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16화
3. 부대찌개(5)
부대찌개 국물이 밥알에 스며드는 모습이 몹시 선정적이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비벼 먹고 싶지만 김가루를 빼놓을 순 없다.
주지승이 건네 준 김가루를 얹으니 습기를 머금어 차분히 가라앉는다.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으로 스팸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하아.”
이 날을 위해 지난 일주일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뇨병 판정 전에는 일주일에 단 하루 외출하던 내가 매일 5㎞씩 걸었다.
주식이었던 피자와 치킨, 콜라를 끊고 현미밥과 닭가슴살, 우롱차로 연명했다.
빨갛게 볼을 붉히며 수줍어하는 이 어여쁜 스팸 한 조각을 먹는 이 순간을 위해 그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버텨냈다.
동경하던 선배가 손을 내밀었을 때 손에 난 땀을 바지에 닦아내듯 고인 침을 삼켜 입 안을 정갈히 하고 스팸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음.”
그래.
이 맛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너무나도 잘 아는 맛이라 그리웠던 스팸이다.
육질이 살아 있는 고기와는 달리.
잘게 분쇄하고 압축하는 정제 과정을 거친 이 퇴폐적이고 인공적인 식감이야말로 인류가 발전해 왔다는 증거다.
└표정 봨ㅋㅋㅋㅋ
└부대찌개에 뭘 넣은 거얔ㅋㅋㅋ
└저 정도면 거의 약 하는 거 아니냐?
└저번에 나와서도 비빔밥 먹고 저랬잖앜ㅋㅋㅋ
└개맛있어 보이넼ㅋㅋㅋㅋ
└아 점심 먹었는데
밥과 부대찌개를 잘 섞어 크게 한 술 떠먹었다.
국물을 잔뜩 빨아들인 밥알과 소시지, 배추, 양파가 혀와 이를 번갈아 자극하는데 그 와중에 딸려온 쑥갓향이 은은히 비강을 채운다.
“맛있다.”
옆에 앉은 백우진이 감탄했다.
“다행이네. 찬용이는 어때?”
주지승이 물었다.
“부대찌개가 처음 만들어진 시점이 6‧25전쟁 이후라고 알고 있어.”
“그치?”
“이 부대찌개는 전후 약 70년 동안 우리나라 식문화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상징하는 음식이야.”
“뭐랰!”
백우진이 웃으며 딴지를 걸었다.
“들어 봐. 이 고슬고슬한 밥을 짓기 위해 농부들이 얼마나 노력하셨겠어. 배추, 양파, 대파, 쑥갓을 신선하게 유통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간을 투자했고. 햄과 소시지를 이렇게 가득 넣어 먹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워지기까지는 또 어떻고. 게다가 그 모든 걸 사용해서 이토록 훌륭한 요리를 만드신 요리사도.”
“하핳.”
주지승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건 단순한 요리가 아니야. 작품이야. 이 울긋불긋한 국물 위에 쑥갓, 콩나물, 파, 다진고기, 햄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지 않아?”
문득 백우진의 영상을 편집할 때 봤던 그림이 떠올랐다.
“그래. 빈센트 반 고흐의 붉은 포도밭. 이건 반 고흐의 붉은 포도밭이야.”
└이 아저씨 약한 거 맞네
└뭔 소리얔ㅋㅋㅋㅋㅋ
└아니 뭔 말 하는지는 알겠는데ㅋㅋㅋ
└고작 부대찌개 가지고 뭔 고흐까지 나왘ㅋㅋㅋㅋ
└요샌 저렇게 과하게 리액션하는 거 별론데.
백우진이 부대찌개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칭찬이 너무 과해서 당황스러운데 찬용이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주지승이 나섰다.
“사실 쌀만 해도 품종개량이 어마어마하게 이뤄졌거든. 전후 직전이랑 지금 먹는 밥은 차이가 크지.”
“나 알아.”
백우진이 나섰다.
“벼 육종은 다수성, 양질성, 안정성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발전해 왔어. 1960년대에는 자포니카 품종의 근연교잡 중심으로 다수성, 즉, 많이 수확할 수 있도록 노력했어. 배고픈 시절이었으니까.”
설명충의 말문이 트였다.
“70년대는 다수성에 더해서 안정성, 즉, 벼가 건강히 자랄 수 있도록 품종을 개량했고 80년대 들어서야 양질성. 맛있는 쌀을 만들려고 노력했어.”1)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알아? 나도 몰랐는데.”
주지승이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거창 군청 홈페이지에서 읽었어.”
“거긴 왜 들어갔는데?”
“유튜브 콘텐츠 찾으러.”
└ㅁㅊㅋㅋㅋㅋㅋㅋㅋ
└농부세요?
└???: 유튜버 되려면 거창 군청 홈페이지 봐야 한다
└읽은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기억하는 건뎈ㅋㅋㅋ
└└ㅇㅁㅇ┐
└아무리 그래도 부대찌개가 거기서 거기지. 저 아저씨가 밥 생전 처음 먹는 것도 아니고 오바하는 것 같음.
“제가 일주일동안 오이, 당근, 양배추, 시금치, 현미, 닭가슴살만 먹었거든요?”
“그래. 찬용이 지금 식단 엄청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다이어트 해보신 분들은 아실 테지만 지금은 뭘 먹어도 맛있어요.”
주지승이 채팅창 분위기를 읽고 중재에 나섰지만 하려던 말을 멈출 생각은 없다.
“근데 걔들은 진짜 맛이 없어도 너무 없어. 진짜 먹다가 성불할 것 같다니까?”
“그것도 이유가 있어.”
백우진이 끼어들었다.
“오이에는 쿠쿠르비타신이라는 물질이 있는데 이게 쓴맛이 나거든. 오이가 해충이나 동물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 수단인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70년동안 쌀을 개량해 온 것처럼 오이는 3,000년 동안 맛없어 지려고 진화해 왔다고 할 수 있지.”2)
“……어?”
“아니, 오이가 생긴 지 3,000년밖에 안 됐어?”
“재배를 3,000년 전부터 했어. 추정이지만. 한국생업기술사전 보면 나와 있어.”
└나 방금 소름 돋음
└진짜 모르는 게 뭐얔ㅋㅋㅋㅋ
└저딴 걸 왜 알고 있엌ㅋㅋㅋ 전공도 아니면섴ㅋㅋㅋ
└100만 유튜버 되려면 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건가
“아니에요. 제가 똑똑한 거예요.”
백우진이 카메라를 보며 씩 웃고는 부대찌개를 떠 먹었다.
편집을 도와주면서 이리저리 아는 게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럴 때마다 소름 돋는다.
“이거 사실 다 먹은 뒤에 하려던 말인데 흐름상 계속하는 게 좋아 보이네.”
주지승이 오늘 나누기로 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려던 차 백우진이 입을 의문을 던졌다.
“근데 지승이 형 스팸 먹어도 돼?”
“되지? 왜?”
“스님이잖아.”
“스님 아니라니까?”
“대박 반전.”
알고도 묻는 걸 보니 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척한다.
“반전이라니! 아니, 어딜 봐서 스님이야?”
백우진이 산타클로스 코스프레를 한 주지승을 한번 훑어보더니 두 손으로 원을 그렸다.
민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스님처럼 보인다는 뜻 같다.
“염주 때문에 그래? 이거 장모님이 주셔서 차고 있는 거야! 너 알잖아!”
“염주보단 머리가. 악.”
백우진이 입을 가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ㄹㅇㅋㅋㅋ
└말 실수인 척하는 거 킹받넼ㅋㅋㅋㅋㅋ
└백우진 진짜 돌았낰ㅋㅋㅋㅋㅋ
주지승도 어이가 없는지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24만 탈모인들 비하하는 거야?”3)
“아니? 스님으로 보인다는 말이 비하일 수가 없지. 형, 혹시 860만 불교신자를 비하하는 거야?”
└미친ㅋㅋㅋㅋㅋㅋㅋ
└백우진 말빨 봨ㅋㅋㅋㅋㅋㅋ
└태극권 ㄷㄷ
└해명해! 해명해!
└[유명 유튜버, 860만 불교신자 비하]
└오늘 나무위키가 뜨겁겠구만
“그럴 리가.”
주지승이 산타 모자를 슬며시 벗고는 합장을 했다.
“소승이 잠시 농을 했을 뿐입니다.”
“그쵸?”
두 사람이 떠들어준 덕분에 방송 신경 안 쓰고 방해 없이 온전히 부대찌개를 즐길 수 있었다.
짜고 달고 매콤하고 기름진 이 음식은 몸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타락시키는 악마의 요리다.
“어? 벌써 다 먹었어?”
“고맙다, 설명충. 덕분에 집중할 수 있었어.”
└?
└부대찌개랑 밥 다 어디감?
└ㅁㅊ 저걸 다 먹었다고?
└집중할 수 있었댘ㅋㅋㅋㅋ 옆에서 저러는 데 잘도 먹네
“하시려던 얘기 계속하죠. 이제 들을게요.”
백우진과 주지승이 어이없어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하던 얘기 이어가면 아까 찬용이가 식문화 발전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이지.”
주지승도 한 술 떴다.
“부대찌개의 기원을 말할 때 보통 그냥 군부대에서 햄을 받아 만들었다고 아시는데 정확히는 음식물쓰레기를 받아 먹는 것에서 시작됐어요.”
“꿀꿀이죽 말하는 거지?”
백우진이 호응했다.
나도 이번 방송을 준비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그치. 전쟁 직후에는 먹을 게 워낙 없다 보니까 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조차 아쉬웠어. 업자들이 음식물쓰레기를 가지고 나오면 그걸 돈 주고 사 먹는데 심하면 담배꽁초도 나왔대.”
“먹을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진짜 안타까운 얘기지. 또 원래는 부대찌개라고 부르지도 않았어요. 군 보급품이 허가없이 민간에 뿌려졌으니 부대찌개라고 부르면 부대에서 나온 햄이라고 광고를 하는 거잖아.”
“그렇겠네. 그럼 원래는 뭐라고 불렀어?”
나도 아는 내용이지만 주지승이 말을 편하게 이어가도록 질문을 던졌다.
“아까 얘기했던 대로 음식물쓰레기로 끓였던 건 꿀꿀이죽이라고 했고 UN탕이라고도 부르다가 나중에 부대찌개 형태가 되었을 땐 존슨탕이라고 불렀지.”
UN탕은 UN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존슨탕이 그때 미국 대통령 이름이 존슨이라서 그랬다는 말이 있던데?”
또 한 번 질문을 던지자 백우진이 받았다.
“존슨 대통령 임기가 1963년부터인데 그때는 이미 전후 10년 뒤라서 시기가 안 맞아. 우리나라 최초의 부대찌개 식당이라고 알려진 데가 아까 얘기 나왔던 의정부 O식당인데 거기가 1960년부터 장사를 시작했으니까. 또 스팸 같은 게 정식으로 수입되고 나서는 존슨탕이라는 이름 대신 부대찌개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내 생각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
얜 진짜 가끔 인공지능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백우진 진짜 천재 아니냐?
└이태원 존슨탕 1대 사장이 방송 나와서 독일 이민 갔는데 자식들한테 소시지랑 야채 넣어서 탕 만들어 줬는데 그걸 존슨탕이라고 지었다고 밝힘.
└나도 봤음. 좋다 > 조타 > 존슨이라고 했음.
└좋은탕, 조타탕, 존슨탕? 이상한데?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 어쩔 거임ㅋㅋㅋㅋ
└거기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다가 먹었다는 것도 사실이라던데ㅋㅋㅋ
“이이이이.”
채팅창을 확인한 백우진이 주먹을 떨었다.
자기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는 게 분한 모양이다.
성이 나서 볼록해진 뺨을 보니 조랭이떡 생각이 나서 냄비를 뒤적이니 하얀 떡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