 씨가 미인이긴 한 모양이군. 그런 소리를 할 정도면 말이야.”
“장난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네만?”
백선제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다 주륵!
입가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심장 끝에 닿아 있는 단검의 칼날.
그것은 아직 백선제의 목숨을 끊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서히 백선제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백선제, 너는 여기서 죽기엔 아까운 인물이다.”
“칭찬은 고맙다만, 이제 와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곧 있으면 자네의 손에 죽을 처지인데. 혹시 살려 줄 의향이 있는 건가?”
“......”
“역시, 살려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나도 딱히 기대한 건 아니네.”
백선제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오주원은 그런 백선제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사람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목숨과 백선제, 네 목숨의 가치는 동일하지 않아. 둘 중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면, 너와 같은 강자를 살리는 쪽이 더 효율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이들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거지?”
“내가 강하다라….”
백선제는 고개를 살며시 저어 보였다.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는 강함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직도 영웅 놀이를 하는 건가?”
“그러게 말이네. 요즘은 유치원생조차 하지 않는 영웅 놀이거늘. 난 왜 이 나이 먹도록까지 하고 있는 건지.”
백선제는 허탈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윽고 오주원이 다시 물었다.
“왜 죽음을 자초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끝까지 말하지 않을 셈인가.”
“말했지 않았나. 민아 씨 같은 미인을 잃을 바에는, 차라리 내가 희생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우리 사이에 작별 인사까지 해야 하나? 그래도 한 가지 말을 덧붙이자면….”
백선제는 오주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주원, 자네의 계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끝까지 허세충이로군.”
그 말을 끝으로 오주원의 왼쪽 눈가가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피어나는 살의(殺意).
이 살의 앞에서 백선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었다.
백선제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암전된 시야.
마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여 주는 것만 같은 건 무슨 이유일까.
가슴 깊이 파고들어 오는 단검의 감촉이 느껴진다.
‘부디, 뒤를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푸화학!
백선제의 심장이, 끝내 오주원의 단검에 꿰뚫렸다.
* * *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아버지의 말씀이 전부 옳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 아버지는 분명 ‘네까짓 게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말하며 호통치시겠지만요.
저는 아버지를 존경해 마지않았습니다.
항상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영웅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영웅은 난세 속에서 태어나는 법이라 하던가요.
평화로운 이 시대에서 영웅이란 존재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허나, 평화에도 승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못지 않은, 드높은 승리가.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워 왔습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악과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저는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살육의 길.
아버지의 말씀처럼 저는 악독한 살인귀가 되어 있었습니다.
평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죽인 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걸어 온 길은 변함없는 피로 얼룩진 길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피로 물든 길을 돌아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처참한 과정의 종착역이 과연 낙원일 수 있을까.
아버지의 말씀처럼 저는 모순적인 존재였습니다.
정의를 추구하겠다 말하나.
정작 저 스스로는 정의에서 벗어난 모순적인 존재.
악(惡)과 싸워 오고 있던 저였습니다만….
거울 속에는 제가 그토록 혐오하던 악(惡)이 비쳐 있었습니다.
제 정의에 있어 가장 흉악한 악(惡)은 판데모니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아버지.
해서 저는 마지막으로 저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솔직히 고하겠습니다.
이번 사태는 저의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흐름은 바꿀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둔한 저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만큼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간곡히 청합니다.
부디,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다시 한 번 세상을 위해 나서 주십시오.
그럼에도 아버지는 나서지 않으시겠지요.
하여, 바라옵건대.
마지막 저와의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아버지와 저.
저희가 다시 만나는 날은 서로의 시신을 수습하기로 한 날이라 약조하신 바 있습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죄는, 지옥에 가서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아비로서 이 못난 아들의 마지막을 지켜 주십시오.
제 미련한 정의를 꾸짖어 주십시오.
부디. 간곡히.
사람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나서 주십시오.
제 목숨을 빌어 간청합니다, 아버지.』
“......”
편지를 모두 읽은 백선평은 말이 없었다.
박태민은 그런 백선평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박태민은 알지 못했다.
저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백선제가 마지막 유언으로 무엇을 남겼는지.
그렇기에 백선평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박태민은 전혀 알지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느낄 수는 있었다.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백선제가 왜 죽었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백선제는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검선(劍仙), 백선평만이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선평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의 정의에 사로잡혀 세상과 등졌으니까.
해서 백선제는 스스로를 희생했다.
백선평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건 백선제, 자신의 죽음뿐이었으니까.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태민은 백선제의 선택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박태민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까 전, 백선평이 물었던 물음.
백선제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답.
“국장님께서는… 끝까지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박태민은 그렇게 말을 할 뿐이었다.
백선평은 말이 없었다.
정말 아무런.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청마루에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앉아 있는 노인.
왜일까.
박태민은 그가 더 이상 검선(劍仙), 백선평으로 보이지 않았다.
13인의 영웅, 백선평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못난 것.”
아버지, 백선평.
백선평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꾸깃.
백선평의 손에 쥐어진 편지가, 힘없이 구겨졌다.
* * *
어째서…?
오주원의 머릿속을 파고든 생각이었다.
백선제의 심장을 찌른 손의 감각은 선명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현실이었는가?
손으로 느껴지는 이 감각은 정말 선명했는가?
이와 같은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증폭 마법진으로 강화된 예지[豫知](S)의 능력.
오주원이 본 미래는 확정된 미래라 할 수 있었다.
비록 10초라는 짧은 단기적인 미래였으나 그것은 변치 않는 결과였다.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결정된 미래.
그렇기에 지금.
어째서…?
오주원은 이러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아니, 딱 한 존재였다.
오주원이 본 미래를 바꿔 버린.
그 어떤 가능성의 미래조차 예지하지 못한.
통제와 예측.
그 무엇도 하지 못했던, 마지막 변수.
“맹시우….”
오주원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 이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오주원은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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