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가 병실에 내려앉았다.
병실의 공기는 싸늘해지다 못해 얼어붙어 갔다.
한민아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이민정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남자.
그 남자가 시우라는 점에서 한민아는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한민아를 가장 당황시킨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병실 앞에서 서 있는 채린.
“......”
채린은 아무 말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서늘한 냉기가 깃든 눈으로 이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소의 채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표정하고, 무덤덤한 표정.
그러나 감정이 없지는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지금 채린의 무표정은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무표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싸늘함이 채린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채, 채린아…?”
한민아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제가 무슨 실수라도…?”
이민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 왔다.
그리고 당연히 이민정이 실수한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채린의 행동은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범주에 속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걸까.
핫, 하는 놀람과 함께 채린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어붙을 것만 같던 냉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죄송해요.”
채린이 이민정에서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데 방금 그 말씀은 사실인가요?”
채린이 이민정에게 바로 물었다.
“어떤 말씀을 말하시는 건지….”
“시우 씨께 관심이 있다는 말씀이요.”
채린의 말이 몸쪽 꽉 찬 직구로 들어왔다.
그 때문인지 이민정이 살짝 당황해 보였다.
“아, 그건….”
살짝이 아니라 꽤나 당황해 보였다.
새하얀 이민정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냉소적이었던 이민정의 분위기는 이제 완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이민정은 결국 그에 따른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되려 충분한 답이 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묘한 분위기가 병실에 내려앉았다.
아까와는 달리 냉혹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한민아는 차라리 방금 전의 싸늘한 분위기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채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자리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들려온 채린의 목소리.
“어, 어?”
“두 분이서 할 일이 있으셨던 거 아니셨어요?”
“아… 그렇지…?”
한민아는 멋쩍게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리고는 슬쩍, 채린의 눈치를 살폈다.
한민아에게 채린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던 조카였다.
뭘 하든 귀엽게만 보이던 채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일까.
“혹시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요? 제가 다시 나가 있을까요?”
오늘은 채린이가 조금… 무서웠다.
한민아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응? 아, 아니야. 어차피 우리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그, 그렇죠? 이민정 팀장님?”
“아, 네. 그렇습니다만.”
이민정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사님과 팀장님이 같이요?”
그러자 다시 들려온 채린의 물음.
채린은 한민아와 이민정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시군요.”
채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평소 채린과 다를 바 없었다.
무덤덤하고 무표정한 모습.
그런데 왜일까.
어떤 배신감…?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한민아가 이민정과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
그 사실에 채린이가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아니야, 채린아. 그냥 일 때문에 같이 나가려는 거야. 오해할 만한 건….”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그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더 무서웠다.
“그리고 오해라는 건, 어떤 오해를 말씀하시는 건지?”
채린의 물음에 한민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건 한민아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은가.
사실로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민아가 아무런 답이 없자 채린은 다시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
한민아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또한 여기에 더 있다간 조카에게 미움받을 것만 같았다.
보다 정확히는 한채린과 이민정.
이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그럼. 잠깐 나갔다 올게. 쉬고 있어 채린아. 가, 가요. 팀장님.”
한민아는 이민정을 끌어당기듯 병실 밖으로 나섰다.
* * *
한관국의 자택으로 향하는 길.
한민아는 고급 세단의 뒷좌석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한관국의 체포 혹은 SH그룹의 앞날에 관련한 것이 아니었다.
한민아는 슬쩍, 옆자리에 앉은 이민정을 바라봤다.
‘이민정 팀장님이 관심 갖는 남자가 하필 시우라니….’
한민아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한민아는 큰 걱정이 없었다.
그러니까 채린과 시우가 사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채린이 정도면 둘이 조만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능력이면 능력.
채린은 그 어느 것 하나 꿀리지 않았다.
그나마 있다면 성격을 꼽을 수 있었다.
여자로서의 매력이 아주 조금 없기는 했다.
그런데 정말 아주 쪼금 없을 뿐이었다.
그것만 빼면 채린이는 최고의 여자였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바라 마지않는 여자.
그렇기에 한민아는 결국은 채린과 시우가 이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보다 정확히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는 이민정이 그렇게 만들었다.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능력이면 능력.
이민정 역시 그 어느 것 하나 꿀리는 것이 없었다.
물론 외모적인 부분은 채린이가 한 수 위였다.
동시에 능력도 채린이가 한 수 위였다.
배경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이민정은 여자로서의 매력이 있었다.
아까 전,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워 하던 이민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채린이와는 달리 이민정은 어느 정도의 애교가 있었다.
여자로서의 매력은 이민정이 몇 수는 위였다.
그 순간.
“저, 이사님.”
이민정이 한민아에게 물어 왔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어떤 걸 말씀이세요?
“한채린 헌터님 말입니다.”
한채린 헌터?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민아에겐 상당히 어색하게 들려왔다.
“채린이가 왜요?”
“...맹시우 헌터님과 사귀는 사이이십니까?”
한민아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물론 시우와 채린이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실대로 말하자니 뭔가 불안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의 고민.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닐 거예요.”
한민아는 ‘아직’이라는 말로 답을 했다.
썸 정도는 타는 사이.
한민아는 그 정도의 뉘앙스를 풍겨 주었다.
그러자 휴.
이민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마치 백선제와 이민정이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에 한민아가 느끼던 감정과 엇비슷해 보였다.
“방금 뭐예요? 그 안도의 한숨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민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었다.
평소 특유의 냉소적인 얼굴로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이사님. 한관국 이사님의 자택에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이 들려왔다.
한민아는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 거대한 저택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검은 정장의 경호원들.
“참….”
한민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택에 가까이 다가가자 경호원 중 일부가 한민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한민아의 얼굴을 알아본 것일까.
“한관국 이사님께서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하려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경호원은 자리를 비켜서지 않았다.
뭐, 충분히 예상했던 일.
한민아가 슬쩍, 옆을 바라보자 이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서울 지부 시찰국의 가더 4팀장, 이민정입니다.”
그러면서 이민정이 가더 신분증을 앞으로 내밀었다.
신분을 확인한 경호원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가더는 사람들을 지키는 파수꾼이나 범죄자들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사람들을 위협하는 범죄자들을 단칼에 처단한다.
그리하여 불리는 이름, 인간 도살자.
“가, 가더 분은 어찌하여 이곳에…?”
묻는 경호원의 말이 떨려 왔다.
가더들이 인간 도살자라 불리나 저 정도까지의 반응을 보일 건 아니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어디까지나 파수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민정에게 저렇게 떨고 있다는 건 하나.
저들도 한관국의 범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서울의 재앙 사태에 대하여 한관국 이사의 참고인 조사차 방문했습니다.”
이민정의 답에 경호원들 사이로 큰 동요가 일었다.
“...죄송하지만 아무리 가더시라도 이렇게 함부로 자택에는….”
이민정이 경호원의 말을 끊듯이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었다.
한민아의 시야에서는 종이의 내용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구속 영장 어쩌고 하는 글자를 얼핏 볼 수 있을 뿐이었다.
“.......”
경호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이민정은 그런 경호원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도 그런 그녀를 막지 못했다.
막을 명분도 없었거니와 강제로 어찌할 수조차 없었다.
겉보기로는 여리여리한 여인이나 이민정은 팀장직의 가더다.
여기 있는 모든 경호원들이 달려들어도 이민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가시죠, 이사님.”
한민아는 이민정을 따라 저택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 온 한관국의 자택이자 저택.
저택 안의 풍경은 이게 집인지 운동장인지 모를 풍경이었다.
SH그룹의 이사가 거주하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왜인지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분명 아무와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거실 쪽에서 한관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관국은 거실의 탁자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민아야, 이 무슨 무례냐.”
한관국이 혀를 차 보이며 한민아를 질책했다.
한민아는 기가 차지도 않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야─.”
그러나 그 말은 끝내 내뱉어질 수 없었다.
다름 아닌 한관국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사내.
안경을 쓴 단정한 느낌의 사내.
한민아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민정수석 비서관께서 왜 여기에…?”
민정수석 비서관, 김민우.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민아 이사님.”
김민우가 한민아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 뒤를 이어 한관국이 혀를 쯧.
“수석 비서관님도 있는 자리에서 이 무슨 무례란 말이냐.”
한민아를 향한 비아냥 섞인 질책의 말을 내뱉었다.
* * *
화류정(花流亭).
여의도에 위치한 고급 식당.
실은 ‘고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식당은 아니었다.
고급이란 품질이 뛰어나고 값이 비싼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화류정은 단순히 값이 비싼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돈만 많이 있다고 화류정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
단순한 권력이 아닌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자들만이 화류정을 이용할 수 있었다.
3선 이상의 국회의원들부터가 그 입장 커트라인이라 볼 수 있었다.
돈을 초월하는 권력을 지닌 이들이 이용하는 곳이 바로 이곳, 화류정이었다.
그 때문일까.
화류정은 그들의 보호로 서울의 재앙 사태에서도 그 피해가 미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회장님. 손님께서 지금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화류정 전체가 한 사람을 위해 모조리 비워져 있었다.
단아한 복장을 한 화류정 여직원의 말.
SH그룹의 회장, 한태산은 몸을 단정히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풍스러운 한옥의 방문을 열자 넓은 마당의 잘 가꾸어진 연못과 풍취를 자아내는 늙은 소나무가 보였다.
“힘없는 늙은이 한 명 때문에 이럴 필요는 없네만.”
그 사이로 들여오는 노쇠한 목소리.
한 명의 노인이 화류정의 마당을 가로 질러 걸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태산은 그 노인을 향해 90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 한태산의 모습에 화류정의 직원들이 살짝, 놀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태산이 누구란 말인가.
정권을 붙잡으려거든 한태산을 붙잡아라.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한태산의 존재는 거대했다.
농담이 아니라 한국에서 한태산보다 거물은 없었다.
따라서 지금 한태산의 90도 인사는 되려 한태산이 받아야만 하는 종류였다.
하지만 마당을 가로지르는 노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헉…!”
“헙…!”
화류정의 직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태산이 저렇게 90도로 인사를 하고 있는 존재.
“지금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늙은이에게 너무 과한 예의가 아닌가.”
검선(劍仙), 백선평.
백선평은 혀를 한 번 쯧 차 보였다.
비록 예전과 같은 강대한 기운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백선평의 업적마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인류를 구원한 13인의 영웅.
가진 바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사람들을 살린 고결함.
“오랜만에 가볍게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을 뿐이거늘.”
백선평은 여전히 백선평이었다.
“제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백선평은 다시 한번 혀를 차 보이고는 한태산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자리한 두 사람.
“으, 음식을 내, 내오겠습니다….”
매일같이 거물급 인사들을 대하는 화류정의 직원들임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선평과 한태산.
이 두 사람 앞에서 화류정 전체가 긴장을 해 보였다.
직원들이 물러간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한태산은 말없이 백선평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르…..
잔에 술이 떨어지는 소리와 술 향이 퍼지는 가운데.
“어째, 자네나 나나. 자식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건 매한가지인 모양이야.”
술을 따르던 한태산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백선평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해 보였다.
한태산의 첫째 아들, 한관국.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의 정적.
“어떻게 할 생각인가.”
백선평이 한태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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