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15화
3. 부대찌개(4)
“찬용이는 요새 혈당 관리하느라 다이어트 중이고 오늘은 치팅데이라서 오랜만에 부대찌개 해주려 해요.”
주지승이 좀 더 덧붙여 소개했다.
두 사람이 나를 놀린 거나 방금 멘트까지 모두 나와 반찬가게를 홍보해 주려는 의도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찬용이가 햄 많이 넣은 부대찌개 좋아한다고 해서 준비해 봤는데 우진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나 미나리 넣은 거 좋아해.”
“크. 미나리 좋지.”
“국물이 깔끔한 게 좋더라고.”
“부대찌개에 미나리도 넣어?”
미나리는 삼겹살하고 같이 먹거나 전으로 부쳐 먹는 줄로 알았다.
부대찌개에 넣는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주지승이 고개를 저으며 과장되게 답했다.
“그럼. 미나리 넣는 부대찌개는 역삼동에 D식당이 유명한데 진짜 괜찮아. 부대찌개가 원래 무겁고 진하잖아? 미나리 넣으면 엄청 개운해져.”
“나도 거기 알아. 맛있어.”
백우진도 자주 간다고 하니 나중에 한번 가봐야겠다.
“신기하네. 난 처음 들어.”
“부대찌개도 계파가 워낙 많으니까. 이게 여러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나서 지역마다 특징이 있지.”
“미군 부대가 있던 곳에서 각자 발생했다고 들었어.”
백우진이 주지승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지. 의정부, 동두천, 송탄, 파주 이렇게가 유명한데 찬용이가 좋아하는 방식은 송탄식에 가까워.”
“햄 많이?”
“햄 많이. 끄흐흐흫.”
주지승이 갑자기 웃는다.
“왜 웃어?”
“아니. 너무 간절해서. 햄 많이 준비했으니까 걱정 마.”
다행이다.
“근데 언제 먹어? 지금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거 같아요.”
주지승과 백우진이 웃기 시작했다.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부대찌개 이야기 하고 먹기로 했잖아.”
백우진이 말했다.
“먹으면서도 할 수 있잖아. 아니면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먹으면서 들을게요.”
“아니 왜 이렇게 간절해.”
백우진이 또 웃는다.
“진심이니까!”
“므핳학핳핫학.”
“얘가 왜 이래? 농담 아니라니까? 나 배고파! 배고프다고! 양푼에다가 부대찌개랑 흰쌀밥 가득 담고 김가루 솔솔 뿌려서 비벼 먹을 거라니까?”
어이없게 웃어대는 백우진을 두고 시선을 옮기니 주지승도 웃음을 참고 있다.
“이게 웃을 일이야? 나 오늘 아침도 안 먹고 왔어. 현기증 나. 손 떨리는 거 안 보여? 밥 줘! 밥 주세요!”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보였다.
└아ㅋㅋㅋㅋ 다이어트 중에 부대찌개는 못 참짘ㅋㅋㅋ
└현기증 난댘ㅋㅋㅋㅋㅋ
└저 아저씨는 저번에도 그러더니 진짜 먹는 데 진심이넼ㅋㅋㅋ
└그냥 먹으면서 해 눈알 빠지겠다
└근데 진짜 배고픈데 음식 앞에 두고 얘기만 하면 현기증 나긴 함ㅋ
└누가 봐도 간절함
└연기 아님?
└저 손 떨리는 걸 연기로 하는 거면 일단 배우해야 함ㅋㅋㅋ
“방송 시작하기 전에 올려놔서 좀 더 끓여야 해.”
주지승이 안타까운 사실을 전했다.
“근데 진짜 좀 안 좋아 보이는데? 많이 어지러워?”
“어. 이렇게 오래 배고파 본 적 처음이야. 어지러워.”
“혈당 한번 재보는 게 좋겠다. 체크기 가져왔어?”
정말 어지러워서 주지승 말대로 혈당 체크기를 꺼냈다.
소독 티슈로 엄지 손가락 손톱 아래를 잘 닦고 바늘로 찔러 피를 내 검사지를 댔다.
5초 후 체크기 스크린에 숫자 111이 떴다.
“어?”
평소보다 혈당이 훨씬 낮다.
공복혈당 정상 수치가 100 이하니까 거의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아까 평소에 190 정도라고 하지 않았나?”
주지승이 물었다.
“어제 190이었어.”
“그럼 저혈당 증상이 맞네. 아침 안 먹었다고 했지?”
“응. 근데 정상 수치보다 높은데 이게 저혈당 증상이야?”
“정상 수치라도 평소보다 갑자기 떨어지면 저혈당 증상이 나타나.”
“……정상인데?”
이해가 안 된다.
“정상 수치보다 높아도 평소보다 급격히 낮아지면 당 충전하라고 신호를 보내.”
백우진이 알려줬다.
얘는 당뇨도 없으면서 이런 건 왜 아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럼 어떡해?”
“참아야지.”
“엉?”
“워낙 고혈당 상태로 오래 있다가 정상으로 돌아가니까 생기는 증상이야.”
“담배 끊을 때 금단 증상 같은 거야.”
주지승과 백우진이 번갈아가며 설명했다.
“진짜 저혈당이면 당분 섭취부터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냥 참아. 조금 있으면 밥도 먹으니까.”
“…….”
└폰저혈당 ㄷㄷ
└ㅋㅋㅋㅋㅋ폰저혈당이랰ㅋㅋ
└미친ㅋㅋㅋㅋㅋ얼마나 먹고 싶었던 거얔ㅋㅋㅋ
└원래 300 넘다가 111이면 진짜 노력했네
“맞아. 당뇨 여러분도 다 겪을 수 있는 문제고 찬용이가 지금 어지러운 거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증거예요. 오늘 부대찌개 맛있게 먹어도 되겠네.”
“지금 이게 원래 당이 높다가 줄어드니까 생기는 착각이라는 말이야?”
“응.”
“와.”
얼척이 없다.
지금 이 떨림이나 어지러움이 뇌의 착각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하니 무섭기까지 하다.
분명 느끼고 있는데.
손까지 떨릴 정도로 답답한데 몸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니 건강해지기 참 어렵다.
“괜찮아?”
백우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 응. 오히려 좋지?”
“엥?”
“혼자였어 봐. 손발 떨리고 가슴 쿵쾅거리는데 얼마나 무서워. 너랑 지승이 형한테 저혈당 증상이라고 들으니까 알았지.”
방송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졌다.
“그리고 솔직히 혈당 떨어지면 좀 더 먹어도 되는 거 아니야? 완전 개이득.”
“뭐래.”
백우진이 피식 웃었다.
시청자들도 웃어서 다행이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발생 지역? 계파?”
주지승이 물어서 내가 답했다.
“맞다. 지역 얘기가 나와서 생각났는데 난 찌개보다 볶음이 더 좋더라.”
“볶음?”
백우진과 같이 물었다.
“의정부에서는 O식당이 원조로 알려져 있는데 거기가 원래 부대볶음을 팔다가 찌개로 넘어왔거든. 그러니까 부대찌개는 볶음에서 시작된 요리지.”
“부대볶음은 처음 들어. 맛있어?”
“뭐라고 설명해야 좋지.”
주지승이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부대찌개의 맛을 농축시켰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흥미가 생긴다.
생각해 보면 부대찌개에 넣는 재료는 볶아 먹어도 맛있다.
“그럼 의정부는 볶음 위주야?”
“볶음도 팔고. 또 김치 넣는 게 의정부식 부대찌개 특징이지. 햄이랑 다진고기가 기름지니까 김치랑 같이 먹으면 맛이 깔끔해지거든.”
“O식당이라고 했나? 거기가 제일 맛있어?”
“글쎄. 원조기도 해서 유명한데 의정부 사람들한테 물으면 또 다른 데 얘기하는 사람도 많더라고. 맛집인 건 확실해.”
어느 지역이든 외부 사람이 더 자주 찾는 식당은 있다.
“반면에 송탄식은 스팸 같은 프레스햄이랑 소고기를 넣어. 육수도 사골육수를 쓰고. 맛이 엄청 깊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대찌개다.
“파주식은?”
백우진이 물었다.
“파주 쪽은 우진이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 사골 육수가 아니라 물이나 채소 육수를 쓰고 베이크드 빈스도 안 넣는 대신 쑥갓이나 미나리 같은 걸 넣어서 시원함을 강조하지.”
“두꺼운 소시지도 넣던데?”
“어. 브렉퍼스트 소시지라고 다른 지역 부대찌개에서는 잘 안 넣는데 파주에서는 많이들 넣어 먹어.”
“부대찌개 냄새다.”
코를 킁킁거리니 한창 대화를 이어가던 주지승과 백우진이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스튜디오는 문을 닫으면 밖과 완전히 차단되어 소리도 냄새도 전달되지 않는데 어떻게 냄새가 나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정말 나는데.”
억울함을 호소하려던 차 최미카엘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부대찌개 냄새가 확 풍겼다.
“준비됐어요.”
날 빤히 보던 주지승이 황당하다는 듯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여러분, 여기 아시죠? 완전 방음되는 곳인데 밖에서 나는 냄새도 안 들어오거든요? 이걸 맡네.”
“진짜 하나도 안 났어. 어떻게 맡았어?”
“……나는 걸 난다고 했는데 어떻게 맡았냐고 물으면.”
“개코네.”
“다듀?”
“야인시대.”
“어? 형 야인시대 좋아해?”
주지승과 백우진이 또 헛소리를 시작했다.
“아니, 밥 왔잖아요. 왜 자꾸 쓸데없이 죽이 잘 맞아?”
“나 오늘 이 형이랑 좀 잘 맞는 거 같아.”
“나도.”
“둘이 뭘 하든 관심 없으니까 빨리 밥이나 먹자.”
일어나서 최미카엘에게 상을 받았다.
책상 옆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두고 그 위에 큰 냄비, 개인용 그릇과 수저를 나눠주고 반찬을 놓기까지.
내 인생에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형 방금 되게 절도 있었어.”
백우진이 또 쓸데없는 말을 한다.
“우진아, 이걸 봐.”
냄비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 아래 그 모습도 영롱한 부대찌개가 보골보골 끓고 있었다.
“얘들이 이렇게 보골보골 끓고 있어. 꼭 초등학교 앞에서 날 보며 삐약삐약대던 병아리 같지 않니?”
“……아니.”
“나 데려가라고 앙증맞게 울던 병아리 보면 마음이 아프더라고. 지금 마음이 그때랑 똑같아. 이 빨간 햄을 보면 마음이 아파. 얼마나 뜨겁겠어. 당장 꺼내주고 싶지 않아?”
“응…….”
고개를 돌려 백우진을 보았다.
“밥상 앞에서 떠드는 거 아니야.”
“방송인데?”
“지금 방송이 중요해?”
국자와 앞접시를 들었다.
“이거 봐. 이게 부대찌개인지 스팸찌개인지 모를 정도로 꽉꽉 넣었네. 히이. 살라미랑 프랑크 소시지도 엄청 많아. 이거 만드신 지승이 형 노력은 생각 안 해봤어? 이 귀한 음식을 앞에 두고 딴짓하는 게 그게 정말 옳은 일일까?”
부대찌개를 덜어서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 준 주지승 앞에 두었다.
“나 지금 너무 놀라운 게 당면이랑 라면이 없어. 그거 넣어서 끓이면 국물이 너무 텁텁해지고 금방 쫄거든. 진짜 이 섬세한 배려 앞에서 우리가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하지 않을까?”
“으, 응.”
이번에는 백우진 앞에 두었다.
“난 그렇게 생각해. 방송 중요하지. 그치. 우리 본업이잖아. 근데 그거 다 뭘 위한 거야? 먹고 살려고 하는 거잖아. 일을 하려고 밥을 소홀이 하면 목적이 전도된 거 아닐까?”
내 몫을 덜어낸 접시를 코에 가까이 댔다.
향긋한 햄 내음을 맡으니 몸의 떨림이 더욱 심해져 몸서리를 치게 된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지승이 성호를 그으며 기도했다.
“이 형 조만간 절 쪽에서 항의받을 거 같아.”
“파계승 되는 거지 뭐.”
“스님 아니야.”
젓가락을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