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월자의 채널을 구독했다-190화 (190/250)

189화.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지 못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정적만이 존재했다.

얼어붙은 시간 속.

[백선평….]

붉은 그림자의 읊조림이 들려왔다.

붉은 그림자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방금 전의 충격에 타격을 입을 것일까.

아니면 피해가 누적된 것일까.

가면을 어루만지는 붉은 그림자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세상에 소외된 채 죽어 가던 네가, 무슨 바람이 든 것이지?]

붉은 그림자는 백선평에게 물었다.

백선평은 답이 없었다.

검을 길게 늘어뜨린 자세로 붉은 그림자를 마주 바라볼 뿐이었다.

잠깐의 정적.

[피와 망상에 뒤덮인 채, 삶의 짐을 견뎌 내는 건가.]

붉은 그림자가 자그마한 실소를 흘렸다.

백선평을 바라보는 가면은 어딘가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우습지도 않군.]

콰콰콰콰콰콰─!!

붉은 그림자 주변으로 검붉은 마력이 치솟았다.

치솟은 마력이 붉은 그림자를 삼켰다.

이윽고 사륵─.

붉은 그림자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백선평은 늘어뜨린 검을 고쳐 쥐며 전방위를 베어 냈다.

꽈앙!

보이지 않는 타격이 백선평의 검과 충돌했다.

터져 나온 충격에 대지가 쩌적─! 사방으로 갈라졌다.

[늘어진 어깨, 탁한 눈빛.]

허공에서 붉은 그림자의 의지가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쑤욱.

백선평의 그림자에서 붉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은 온데간데없고, 과거의 망령이 존재하고 있구나.]

붉은 그림자의 일장이 백선평에게 쇄도해 갔다.

일장에 담긴 마력은 그 무엇도 찢어발길 듯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백선평은 황급히 상체를 비틀어 검을 휘둘렀다.

콰자자작!

강맹한 파쇄음과 함께 공간이 찢어졌다.

“젊은 혈기는 전부 타올라 잿더미가 되었으나….”

그리고 들려오는 백선평의 목소리.

“세월의 눈으로 얻은 것들도 있는 법이지.”

콰아아아아아─!!

백선평의 기세가 사방으로 폭발했다.

그것은 드리운 검붉은 마력을 무차별적으로 집어삼켰다.

가면으로 엿보이던 붉은 그림자의 비아냥이 일시에 사라졌다.

폭발하는 백선평의 기세.

[구렁이도 세월이 흐르면 영물이 된다는 건가.]

꽈직─!

폭발한 기세가 주변을 뒤덮었다.

붉은 그림자의 검붉은 마력이 기세에 휘말려 사라진다.

[허나, 구렁이는 결코 용이 될 수 없는 법이거늘.]

“용은 못 되어도, 이무기는 될 수 있는 법이지.”

폭발한 백선평의 기세가 번뜩인다.

붉은 그림자는 황급히 양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꽈앙!

휘둘러진 백선평의 검에 붉은 그림자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 크나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붉은 그림자의 가면 안쪽으로 긴장이 아로새겨졌다.

“이유가 무엇이지?”

백선평이 물었다.

그 물음은 전방위를 할퀴는 검과 함께 붉은 그림자를 덮쳐 왔다.

콰자작!

붉은 그림자의 몸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까지 네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던 일이었나?”

꽈앙─! 꽝!

백선평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강력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붉은 그림자는 백선평의 검을 막기에 급급했다.

“아직도 그때의 일을 잊지 않은 것인가?”

[나야말로 묻겠다.]

붉은 그림자의 기세가 일변했다.

쩌엉─!

둔탁한 굉음이 일며 백선평의 검이 튕겨져 올랐다.

이윽고 파바바박!

잔상조차 보이지 않는 수많은 연타가 백선평에게로 쏟아졌다.

몰아치던 백선평의 기세가 일시에 꺾인다.

백선제의 몸이 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붉은 그림자는 마력을 더해가며 백선평을 압박했다.

[이 세상이 네 정의에 빗대어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파바박! 쩌어엉─!

둘의 공방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서로가 서로에게 내던진 물음은 답으로써 들려오지 않았다.

셀 수 없는 공방이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주변은 이미 박살이 나 있었다.

백선평과 붉은 그림자.

둘은 서로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 서로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용호상박(龍虎相搏).

용과 호랑이가 맞붙는 듯한 형세는 쉬이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걸까.

콰콰콰콰콰콰─!!

붉은 그림자가 먼저 승부수를 던져 왔다.

폭사하는 끝없는 마력.

그것은 기나긴 먹선을 그리며 세상의 색을 검붉게 덧칠했다.

그 뒤를 이어 콰아아아아─!!

백선평의 기세 또한 붉은 그림자에 대적하며 폭발했다.

푸른빛을 머금은 기세가 검붉은 마력과 충돌한다.

꽈꽈, 꽈아, 꽈꽝!

서로 엉키고 뒤섞이는 거대한 마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갔다.

터져 나오는 폭발은 또 다른 폭발에 끊기듯이 들려온다.

그리고.

[희망이란 관념을 믿으며 이 세상은 존립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붉은 그림자의 읊조림이 들려왔다.

“글쎄.”

그리고 이번엔 백선평은 침묵하지 않았다.

“희망이 보기엔 하등 보잘 것 없고 하염없어 보여도. 가슴 속에 품을 만한 것이긴 하지.”

하!

붉은 그림자의 가면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선평, 네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붉은 그림자의 마력이 첨예하게 벼려졌다.

벼려진 검붉은 마력은 닿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베어 낼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것이 너의 달라진 신념인가?]

붉은 그림자가 실소 섞인 물음을 던진다.

[신념 따위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그것이 네가 말하던 정의가 아니었나?]

폭사하는 붉은 그림자의 마력.

백선평은 답을 하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황폐화 된 도심의 풍경.

피를 흘리며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

생사조차 불분명한 S급 헌터들.

오직 절망만이 가득한 풍경이다.

현실이 아니라 지옥(地獄)의 풍경이라 해도 믿을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

그러나 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희망을 잃지 않고 이 절망에 저항했다.

아마 저들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이 절망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쯤은 말이다.

확률로만 따지면 0%에 가까울 것이다.

이것이 거역할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이었다.

흘러가야 하는 대로 흘러가야 하는.

한낱 인간이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운명.

희망이라는 것은 결국은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온갖 짓을 다 하며 마구 악을 쓰는.

그러나 결과에는 딱히 의미가 없는.

그런데, 정말로 의미가 없었던 걸까.

저들이 지키려고 했던 무엇.

생각해 보면….

인류는 희망에 의존하여 발전해 왔다.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희망을 스스로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 인간이었다.

그 결과 인류는 ‘불가능’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살생을 기록한 천연두.

희생된 이만 누적 집계한다면 마계 대침공 때의 희생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세상 그 누가 천연두를 박멸할 수 있다 생각했을까.

대체 무엇을 믿고 자신의 아들에게 소의 고름을 투여했는가.

만일.

인류가 확률에만 의거해 행동했다면.

희망이라는 놈을 중심에 두지 않았다면.

인류는 오로지 자연적 우연에 의해서만 발전을 해야만 했을 터였다.

확률이 높은 일에만 행동했을 터였다.

희망이라는 바보 같은 믿음이 없었다면 인류는 결단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그렇기에 백선평은 의문이 들었다.

이 황폐한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오지 못한 희망은 과연 어떤 희망이었을까.

악독한 재앙 속에서 억지로 살아가게 만드는 기만이었을까.

아니면 재앙을 이겨 낼 수 있는 믿음이었을까.

그래서였다.

“나는 여전히 신념 따위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백선평의 시선이 흘러간다.

절망만이 가득한 풍경을 차분히 훑는다.

역시, 희망은 기만이다.

악독한 재앙 속에서 억지로 살아가게 만드는 가장 끔찍한 재앙이다.

그것이 백선평이 지금까지 믿어 온 신념이었다.

하지만.

백선평의 시선이 쓰러진 한 사내에게 향했을 때.

죽어 가는 시우에게 비로소 멈추었을 때.

백선평이 신념 따위에 목숨을 걸지 않는 이유.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으니까.”

백선평의 기세가 공간 전체를 뒤덮어 갔다.

콰아아아아아앙!!!

* * *

천지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

세상이 개벽하는 듯한 충격에 사람들의 몸이 휘청거렸다.

자욱이 피어난 먼지 안개는 한 치 앞의 시야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

“쿨럭!”

격통 어린 신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먼지 안개가 걷히며 시야가 제대로 잡혔다.

백선평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검을 지지대 삼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반면에 붉은 그림자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거, 검선께서마저….”

“안돼….”

사람들의 절망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 순간.

[...인정한다.]

붉은 그림자의 읊조림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또옥.

갈라진 붉은 그림자의 가면 아래.

붉디 붉은 한 방울의 피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창백했던 악마의 가면은 어느샌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패배했음을.]

붉은 그림자의 의지가 공허히 울려 퍼졌다.

이윽고 붉은 그림자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황폐화 된 도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

그 순간 쩌적─!

붉은 그림자의 가면이 반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하여 가면 속, 감추어진 얼굴이 드러나려던 찰나.

[오늘의 승리를 만끽하라.]

휘릭.

붉은 그림자가 등을 돌렸다.

그와 함께 후드가 벗겨지며 긴 백금색의 생머리가 허공으로 흩날렸다.

별자리를 수놓는 듯한 몽환스러운 백금색의 머리칼은 붉은 그림자의 얼굴을 감추었다.

[이 광막한 묘지 속에서, 다가올 절망을 한없이 기다리며.]

사아아아─!

붉은 그림자 주변으로 검붉은 잿더미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사라…졌어?”

붉은 그림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그림자와 같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한번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번엔 아까와 같은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기쁨을 표출하기 직전의 짤막한 정적.

사람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하늘 가득히 울려 퍼졌다.

“끄, 끝났어…! 모두 끝났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

“우린 살았어!”

“우리는 살았다고!”

살아남았다는 기쁨.

“...고생했다.”

“선배니임…!”

절망을 이겨 냈다는 희열.

와아아아아아아아─!!

희망 속에서 피어난 환호성은 끊이질 않았다.

되려 그 크기를 키워 나가며 서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모든 이가 기쁨의 환호성을 터트리는 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는 이 기쁨의 환호성은 아무런 대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시우 씨…!”

터져 나오는 환호성 사이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이어 채린의 기나긴 흑발이 허공을 흩날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자꾸만 휘청거렸다.

그러나 채린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움직임이 없는 시우.

채린은 시우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시우의 앞에 주저앉듯이 쓰러졌을 때.

와아아아아아아아─!!

“아… 아아….”

채린은 희망에 깃든 절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시우는 도무지 살아 있는 상태라고 보이지 않았다.

찢기고, 벌어지고, 파열된 상처들.

상반신이 훤히 드러난 시우의 몸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전신에서 어디 하나 괴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도무지… 도무지….

“시, 시우 씨….”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답을 하지 않았다.

맹한 표정으로 ‘…예?’ 하는 대답을 해 오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던가.

시우는 그 어떠한 답도, 말도 하지 않았다.

채린은 천천히 시우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들리지 않았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심장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느껴지지도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

들려오는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 때문일까.

시우의 심장 소리가, 채린에게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

채린의 두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려 왔다.

계속해서 시우의 이름을 불렀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채린은 허망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채린의 모습 때문일까.

“저, 저기… 맹시우 헌터가….”

“괜찮은… 건가?”

사람들은 그때서야 시우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이 환호성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자각할 수 있었다.

터져 나오던 기쁨의 환호성이 사그라들었다.

사그라든 환호성은 곧 정적으로 바뀌었다.

내려앉는 정적 속.

“시우 씨… 시우 씨….”

채린이 애처롭게 시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시우는 아무런 답도,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초월자의 채널을 구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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