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11화 (11/120)

치팅데이 11화

2. 첫키스(5)

“어디.”

떡갈비와 수란은 평범하게 맛있었는데 의외로 미역국이 감동을 주었다.

미끈거리는 미역 사이에 숨어 있던 소고기가 너무나 부드러워 깜짝 놀랐다.

보통 미역국에 들어간 소고기는 질기거나 기름이 너무 많아서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이 집에서는 질 좋은 고기를 넣는 모양이다.

맛이 깊다.

“여긴 미역국도 맛있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해장이 되는 기분이다.

밥도 말아 먹으면 참 좋겠는데, 당이 많이 오르는 흰쌀이라 애써 마음을 접었다.

앞서 먹은 음식들로도 아마 당이 상당히 올랐을 거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

“하아. 잘 먹었다.”

“괜찮지?”

“응. 진짜 맛있었어.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여기저기 사람 만나다 보니까. 예전에 광고 관련해서 미팅할 때 상대방이 여기서 보자고 하더라고. 그 이후로 종종 오지.”

사람을 많이 만나면 이런 점은 확실히 이득이다.

다른 사람의 맛집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후식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천혜향과 청포도를 갈아 만든 빙수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

이건 맛있다.

눈으로만 봐도 맛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안 먹어?”

차지찬이 빙수를 한 입 먹더니 입을 오물거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먹자고 했거늘.

이런 식당이라면 당연히 디저트가 남아 있을 텐데, 불찰이다.

“먹어 그냥. 운동하면 되지.”

“그치?”

이미 바닥을 보인 인내심 따위 내던지고 빙수를 크게 떠 먹었다.

앞서 여러 음식을 통해 풍요로웠던 입 안이 일순간 차갑게 식었다.

키위와 천혜향의 새콤한 향 아래 청포도의 달콤함이 혀에 스며든다.

상큼한 맛이 튀김, 구이, 떡갈비, 국으로 다소 무거워진 입과 속을 단번에 정리해 준다.

“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여러분, 이게 진짜 신기한게요. 디저트가 오늘 저녁이 끝났다는 느낌을 줘요. 저는 코스 요리 먹으면 그냥 여러 음식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집은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왜 그 순서로 나왔는지 너무나 명확히 알 것 같아. 나처럼 요리 잘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을 만큼요. 진짜 맛있어요.”

* * *

34살 먹을 때까지 가장 행복한 1시간이었다.

키스 뒤에 나왔던 한우 비장탄 구이와 담양식 떡갈비, 수란, 한우를 넣어 끓인 미역국에 그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디저트까지.

특히 마지막 빙수는 1시간 동안의 식사가 꿈처럼 느껴질 만큼 완벽하게 입 안을 정리해 주었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차지찬이 빌지와 카드를 넘기자 직원이 웃으며 물었다.

“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78,000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일시불로 해주세요.”

한 끼에 278,000원이라니.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10만 원 정도라고 하길래 두 사람 몫인 줄 알았는데 일인분 가격이었던 모양이다.

“잘 먹었습니다.”

매장을 벗어나자마자 차지찬에게 인사했다.

“됐어, 인마.”

“너무 비싸잖아.”

“잘 먹었음 됐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한 끼에 그 가격은 아닌 것 같아.”

“짜식 잘만 먹어놓고.”

“근데, 그거하곤 별개로 진짜 고마워. 나 정말 살 맛 안 났거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했는데 마음 같지 않더라고. 근데 너무 맛있는 거 먹으니까. 나도 가끔은 이런 거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힘이 나. 진짜 고마워, 형.”

“오바하지 마. 그리고 단 거 먹었으니까 집까지 걸어가.”

“……어?”

“단호박 수프랑 모찌, 빙수까지 마음껏 먹었으니 그 정도는 해야지.”

“그게 뭔 소리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차지찬을 보며 물었지만, 버튼을 누르곤 어깨를 으쓱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여기 여의도잖아. 나 구디역 살아.”

“알아. 얼마 안 걸려.”

“이 날씨에 걸어가라고? 나 아까 스쿼트한 거 잊었어? 다리가 안 움직여!”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 혈당 오르면 안 되는데.”

진짜 미친놈인가?

“앞으로 버릇 들여. 밥 먹고 바로 걸어야 혈당 덜 오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차지찬이 1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너 이대로 자면 내일 못 걸어다녀. 슬슬 걸어서 풀어줘야 해.”

“아니, 선생님. 그걸 미리 말씀하셨어야죠. 그런 거 알았으면 밥.”

“안 먹었을 거야?”

“먹었을 거야.”

안 먹기에는 너무 맛있었다.

“그럼 군말 말고 걸어. 검색해 보니까 5.6㎞밖에 안 되네. 1~2시간이면 가겠다.”

“2시간?”

“내려. 나 간다. 다음에 봐.”

차지찬이 1층에서 날 떠밀었다.

“형! 잠깐만. 중간까지만 데려다 줘. 어? 보라매까지만. 어? 지찬이 형. 형? 차지찬! 야!”

버튼을 몇 번 누른 끝에 차지찬은 혼자 지하로 내려갔다.

이 추운 날에.

길도 잘 모르는 여의도 한복판에 혼자 두고 말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빨리 가ㅋㅋ 더 늦어지면 춥다

└와 내가 반찬가게 야외방송을 다보네

└차지찬 개웃기넼ㅋㅋㅋㅋ

└진짜 갔엌ㅋㅋㅋㅋㅋㅋㅋ

└암 먹었으면 걸어야지

시청자들은 볼 것도 없이 신났다.

“여기서 버스 어떻게 타요?”

집까지 걸어가는 건 무리다.

적어도 근처까지만이라도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맞다.

└그걸 왜 알려줌?

└진짜 그러기만 해봐. 실망이야.

└응~ 구독 취소할 거야~

└멤버십 탈퇴할 거임~

└걸어 빨리

“이건 좀 아니잖아. 아니, 지금 얼마나 추운 줄 알아? 밖에 나가면 귀 떨어져.”

└안 떨어짐

└엄살 ㄴㄴ

└[하늘돼지 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집까지 걸어가면 3만 원.

└오

└ㅋㅋㅋㅋㅋ저 아저씨가 3만 원에 걸어가겠냐? 버스 타고 간다에 천 원 건다.

“하늘돼지 님 감사합니다. 나 어디로 가면 돼? 여기로 가면 되나?”

3만 원이면 걸어야지.

건물 밖으로 나서니 찬바람이 얼굴을 베는 듯하다.

“어우. 추워.”

이 추위와 고통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를 테다.

* * *

다음 날.

짐꾼 채널 대표이자 출연자인 차지찬이 늦은 오전에 출근했다.

스튜디오 작업실에 얼굴을 비춘 그의 시야에 키득거리는 직원들이 들어왔다.

“좋은 아침.”

“오셨어요?”

“아침부터 뭐가 그리 재밌어?”

차지찬이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찬용 씨 영상 보고 있었어요. 사장님 찬용 씨랑 이렇게 친하셨어요?”

안상규 PD가 물었다.

“친하지.”

망설일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다.

사적으로 자주 보진 못했지만 어려운 시절을 함께 극복한지라 심적으로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근데 그걸 왜 네가 묻냐? 알잖아. 반찬이 채널 처음 만든 거.”

차지찬이 안상규 PD에게 물었다.

안상규 PD가 입사했을 때는 이미 반찬용이 짐꾼 TV를 만들어 혼자 운영하고 있었다.

반찬용에게서 인수인계를 받은 안상규가 차지찬과 반찬용의 관계를 모른다니 의아했다.

“그거야 알죠. 근데 이렇게까지 친하신 줄 몰랐어요.”

“뭔 소리야?”

안상규 PD의 말에 차지찬이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함께 있던 직원들이 자리를 비켜주며 키득키득거린 탓에 차지찬은 눈썹을 모으고 모니터를 보았다.

“이게 뭔데?”

안상규 PD가 반찬가게 채널에 막 올라온 영상을 처음부터 재생했다.

어제 저녁에 방문한 식당을 배경으로 반찬용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이 오늘 나한테 키스를 가르쳐 줬어.

영상은 차지찬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이내 인트로 영상으로 넘어갔다.

차지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자식 이거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 어그로를 끈다고?”

차지찬이 황당해하며 직원들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소용없었다.

“표정들이 왜 그래?”

직원들은 대답 대신 웃음을 참을 뿐이었다.

“믿는 거 아니지? 봐. 끝까지 보라고. 반찬용이 헛소리한 거라니까?”

“정말요?”

“와.”

차지찬이 답답함에 가슴을 때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 영상을 내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찬용 씨 편집 일 정말 그만 받는대요?”

대표를 놀려서 만족한 직원들이 각자 자리로 돌아가자 안상규 PD가 말을 붙였다.

“받든 말든 뭔 상관이야. 지금 내가 얘한테 키스를 가르쳐 줬는데.”

안상규 PD가 피식 웃었다.

“아쉽네요. 이렇게 잘 만드는데.”

“잘하긴 뭘 잘해? 이게?”

“대표님도 끝까지 보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인트로면 안 볼 수가 없죠.”

“아오. 이놈을 그냥.”

차지찬이 콧김을 내뿜었다.

겉으로는 저렇게 화를 내도 모두가 장난으로 여김을 알고 있을 테니 안상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잘 될 것 같긴 해?”

“찬용 씨요?”

차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상규는 반찬가게 채널을 살피며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왜 전업하시려는지는 알 것 같아요. 편집이야 업계에선 손에 꼽히고. 감각도 있으시고. 전에 반야식경 나간 거 보니까 리액션이랑 접수도 좋더라고요. 어제 사장님하고 케미도 괜찮고.”

차지찬이 미니 냉장고에서 프로틴 음료를 꺼내 마셨다.

“근데 콘텐츠가 문제예요. 원래 먹방으로 채널을 키우셔서 지금 반찬가게 구독자들은 찬용 씨 먹는 걸 보고 싶어 하거든요.”

“그렇겠지.”

“그 사람들이 반찬가게를 계속 볼 이유를 만들지 못하면 아무래도 힘들겠죠.”

가만 듣고 있던 차지찬이 씩 웃었다.

“콘텐츠만 찾으면 성공할 거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게 얼마나 힘든데요.”

“어렵지. 나 운동 간다. 수고해.”

“네.”

차지찬이 사무실을 나섰다.

안상규는 이어폰을 끼고 반찬용이 업로드한 영상을 이어서 보았다.

구독 버튼이 이미 구독중임을 표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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