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월자의 채널을 구독했다-193화 (193/250)

192화.

갑작스러운 백선평의 등장.

시우 앞에 있는 노인은 백선평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일까.

시우는 눈앞의 노인을 백선평이라 믿을 수 없었다.

보다 정확히는 검선(劒仙), 백선평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백선평에게서는 그 어떠한 기운도 느낄 수가 없었으니까.

과거, 마왕을 베어 냈던 그 강대한 기운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일까.

백선평과 시우와의 격차가 너무 높아 백선평의 기운을 인지할 수조차 없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시우는 금방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붉은 그림자의 기운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이 말은 즉.

백선평은 모든 힘을 잃었다.

검선(劍仙)으로서 가진 바를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

시우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백선평이 왜 모든 힘을 잃어버렸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방금 전, 백선제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제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우는 그저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백선평은 그런 시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야말로 네게 감사한다.”

그리고 들려온 백선평의 답.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백선평은 평범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힘을 잃은 백선평에게는 그 어떠한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네 덕분에 나는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예?”

시우는 백선평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멍한 정신 사이.

“무슨 신선놀음 같은 소린가 싶지?”

백선제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리고 솔직히… 그러했다.

진짜 저게 무슨 신선놀음 같은 소리란 말인가.

검선(劍仙), 검의 신선이라 불리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은 걸까.

그런데 신선도 저런 소리는 안 한다.

신선이라 함은, 구름 낀 도원에서 바둑을 두는 고상한 존재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바둑을 두기는 했었다.

그런데 훈수 두지 말라며 오만가지 욕지거리를 내뱉는 한편.

너 이 새끼, 방금 밑돌 빼지 않았냐며.

장난치면 손모가지 날아간다고 속세에서 안 배웠냐며.

이 새끼, 우화등선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 준다면서 칼부림이나 하는 것이 신선들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도교에서 가장 뛰어난 8명의 신선, 팔선(八仙).

여동빈은 그런 팔선(八仙) 중 한 명으로 진짜 ‘신선’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동빈의 채널에 올라오는 영상들.

『<여동빈>: 잡초 뜯어다가 불로초라고 속이고 진시황에게 팔아 봤습니닼ㅋㅋㅋㅋㅋ』

이딴 짓이나 하며 노는 것이 신선들이었다.

‘그런데 장삼봉 추천 채널에 왜 저런 영상이 뜨는 건지.’

아무튼.

시우는 백선평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원래 꼰대 같은 면이 좀 있네. 자네가 이해하게나.”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백선제가 속삭여 왔다.

아까부터 충분히 백선평의 귀에 들릴 소리.

그러나 모든 힘을 잃었기 때문일까.

백선평은 백선제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쨌든.

“검선께서 제게 그리 말씀하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백선평이 시우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었다.

붉은 그림자에게 죽을 뻔한 것을 구해 준 것이 백선평.

다 죽어 가는 시우를 살려 준 것도 백선평이었다.

무엇보다.

“모든 힘을… 다 잃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시우에게 있어 쌓아 온 숙련도를 모조리 잃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 상실감이 어떠할까.

시우는 도저히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하지만.

“영웅의 끝이 찬란하리란 법이 있더냐.”

정작 백선평은 담담하기만 했다.

“나는 그동안 내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했었다. 그 대가를 값싸게 치른 셈이니, 개의치 말거라.”

힘을 잃었어도 영웅은 영웅이라는 걸까.

모든 힘을 잃었으나, 백선평은 여전히 강했다.

또한 시우를 바라보는 백선평의 두 눈.

그 주름진 두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백선평은 정말로 시우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진짜 신선이 아닐까.

우화등선을 초기화시켜 준다며 칼부림이나 하는 갓튜브의 신선들이 아니라 말이다.

시우는 백선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선평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적당한 거리에 멈춰 주변의 의자를 끌어와 자리했다.

시우는 그때서야 방금 전, 백선평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붉은 그림자가 과거에 백선평의 동료였다는 말.

“아까 전의 그 말씀은….”

“붉은 그림자는 나와 같은 13인의 영웅 중 한 명이었다.”

담담한 백선평의 답이 들려왔다.

그러나 정작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예에?!”

“그게 정말입니까, 아버지?”

“...엥?”

시우는 순간 뭔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옆에서 두 눈을 부릅, 뜨고 있는 백선제의 모습.

아니, 그 쪽은 왜 놀라는 건데?

“설마 국장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겁니까?”

“그, 그렇다네.”

백선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백선제의 모습에 시우는 이 부자지간의 사이를 추측할 수 있었다.

‘별로 친하진 않았던 모양이네.’

그러니까 서로 대화가 많았던 건 아닌 것 같았다.

뭐, 으레 부모와 자식들이 그러하듯.

자식들이 커 나가면서 서먹서먹해지는 법이긴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더더욱 그러하기도 했고.

그런데 음.

시우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백선제와 백선평.

이 둘처럼 사이가 서먹했을까.

아니면 보다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을까.

시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금방 털어 버렸다.

대신 백선평의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그리하여 통찰력(S+).

기이한 힘이 마주한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다.

붉은 그림자는 정체가 불분명한 존재다.

그러나 붉은 그림자와 관련하여 떠도는 소문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붉은 그림자가 13인의 영웅 중 한 명을 살해했다는 것.

대마법사, 알베르토.

그가 바로 붉은 그림자에게 살해된 13인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붉은 그림자가 13인의 영웅 중 한 명이라면?

이러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다.

붉은 그림자가 대마법사 알베르토일 수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붉은 그림자는 언령 마법을 사용했다.

언령 마법은 S급 마법사들조차 할 수 없는 초고난도의 마법.

그렇기에 알베르토가 죽은 것.

그건 알베르토가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붉은 그림자였기에 그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럼… 붉은 그림자가 13인의 영웅 중 한 명을 살해했다는 소문은 사실인 겁니까?”

해서 시우는 백선평에게 물었고.

“그 또한 사실이다.”

백선평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붉은 그림자는 동료인 알베르토를 살해했다.”

“그 말씀은, 알베르토 님과 붉은 그림자. 이 둘은 별개의 존재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다.”

들려온 백선평의 답.

시우는 알베르토가 붉은 그림자라는 가능성을 지워 버렸다.

“그럼 붉은 그림자는 13인의 영웅 중 누구였습니까?”

“사두즈.”

들려오는 백선평의 답.

“붉은 그림자는 13번째 영웅, 사두즈였다.”

투신(鬪神), 사두즈(Saduj).

일순간 시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왔다.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들이 혼동을 일으켰다.

일단 첫 번째.

“사두즈께서는 자살…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두즈는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헌데 지금.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영웅으로서의 자살이라면 사실이기도 하겠군.”

백선평은 차분히 답했다.

“아버지, 그럼 붉은 그림자는 왜 판데모니움의 지배자가 된 것입니까?”

이어진 백선제의 물음.

그리고 그건 시우가 갖는 두 번째 물음이기도 했다.

붉은 그림자는 13인의 영웅이었다.

인류를 종말의 벼랑 끝에서 구원해 낸 영웅.

그 강함도 강함이었거니와 고결함 또한 갖춘 이들이었다.

지금 당장 백선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백선평은 비록 세상과 등을 돌렸으나, 결국엔 스스로를 희생하여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게 13인의 영웅이란 존재였다.

인류의 구원자.

그러나 붉은 그림자는 그렇지 않았다.

되려 인류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이럴 거면 왜 13인의 영웅이 되었는가.

왜 마왕의 목을 베어 내 인류를 뭐 하러 구원하였는가.

처음부터 마왕을 베어 내지 않았으면 그만이었다.

이런 세상 따위 멸망하게 두면 그만이지 않았는가.

“붉은 그림자는 대체 왜…?”

혹시 다른 진실된 목적이 있는 걸까.

판데모니움의 목적은 인류의 멸망이 아닌 것일까.

백선평은 이번에 쉬이 답을 하지 않았다.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두즈는… 배신을 당했다.”

백선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사두즈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배신을 당했었지.”

배신?

시우는 백선평의 말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백선제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의문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왕을 베어 내고 평화가 찾아온 이후, 우리 영웅들은 쓰임이 다 했다. 우리 영웅들은 처리하기 곤란한 존재나 다름없었지.”

사용하고 남은 핵폐기물.

인류의 구원자에게 적절치 않은 비유였으나 그와 같다고 볼 수 있었다.

필요할 땐 강력한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러나 쓰임이 다한 직후에는 처리하기 곤란한 핵폐기물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환경을 망치고 불안하게 만드는 무엇.

“우리가 목숨을 바쳐 구해 준 이조차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더 나아가.

“우리들을 없애려 했었지.”

끝내 13인의 영웅들을 처리하기에 이른다.

핵폐기물을 처리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13인의 영웅이 갖는 강함은 이례적이었다.

시우가 붉은 그림자와 부딪혀 봤기에 알 수 있었다.

감히 어찌할 수가 없는 수준.

당연하게도 암살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나는… 아이의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다던 한 명의 어머니를 베어 내야만 했다.”

말을 내뱉는 백선평의 얼굴은 착잡했다.

“그럼 검선께서 세상과 등을 진 이유 또한….”

“없잖아 있었다.”

백선평은 그리 답을 할 뿐이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영웅이란 이름에 드리운 어두운 뒷면.

“......”

시우는 말없이 백선평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백선평은 암살의 위협을 떨쳐 내고 다른 동료들을 찾았다.

그리고 마주한 사두즈.

사두즈 역시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역시나 암살의 위협을 보란 듯이 떨쳐 낸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두즈는 무언가 틀어져 있었다.”

사두즈는 피로 물든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사두즈 주변으로는 시체의 육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검선, 혹시 그거 아세요?’

사두즈는 찾아온 백선평에게 말했다.

‘신(神)은 언제나 우리들 너머에 계시죠. 닿으려 손을 뻗어도, 목소리를 듣고자 귀를 기울여도. 신(神)께서는 그 어떠한 응답도 해 주지 않으시죠.’

평소와는 사뭇 다른 사두즈의 분위기.

‘인간은 결코 신(神)이 될 수 없어요. 모든 면에 있어 신(神)은 우리 인간보다 뛰어나죠.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검선?’

사두즈… 아니.

붉은 그림자는 갑자기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의 육편을 씹었다.

자신이 구해 주었으나, 끝내 자신을 배신한 이들의 육편을 씹었다.

우적우적, 씹히는 소리가 이어질수록 붉은 그림자의 존재는 더욱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꿀꺽.

시체의 육편이 붉은 그림자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인간이 신(神)보다 뛰어난 것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을요. 전지전능하신 신(神)조차 인간에게는 이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어요. 혹시… 그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검선?’

히죽.

지어지는 붉은 그림자의 광기 어린 미소.

“악의(惡意).”

말을 내뱉는 백선평의 말에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 말을 끝으로 붉은 그림자는 자리를 떠나갔다고 한다.

백선평은 그런 붉은 그림자를 차마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13인의 영웅, 사두즈를 볼 수 없었다.

백선평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

시우는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백선제 또한 마찬가지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정적.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붉은 그림자의 주장일 뿐이다.”

백선평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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