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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데이-31화 (31/120)

치팅데이 31화

8. 밥이 좋은 이유(2)

차지찬이 왜 봉 무게에 집착하는지 알 만하다.

앉았다 일어나기는커녕 들고 서 있기도 힘들다.

“더 가벼운 건 없어?”

“덤벨 들고 해야겠네. 저기서 적당한 거 가져 와.”

고개를 돌리니 아령이 무게별로 줄지어 놓여 있다. 핑크색 중에서도 0.5㎏이라고 적힌 덤벨을 골랐다.

“야, 그건 아니지.”

“왜? 귀엽잖아.”

“너무 가벼워. 바꿔 와.”

“형, 진짜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핑크는 어른의 색이야. 몰라?”

“바꿔 와.”

“나 지금 완전 어른이야.”

핑크 덤벨을 들어보였지만 차지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진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하지 말고 바꿔 와.”

“박 대리님은 그날따라 일이 잘 안 풀렸어.”

“박 대리가 누군데.”

모른다.

“신입은 힘들다고 하소연하지 먼저 과장된 동기는 오늘도 은근히 잔소리하지 거래처에서는 발주를 잘못 넣었다며 물려달라지. 난리도 아니었어.”

“그러니까 박 대리가 누구냐고.”

“느즈막이 퇴근하는 길에 허기가 져서 슈퍼마켓에 들렀어. 맥주 하나 챙기고 적당히 안주 삼아 먹을 걸 찾다가 진열대 앞에 섰지. 편육, 닭다리, 핫바 뭘 먹을까 고민하는데 문득 분홍 소시지가 눈에 들어오는 거야.”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평소에는 신경도 안 썼어. 고기가 아니라 어육이랑 밀가루로 만들어진 가짜 소시지니까. 근데 힘들어서 그런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차지찬이 눈썹을 좁힌 채 날 보고 있다.

“어렸을 때 박 대리님은 따돌림당했어. 맨날 김치만 먹는다고. 김치 냄새 난다고. 참다 참다 어린 박 대리님은 엄마한테 조심스레 말을 꺼냈어. 다른 반찬 해주면 안 되냐고.”

“대체 몇 살인데 도시락을 싸고 다녀? 나도 급식 먹었구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박 대리님의 엄마가 돈이 없었던 게 중요하지.”

“저런.”

차지찬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너무 사 주고 싶었지. 마음 같아서는 매일 불고기 해주고 싶었지. 근데 그럴 수가 없었어. 그래서 엄마는 속상한 마음을 숨기고 반찬투정하면 안 된다고 했어. 착한 박 대리님은 조용히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리 죽여 울었어.”

차지찬의 입이 아치형이 되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갔어. 친구들은 또 놀렸지. 오늘은 무슨 김치 가져왔냐고. 어서 도시락 열어 보라고. 박 대리님은 교실에서 도망치듯 나왔어. 그 와중에 도시락은 챙겨 나왔어. 친구들이 남겨진 도시락을 열어볼 게 무서웠거든. 밖으로 나온 박 대리님은 운동장 구석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점심시간을 보냈어.”

차지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수업 종이 쳤지만 교실로 돌아갈 순 없었어. 배도 고팠어. 한참을 울었으니까. 근데 김치만 있는 도시락이 너무 싫었던 거야. 엄마가 밉기도 했고.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내던졌어.”

“그럼 안 되지.”

“근데 운동장 흙바닥에 흩뿌려진 도시락이 평소랑 달랐어. 김치랑 흰 밥 그리고 분홍 소세지가 담겨 있었던 거야.”

“아.”

차지찬이 입을 가렸다.

“단칸방에서 사는데 아들이 우는 걸 모를 리가 없잖아. 고기로 된 소시지를 사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싼 분홍 소시지라도 계란물 묻혀 정성스레 부쳐 주셨던 거야.”

“하아.”

“박 대리님은 운동장에 엎드려 울었어. 흙먼지랑 눈물로 범벅이 된 분홍 소시지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어. 어머니가 해주신 소시지 반찬을 버린 자기가 너무 싫었어.”

“아니야. 아니야.”

차지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슈퍼 앞에서 분홍 소시지를 본 박 대리님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어. 그때 먹었던 분홍 소시지를 추억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면서 한 손에 분홍 소시지를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어.”

차지찬이 미간을 잡은 채 눈물을 참고 있다.

“핑크가 왜 어른의 색인지 알아?”

“……왜?”

“회사 다니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이 분홍색만 보면 다시 일어날 수 있거든. 엄마 생각하면서 다시 힘낼 수 있거든.”

차지찬이 눈물을 보였다.

“나도 분홍 소시지를 닮은 이 핑크 아령을 쥐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차지찬이 다가와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알았어.”

즉석해서 만든 이야기에 속다니 단순한 인간이다.

“상규야, 핑크 덤벨 젤 무거운 게 뭐지?”

“5㎏이요.”

“그거 가져와. 찬용이가 그걸로 하고 싶대.”

“네.”

“……더 무거운 게 있었어?”

“그럼.”

“왜 먼저 말 안 했어?”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려고?”

“아니. 나 문과라서 감정이입 잘해.”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는데 안상규 PD가 5㎏짜리 분홍색 아령 2개를 가져왔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양손에 5㎏짜리 아령 하나씩 들고 스쿼트 100개를 했다.

스쿼트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은 만큼 꽤 익숙해졌는데, 아령을 드니 처음 시작했을 때 이상으로 힘에 부쳤다.

거기에 스플릿 스쿼트도 50개씩 하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1)

차지찬을 따라 정리운동을 할 즈음에는 정신이 혼미해서 무슨 동작을 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방송을 마친 뒤에도 한참을 쓰러져 있다가 겨우 일어났다.

매트 위에 땀이 흥건하다.

“엄살은.”

차지찬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씻고 나가서 고기 먹자.”

“고기?”

“운동했으면 보충해야지. 목살 잘하는 집 있어.”

돼지 목살은 의사도 추천했다.

살코기 비율이 높아서 단백질 섭취에 좋고 지방도 없으니 몸에 좋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닭가슴살처럼 퍽퍽하지도 않아 요즘 종종 즐기는 음식이다.

무엇보다 구워 먹는다는 점에서 닭가슴살이나 수육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매트를 닦기 시작했다.

땀을 다 닦아내고 일어나니 차지찬이 어깨를 툭 밀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악.”

“야, 야. 괜찮아?”

“왜 밀어!”

“기특해서.”

“뭐가! 뭐가 기특해!”

“뒷정리.”

“당연한 걸 가지고. 아, 쓰읍.”

차지찬이 손을 뻗었다.

잡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내 몸을 남에게 맡기긴 싫다.

얼마나 무거운지 아니까.

“야. 반찬, 삐졌냐?”

“안 삐졌어.”

“삐졌지?”

“안 삐졌다고.”

“삐졌잖아.”

차지찬이 들고 있던 텀블러를 뺏어서 안에 든 음료를 남김없이 마셨다.

“내 프로틴.”

“뭐.”

“내 프로틴! 운동하는 사람한테 프로틴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뺏어 먹어?”

“프로틴 중요한 거 알면서 사람 밀치면 안 된다는 건 몰라?”

투닥거리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여기는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다행이다.

예전에 잠시 다녔던 곳은 공간이 분리되지 않아 내 몸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보여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가서 씻을 수밖에 없었다.

“야, 근데 뒷정리하는 건 잘 배웠다.”

옆 라인으로 들어간 차지찬이 말했다.

“무슨 뒷정리?”

“땀 닦는 거. 기본인데 잘 안 지키는 사람 많거든.”

“그래?”

“그렇다니까. 기구 쓰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 땀 묻어 있으면 아오. 그냥.”

“그러게.”

옛날 생각이 난다.

“나 사실 예전에도 잠깐 다녔었거든. 헬스장.”

“진짜?”

“응. 살 빼고 싶어서.”

“근데 왜 그만뒀어?”

“거기 샤워장엔 칸막이가 없더라.”

“예전에 만들어진 곳은 대부분 그렇지 뭐. 그게 왜?”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지찬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 그러네. 좀 그렇겠다.”

내 알몸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

한때 뚱뚱했던 차지찬도 그 마음을 아는 것이다.

“요샌 개인 샤워실 있는 곳도 많은데 좀 비싼 편이거나 분위기 같은 게 좀 다가가기 힘들지.”

“응. 다닐 생각이 안 들더라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샤워실이 그러니까 집에 와서 씻었단 말이야. 버스 타고 다녔고.”

“엉.”

“그날 유독 땀냄새가 심했나 봐.”

옆 라인에선 물줄기 소리만 들렸다.

“아차 싶었지. 내가 잘못했고.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는데 누가 그러더라. 아오 돼지 새끼. 좀 씻고 다녀라.”

“미친놈이네.”

“내려서 한참을 서 있었어. 그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더라고.”

“그런 놈들은 입을 찢어놔야 해.”

“집에 와서 씻고 누웠는데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 한 내가 너무 한심한 거야.”

“아니야. 너 잘했어. 거기서 싸웠어 봐라. 그게 더 한심하지.”

“그치. 아는데 너무 분하더라고. 매일 있는 일인데도 자꾸 신경 쓰는 내가 점점 싫어지고.”

살이 찐 뒤로 무례한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버스에서 만난 남자처럼 직접적인 말과 행동을 하진 않더라도, 불친절한 태도나 한심하게 보는 눈빛, 귀찮은 표정 모두 상처가 되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니 그때부터 밖에 잘 다니지 않게 되었다.

일도 최대한 이메일로 처리했고 친구들이 오랜만에 연락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했다.

다시 같은 실수,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남에게 피해가 갈 행동은 최대한 자제했다.

“나도 안다. 그 기분.”

긴 침묵 끝에 차지찬이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있다. 실제로 겪어본 사람이니까.

“그래서 네가 지금 대단한 거야. 그 상황에서 자기를 지켜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끝도 없이 피어나는 불안 속에서 억울함과 자책감은 파도 파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울증이란 그런 것이기에 혼자서는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내가 생각해도 좀 장해.”

“그래, 인마. 다른 사람 연봉을 한 달 만에 벌고, 자기 몸 관리하려고 매일 운동하고, 네가 속한 업계에서 인정받잖아. 그것만 생각해. 너 지금 멋있어.”

“왜 그것만 생각해. 이따 먹을 목살 생각도 해야지.”

“좋다. 오늘 제대로 먹자.”

바닥도 없는 심연에서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이다.

소중한 사람과 맛있는 밥 한 끼 먹는 것.

돈을 버는 이유도 이를 악 물고 스쿼트를 하는 이유도 모두 그러기 위함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기꺼이 힘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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