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일순간 들려온 백선평의 의미심장한 말.
시우는 저 말의 뜻을 단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 그림자의 주장일 뿐이라니.
그 말은 즉.
“방금 그 이야기가 거짓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시우는 물었고.
“그런 뜻이 아니다.”
백선평은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본 광경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두즈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했고, 그 이후로 붉은 그림자가 되었지. 허나, 그때의 일이 사두즈를 붉은 그림자로 만들었냐 묻는다면….”
백선평은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백선평이 본 사두즈는 분명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이는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광기가 당시의 일 때문이라고는 백선평은 확신하지 않았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사두즈는 이미 사람들을 죽인 이후였다. 따라서 난 그 이전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
차분히 시선을 내린 백선평의 눈.
백선평의 목소리가 공허히 들려왔다.
“사두즈가 죽인 이들이 정말로 사두즈를 배신하려 했던 것이 맞는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은 사두즈를 도와주려 했을 수도 있었다.
위기에 빠진 사두즈를 도와주려 했던 사람들일 수도 있었다.
사두즈는 그런 이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인 것일 수도 있었다.
백선평은 그 이전의 상황을 알지 못했고.
이미 죽은 자는 말이 없었으니까.
하여, 이 말은 즉.
“사두즈의 광기는 그 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지.”
사두즈의 광기는 이미 현재 진행형이었다.
당시의 일은 그저 촉발제에 지나지 않았을 뿐.
따라서 백선평은 역시나 확신할 수 없었다.
신(神)을 뛰어넘는 인간의 악의(惡意).
그것은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향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사두즈, 본인을 향한 것이었는지.
“허나, 아버지.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바에 따르면 사두즈께서는 충분히….”
“사람들에게, 그리하여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더냐.”
백선제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한 답이 될 수 있음을 어느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인류를 구원한 영웅들을 핵폐기물 취급하며 배신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환멸을 느낄 수 있었다.
비단 사두즈 뿐만 아니라 13인의 영웅들 모두가 그러한 감정을 충분히 느낄 법했다.
이런 세상 따위 멸망시키고 싶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며 세상을 판단하지 말거라.”
백선평은 그렇지 않았다.
“......”
백선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백선평의 말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배신한 이들은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우의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깨고 들려왔다.
백선평의 눈에 상당한 이채가 서렸다.
“그리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냐.”
백선평이 물었다.
시우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답했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말이 있다.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남에게 미움을 받기 쉽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재능 있고 뛰어난 이를 보면 질투와 부러움을 먼저 느끼는 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아무리 선(善)하고 착한 이라도 누군가에겐 미움을 받는다.
“예수님조차 모든 이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보다 뛰어난 존재는 없을 것이다.
눈앞의 백선평도 예수와 비교하면 몇 수는 접는다.
그런 예수조차 사람들에게 배신당해 죽었다.
성선(性善)과 성악(性惡).
인간의 본성은 아마 성악(性惡)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극히 일부의 사람들일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런 이들만 바라봤을 때의 일이었다.
남을 질투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부의 사람들.
“세상엔 그런 이들보다 선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예수를 시기한 이들보다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한 이들이 훨씬 더 많듯이 말이다.
예수를 시기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인간은 모두 악(惡)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길.
[겨울에 태어난 하루살이는 새하얀 눈이 오던 날 삶을 마감했다.]
[훗날, 옥황상제가 하루살이에게 묻기를 세상은 어떠하더냐.]
[그러자 하루살이는 ‘세상은 그저 하얗다’라고 답했다.]
[그럼 세상은 하루살이의 말처럼 전부 하얗기만 할 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하루살이가 본 것은 겨울의 풍경 중 일부에 지나지 않다.
세상에는 봄의 포근함도 있다.
여름의 뜨거움도 있다.
가을의 서늘함도 존재한다.
또한 같은 겨울 내에서도 수많은 풍경이 존재한다.
하여, 지금 백선평의 말.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세상을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저는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이 13인의 영웅을 핵폐기물 취급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다.
그들 뒤에는 백선평을 존경하고 따르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에 이르러 백선평을 영웅이라 추앙하지 않았겠지.
예수를 시기한 이들보다 존경하는 이들이 훨씬 많듯.
백선평을 시기하는 이들보다 우러러보는 이들이 더 많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대체로 티가 나질 않는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 물감이 더 티가 나듯이 말이다.
“선한 이들은 대체로 침묵하기 마련이니까요.”
“침묵과 방관 또한 하나의 죄다. 그들이 침묵하지 않았더라면, 방관하지 않았더라면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건 시우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악(惡)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하여.
방관한다고 하여.
그들이 악(惡)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 나가기가 벅찬 것뿐입니다.”
그냥 힘이 없을 뿐이었다.
목소리를 낼 힘이.
앞에 나서서 행동할 여력이.
취업을 위해 매일 같이 노력하는 취준생.
상사에게 마구 깨지고 퇴근하는 직장인.
언제 잘릴 지 전전긍긍하는 두 아이의 아버지.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현실이 너무도 버거우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슬퍼하고 울어 줄 힘이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멀리서 응원할 뿐이었다.
침묵하며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것이다.
“검선께서는 배신한 이들이 아닌, 침묵하는 선한 이들을 보신 것 아니십니까.”
백선평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악한 이들에 매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배신을 당한 상황에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정말로 어려웠다.
공자께서도 이를 이상적인 인간상.
군자(君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 말할 뿐이었다.
하여, 지금.
“...선제보다 훨씬 낫군.”
백선평은 군자(君子)와 가까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13인의 영웅.
요즘은 유치하다며 비웃는 오글거리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우는 백선평의 모습에서 영웅이라는 이름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시우를 바라보는 백선평의 눈이 묘하게 번뜩였다.
방금 전의 감정이 호기심이라면, 지금은 상당한 놀라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윽고 백선평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시우의 옆 침대에 앉아있는 백선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말고, 보다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내 그리 일렀거늘….”
백선평이 혀를 쯧, 한 번 차 보이며 말을 이었다.
“범죄자들을 잡아넣는 시찰국장이라는 놈이, 되려 범죄자의 말에 동조나 하고 있는 것이냐.”
백선평은 백선제를 꾸짖었고.
백선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시우는 뭐랄까.
‘...어색하네.’
묘한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백선제가 쭈그리가 된 모습이 굉장히 어색했다.
중년의 나이가 된 백선제가 저러니 참….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우스꽝스러웠다.
무엇보다 시찰국장, 백선제.
어딜 가나 존경받는 이가 바로 백선제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한껏 쭈그리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참….
하지만 뭐.
이게 또 부자지간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장성해도 아비 눈에는 여린 아이였고.
아무리 장성해도 아비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말이다.
“...죄송합니다.”
백선제는 더욱 쭈그리가 되었다.
그 모습에 백선평은 더욱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 보였다.
그리고 잠시.
“선제, 너는 퇴원을 하면 곧바로 본가로 오거라.”
“...아버지?”
갑작스러운 말에 백선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가로 오라는 백선평의 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백선평이 칩거를 깨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본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힘을 잃은 내가 무에 쓸모가 있겠느냐.”
사실 큰 의미가 없기도 했고 말이다.
백선제는 잠시 침묵하고는 말했다.
“그럼 어인 이유로…?”
“뒷방 늙은이라도 훈수 정도는 둘 수 있는 법이지 않겠느냐.”
백선제는 백선평의 말을 한번 곱씹었다.
“그 말씀은… 아버지께서 저를 지도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선평의 지도 가르침.
비록 백선평은 모든 힘을 잃었으나 그 경험까지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그런 마음가짐과 실력으로 무슨 시찰국장이며, 너의 정의를 지킨단 말이냐.”
백선평은 혀를 차 보이며 말했다.
“힘없는 정의는 한낱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몽상가와 혁명가는 똑같은 신념을 지닌 자이나, 둘의 차이를 가르는 건 그것을 실현시킬 힘의 여부다.”
“......”
“그러니 선제, 너는 퇴원을 하는 즉시 본가로 오거라.”
이어 백선제의 시선이 시우에게 향했다.
“그리고 네 녀석. 시우라고 했었나?”
“그렇습니다.”
“너 또한 원한다면 선제를 따라 본가로 와도 좋다.”
“아, 아버지?!”
그러자 백선제가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아, 아버지께서 맹시우 헌터를 직접 지도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선평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해 보일 뿐이었다.
그 때문일까.
“허어…!”
백선제가 탄성을 터트렸다.
백선평이 직접 누군가를 가르쳐 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단언하는데 없었다.
백선제, 본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백선평에게 가르침을 청한 이들은 많았다.
세계 각지에서 검(劍)을 사용하는 모든 각성자들이 바라마지 않는 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 명도 없었다.
백선평이 그들 중 누군가를 가르친 적은 없었다.
검선(劍仙)이라는 이름처럼 백선평의 정의는 딱딱했으니까.
그 정의관에 부합되지 않으면 백선평은 그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아마 백선제도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이게 무슨….”
백선제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순히 백선평이 시우를 가르치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 없었다.
백선평이 시우를 인정했다는 것.
나아가 백선평의 뒤를 이를 후세의 영웅으로 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딱히 질투가 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선제 또한 시우를 인정하고, 그렇게 보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차기 시찰국장으로 점찍어 두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단지 백선평 또한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시우를 보고 있다는 것.
그 사실에 상당히 놀랄 뿐이었다.
놀라 까무러칠 충격이 백선제를 강타했다.
그런데 웬걸.
더 큰 충격이 뒤에 더 남아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시우가 괜찮다며 말해 왔다.
그런데 백선제가 괜찮지 않았다.
뭐, 뭐?
지금 뭐, 뭐라고…?
“??????”
백선제의 이해가 폭발했다.
백선제의 표정 위로 수없는 물음표가 찍혀 떠올랐다.
아, 아니. 이게 지금…?
“...자네, 혹시 미, 미친 겐가?”
백선제는 저도 모르게 이런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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