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사아아아아아─!
거미줄처럼 균열이 인 바닥 사이로 어둠이 피어올랐다.
시우는 어둠을 피해 뒤로 크게 물러났다.
이윽고 한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은 마치 짙은 어둠 속에서 악(惡)이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달빛을 닮은 은색의 머리.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눈동자.
【어떻게….】
붉은 눈동자가 크게 떨려 왔다.
태어난 악(惡)의 여인.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결계를…?】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검은 마력으로 뒤덮인 결계의 공간.
이곳은 여인의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웬 인간이 이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허락하지 않은 존재가 버젓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 말은 즉.
【내 결계를… 찢고 들어왔다고?】
여인은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결계를 찢고 들어올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절대적인 세계의 법칙으로서 그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다.
한낱 인간 따위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계속해서 흔들렸다.
그리고 여인을 충격으로 물들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방금 그 힘은….】
자신을 땅바닥에 쳐박은 괴이한 힘.
그건 분명한 신(神)의 힘이었다.
저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인간 여자와는 달랐다.
저 인간 여자 또한 신(神)의 힘을 사용했으나 열화된 힘에 불과했다.
헌데, 지금은 달랐다.
진정한… 신(神)의 힘이었다.
인간 따위는 감히 닿을 수 없는 너머의 힘이었다.
【네가 어떻게….!】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끝내 경악으로 뜨여졌다.
【하윽…!】
일순간 여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방금 전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몸이 계속해서 떨려 왔다.
전신을 후두려 팬 듯한 격통.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정신이 흔들릴 것 같았다.
그 어지러운 정신 사이.
방금 전의 공포만은, 뚜렷하게 남아 느껴졌다.
잠깐.
공포를… 느낀다고?
【......!】
여인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내가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이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가… 내가? 릴리트인 내가…?】
여인은 부정(不情)의 화신이다.
공포, 두려움, 절망, 괴로움, 불안.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감정들이다.
그리하여 여인이 공포를 느낀다는 것.
그건 공포가 공포를 느낀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전능하신 적대자의 딸인 내가 어찌!!】
꽈꽈꽈꽈꽝!!!
통제에서 풀려난 어둠이 폭발한다.
폭발한 어둠이 세계를 갈가리 찢어 버리며, 닿는 모든 것들을 붕괴시켜 버렸다.
펼쳐지는 6쌍의 검은 날개.
【죽여 주마!!!】
바라본 그곳엔 형용할 수 없는 악마(惡魔)가 존재하고 있었다.
* * *
릴리트?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우는 눈을 한 번 치켜떴다.
릴리트(Lilitu).
그녀는 유대 신화 속, 창세기에 등장하는 악마였다.
시우도 그녀와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갓튜브의 인물이다.’
저 여인이자 악마는 갓튜브의 인물이다.
저 여인이자 악마가 릴리트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시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왔다.
케르베로스에 이어 릴리트까지.
어째서인지 S등급 던전에는 갓튜브의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윽고 제갈공명의 통찰력(S+).
기이한 힘이 마주한 현실의 본질을 꿰뚫는다.
만일 저 악마가 진짜 릴리트라면 이번 서울에서 일어난 사태는 릴리트가 원인이다.
서울 상공을 뒤덮은 수많은 던전 게이트는 릴리트가 만들어 낸 현상이다.
동시에 판데모니움의 최종 목적.
그 목적 또한 저 릴리트였다.
판데모니움은, 오주원은.
릴리트라는 악마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번 사태를 계획했다.
난잡하게 흩어진 정보의 퍼즐들이 하나둘씩 조합되기 시작했다.
각자의 짝을 맞춰 가며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짝이 맞지 않는 퍼즐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판데모니움과 갓튜브.
둘은 정말로 연관이 있는 퍼즐인가.
릴리트와 케르베로스.
이 둘은 어떻게 S등급 던전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릴리트와 판데모니움.
이들의 진짜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하데스와 케르베로스.
하데스는 케르베로스가 이곳, 던전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감추어진 진실들이 남아 있었다.
여전히 의문투성이인 것들이 있었다.
지금 당장 알 수 없는 일들.
시우는 떠오르는 의문들을 흩어 버렸다.
【죽어!!!!】
한가로이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콰콰콰콰콰콰콰─!!
새까만 어둠의 마력이 시우에게로 덮쳐 왔다.
칠흑의 어둠을 품은 듯한 마력.
밀도가 다르다.
오주원과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수천 개의 증폭 마법진으로 증폭된 오주원의 마력은 강력했다.
그러나 지금 이 어둠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원 자체가, 다른 힘이다.
‘케르베로스랑도 상대가 안 되는데.’
움켜쥔 오리할콘 권갑이 살며시 떨려 왔다.
덮쳐 오는 어둠은 시우조차 감당할 수 없는 마력을 품고 있었다.
이건… 막을 수 없었다.
지금 시우의 상태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뇌령청룡각(雷領靑龍脚)의 반동.
이 결계를 뚫고자 사용한 이시스의 현실조작[現實操作](SSS).
현재 시우의 몸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그리고.
“하윽…!”
시우의 뒤쪽에서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
한채린이 검을 지지대 감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철푸덕.
한채린은 자꾸만 주저앉았다.
갓 태어난 사슴처럼 쉬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앞선 릴리트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별다른 외상은 없어 보였다.
백선제처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러나.
콰콰콰콰콰콰콰─!!
그 회복할 시간을 릴리트는 허락하지 않았다.
전방위를 휩쓸며 덮쳐 오는 어둠.
시우는 오리할콘 권갑을 꽈득, 움켜쥐었다.
지금 몸 상태로 한채린을 안고 저 어둠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
꽈꽈꽈꽈꽈꽝!!
시우의 전신으로 괴악한 힘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번쩍!
새하얀 빛이 터졌다.
터져 나온 빛은 다시금 강한 빛을 머금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온 세상의 빛이 새하얗게 물든다.
그리하여 펼쳐진 백색의 공간.
【이, 이 힘은…!!】
릴리트의 붉은 두 눈이 경악으로 뜨여진다.
【네가… 네가 어떻게 이 힘을…!!】
일그러진 얼굴로 뚜렷한 공포의 감정이 깃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말도 안 된다! 어찌 인간 따위에게!!】
릴리트의 분노가 사방으로 드리운다.
사아아아아아─!!
폭사하는 어둠이 더욱 그 힘을 발하며 터져 나갔다.
빛과 어둠.
두 힘이 한데 얽히며 서로의 영역을 확장해 갔다.
번쩍! 콰쾅!
천지가 개벽하는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콰르르르릉…!
세상 전체가 뒤흔들리는 진동이 일었다.
태초부터 존재해 온 두 힘.
그것이 서로의 목덜미를 맹렬하게 물었다.
그리고.
“크윽…!”
시우의 입가로 격통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밀린…다.
“커헉!”
릴리트의 어둠에 시우의 힘이 밀리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도저히 릴리트를 이길 수 없었다.
조금 몸을 회복하고 왔으면 가능했을까.
백선제의 말대로 시우의 몸을 치료해야 했던 걸까.
글쎄.
시우는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피를 향한 끝없는 갈증.
굶주림의 욕망들.
끼야아아아아아아악!!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당장이라도 시우를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끔찍한 악(惡)은 시우가 지금까지 만나 본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강했다.
오로지 죽음만을 갈망하는 악(惡).
【죽어!!!】
‘...못 이겨.’
시우는 처음으로 절망을 떠올리고 말았다.
이 절대적인 악(惡) 앞에서는 아무것도 의미가─.
바로 그때.
“시우 씨…!”
시우의 뒤로 한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화아아악!
폭사하던 어둠이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내 한 점으로 빨려들어 갔다.
어둠이 빨려들어 가는 그곳.
“채린 씨?”
한채린이 릴리트의 어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태극(太極)의 조화.
한채린은 태극(太極)의 힘을 이용해 릴리트의 어둠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채린의 태극(太極)은 릴리트의 악(惡)을 넘어설 수 없었다.
사아아아아아─!
한채린의 태극(太極)이 릴리트의 어둠으로 점점 물들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한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제 몸 안에 악마를 붙잡아, 둘게요….”
콰아아아아아아─!!
한채린의 두 눈은 어둠으로 물들어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서히.
아주 서서히.
한채린으로서의 존재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저와 함께 악마를… 죽이세요.”
한채린은 끝까지 릴리트의 어둠을 받아들였다.
한채린의 몸 안에 릴리트를 가두어 한채린과 같이 죽인다.
“......”
시우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아마 가능은 할 터였다.
릴리트를 없앨 수 있었다.
릴리트가 사라지면 서울 상공을 뒤덮은 게이트들 또한 사라질 터.
그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다.
단 한 명의, 희생으로 말이다.
“조금 더… 시우 씨와 같이….”
한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성이 완전히 사라진 한채린의 눈동자.
한채린은 끝내 말을 완성시키지 않았다.
아니,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 순간 툭.
시우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뭐, 뭐야….】
릴리트는 그만 이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
어떻게 이 결계의 공간에 침입자가 있을 수 있는지.
어찌하여 인간이 온전한 신(神)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으나 결론적으로 상관없었다.
정확히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 봤자 한낱 인간일 뿐이었고.
그래 봤자 자신을 막을 수 없었으니까.
중간에 제물의 인간 여자가 개입한 것 또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주제넘게도 자신을 봉인하려던 저들의 계획을 비웃을 수 있었다.
한낱 인간의 정신력일 뿐이다.
그런 미약한 저항 따위 단번에 끊어낼 수 있었다.
아까 전에도 그렇게 끊어내지 않았는가.
인간이란 왜 이리 어리석은지.
릴리트는 가엾은 두 인간을 비웃었다.
이제 남은 건 제물의 인간 여자를 차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온전한 힘을 유지한 채, 이 고립된 공간 밖으로 나가는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뭐, 뭐야….】
릴리트는 다시 한 번 이런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얼빠진 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다름 아닌 눈앞으로 보이는 현상.
────────.
소리조차 터져 나오지 못하는 괴이한 현상.
그것이 이 공간 전체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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