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34화
8. 밥이 좋은 이유(5)
떠들다 보니 금방 다음 요리가 나왔다.
“활관자 아스파라거스와 파프리카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감사합니다.”
받고 보니 양이 쥐똥만 하다.
이걸 누구 코에 붙일까 생각하며 관자와 파프리카를 입에 넣었다.
탱글탱글한 관자 특유의 식감이 살아 있으면서도 너무나 쫄깃하게 씹히는데.
파프리카의 아삭함이 곁들어지니 입 안이 즐겁다.
너무나 재밌는 식감이라 가능하면 계속 씹고 싶다.
“관자 너무 맛있어.”
백우진이 감탄했다.
“그치. 파프리카랑 너무 잘 어울리는데?”
주지승과 차지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게 먹고 있다.
“아스파라거스 싫어하는데 이건 같이 먹는 게 맞다.”
백우진의 말에 동의한다.
관자만 먹어도 맛있지만 이 음식은 함께 딸려온 식재료와 함께 먹어야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신기하네.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데 식감은 또 살아 있지?”
차지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 이거 어떻게 한 건지 알아?”
백우진이 주지승에게 물었다.
“알기야 하지. 막 제거했고 두꺼우면 너무 질기니까 슬라이스해서 적당히 익혔을 거야. 비린내도 잘 잡았고. 보통 화이트와인 쓰는데 중식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네. 근데 이런 건 기술이라서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같은 레시피를 가지고도 점포마다 맛이 다른 이유다.
“궁보 전복 가리비와 그린빈스입니다.”
가리비에 이어서 나온 새우 튀김과 안심 스테이크도 완벽했다.
“신기한 게 엄청 맛있는데 하나도 자극적이지 않아.”
“그치. 진짜 간이 딱 적당해.”
“이렇게 먹고 속이 편한 곳이 잘 되더라고. 중국 음식이라고 하면 사실 우리 나이쯤 되면 불편하잖아.”
“맞네. 부대끼지 않고.”
저마다 감탄하며 소감을 나누는데 직원이 들어와 식사 메뉴를 물었다.
나와 백우진은 볶음밥, 주지승과 차지찬은 짬뽕을 주문했다.
짜장면을 단품으로 주문했으니 좀 더 여러 음식을 맛보고 싶은 마음에 짜장면을 피하게 되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반찬, 너 선 타는 거 신경 좀 쓰이겠더라.”
차지찬이 백반 토론 이야기를 꺼냈다.
“백반 토론?”
“어. 다들 웃고 나도 재밌는데 너 신경 쓰는 게 좀 보이더라.”
“그치. 그러지 않아도 우진이하고도 얘기했어. 좀 예민한 부분은 조심하자고.”
“생방송이라 말이 잘못 나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정말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방송을 재밌게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에 무리수를 둘 수 있는데, 그러다 보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잘 나가던 유튜버가 잘못된 발언 한 번으로 영영 복귀 못 하는 일이 왕왕 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자기검열을 해야 하고, 잘 모르는 이야기는 되도록 피해야 한다.
“그래서 대강 얘기는 나눠. 서로 무슨 소재로 얘기할지.”
차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하지 마. 형이 언제 나한테 노인학대범으로 몬다고 미리 말했어?”
백우진이 발끈했다.
“사탕이 딱딱한 걸 공격한다 했잖아.”
“상식적으로 사탕이 딱딱한 거랑 노인학대를 어떻게 엮어!”
전에는 몰랐는데 얘 놀리는 맛이 쏠쏠하다.
“실은.”
차지찬이 운을 뗐다.
“아는 PD님이 백반 토론 눈여겨보고 있거든.”
무슨 말인지 몰라 백우진과 함께 눈만 깜빡였다.
“콘셉트 대충 말해주면. 지역 돌아다니면서 유명한 음식 리뷰하는 거야. 심플하지.”
“응.”
“이걸 유튜버들 데리고 하고 싶나 봐. 나보고 아는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달라고 하길래 너 얘기했더니 백반 토론 재밌다고 하더라고. 자기가 준비하는 프로그램에 녹이면 재밌을 것 같다고.”
“……어?”
“자세한 얘기는 직접 나눠봐야지.”
“백반 토론을 해달란 뜻이야?”
백우진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아니. 백반 토론은 그냥 두고. 너희 둘 케미가 괜찮으니까 섭외하고 싶은 눈치더라. 웃기니까.”
“음.”
“뭘 그리 또 심각해지냐. 하고 싶으면 하고 말면 말지.”
차지찬이 부담을 덜어주려고 웃었다.
“백반 토론 그만큼 보는 사람 많이 있다는 거니까 거기에만 더 집중하는 것도 괜찮아.”
“양쪽 다 이점이 있지. 방송이 잘되면 효과는 분명 있고, 방송 경험 쌓는다고 생각해서 파일럿 들어가는 거 나쁘지 않아.”
주지승이 한마디 거들었다.
“근데 찬용이 지금도 일정 빡빡하잖아. 거기서 일을 벌렸다가 하나도 집중 못 하면 손해일 수도 있어.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잘되는 백반 토론 잘 꾸려나가는 게 맞지.”
“지승이 형 말이 맞아. 반찬 요새 뭐 장난 없잖아.”
“난 찬용이 형이 소화만 할 수 있으면 괜찮다고 봐. 활동 범위가 진짜 달라지거든.”
백우진도 나섰다.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 세 사람 모두 TV 방송 효과를 톡톡히 본 사람들이다.
주지승은 범란하는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하며 입지를 넓혔고 차지찬은 아예 고정으로 건강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다.
백우진의 경우에는 100만 유튜버라 해도 사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음에도 TV 강의를 다니며 얼굴을 알려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만큼 노출 빈도가 높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민을 이어가던 차.
직원이 다음 음식을 차려주었다.
“와. 이게 뭐야.”
“냄새 엄청 좋다.”
“이런 식으로 어울리네?”
짜장면 위에 얹어진 두툼한 소고기와 중앙에 자리한 계란 반숙이 몹시 폭력적이다.
더욱이 거리가 있음에도 비강을 치고 들어오는 트러플향은 짜장면만은 먹지 않겠다는 내 의지를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야, 그냥 먹어.”
차지찬이 본인 그릇을 가운데에 놓았다.
“아니야. 안 돼.”
“운동하면 된다니까? 너 오늘 이거 안 먹으면 일주일동안 스트레스 받을 텐데 그게 더 안 좋아.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가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데.”
“코티솔.”
백우진이 아는 척했다.
“그래. 코티솔이 분비되서 흥분하거든? 근데 스트레스 받는 환경이 지속되면 이 코티솔이 포도당, 지방산, 아미노산을 막 생성한단 말이야. 그러면 혈당이 올라서 식욕이 증가하는 거야.”1)
“지찬이 말이 맞아. 스트레스가 비만 원인 중 하나야.”
“그냥 하는 말 아니었어?”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면 그냥 이유를 몰라서 대강 얼버무리는 건 줄 알았다.
“전혀. 스트레스 덕분에 우리가 더 힘을 내고 발전할 수도 있는데, 적정선까지 받고 해소가 되었을 때 말이고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해로울 수밖에 없어.”
백우진이 주지승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으라고.”
차지찬이 자기 몫을 조금 나눠 주었다.
백우진과 주지승도 조금씩 나눠 주어 제법 많이 모였다.
짜장면.
난제 중의 난제라는 짜장면 VS 짬뽕도 내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짜장면을 처음 맛 보았던 6살 이후로 근 30년간 단 한 번도 짜장면을 배신해 본 적 없다.
나를 낳으신 분은 어머니지만.
내 뱃살의 20%는 중국집 요리사가 이루어 주셨다.
그렇게 좋아하는 짜장면이 가장 호화스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놓였다.
윤기 흐르는 아름다운 자태.
풍만한 육질을 자랑하는 스테이크와 건들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계란 반숙.
가장 고혹적인 향수 트러플 No.5.
경건한 마음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음.”
당황스럽다.
항상 함께였던 동네친구가 머리를 하고 새 옷을 입었을 때의 느낌이다.
웃으며 날 발로 걷어차던 말광량이는 온데간데없고 짙게 화장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웃고 있다.
트러플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맛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저항할 수 없는 감칠맛에 이끌려 펄 코트처럼 두른 소고기 스테이크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맛있다.
눈앞의 짜장면을 먹는 행위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체면 따위 내던져 버리고 허겁지겁 젓가락을 놀린다.
오직 탱글탱글한 계란 반숙만이 빙그레 웃으며 날 달랜다.
나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얌전해져서 계란 반숙을 조심스레 터뜨린다.
주륵 흘러나온 노른자를 조심스레 비벼 한 입 먹으니.
비로소 밀려드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미쳤다. 이거.”
백우진도 허겁지겁 트러플 짜장면을 먹었다.
“야, 너 가져 와.”
차지찬은 치사하게 나한테 준 걸 가져가려 한다.
“왜? 줬잖아.”
“먹어보니까 안 되겠어. 너 이거 먹으면 큰일 나. 죽어.”
“웃기지 마. 내가 먹을 거야.”
나도 차지찬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주지승이 크흠 헛기침을 하곤 젓가락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그러니까 내가 4개 시키자고 했지.”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지.”
“너 이거나 먹어.”
“나 짬뽕 싫어해.”
“그럼 처음부터 시키지!”
“말했잖아! 몰랐다고!”
“에휴. 유치해. 둘이 나이 합치면 70이 넘어. 왜 먹는 걸 가지고 싸워?”
백우진이 고개를 저으며 나와 차지찬을 한심하게 봤다.
“그럼 네 거 나눠주든가.”
나눠줄 생각은 없는지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한다.
* * *
분위기 좋은 식당에 맛있는 요리 그리고 마음 맞는 사람들까지.
381,000원이 아깝지 않다.
“아깝지…… 않아.”
계산을 하고 나오니 차지찬이 어깨동무를 했다.
“잘 먹었다.”
“잘 먹었엉.”
“잘 먹었어.”
백우진과 주지승도 인사를 해주었다.
“지승이 형, 다음에 진짜 운동 같이 하자.”
381,000원?
“좋지. 아예 찬용이 나갈 때 같이 볼까? 날 따로 잡을 필요 없이.”
381,000원이라고?
“좋지. 언제든지 와도 돼.”
381,000원이면 내 한 달 식비 절반이 넘잖아. 이게 맞아? 이래도 돼?
“찬용이는 어때? 괜찮아?”
381,000원?
“반찬?”
“어? 아, 응. 381,000원.”
순간 뭔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아.”
“크하학핳!”
차지찬이 큰 소리를 내 웃었고 주지승과 백우진도 킥킥댔다.
멋있게 딱 내고 티를 안 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내게 너무 큰 돈이었다.
“아무튼 그럼 다음 주에 봐.”
“준비해 놓을게. 우진이랑 반찬도 조심히 들어가고.”
“응. 빠이. 간다.”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떠나고 혼자 남았다.
겨울 바람이 아직 쌀쌀하다.
“걸어갈까.”
춥긴 해도 오늘 무리해서 먹었으니 집까지 걸어갈까 싶은 생각이 든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루 10분 이상 걷는 법이 없었던 내가 서울역에서 조원동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다니.
이게 다 차지찬의 요사스러운 혀에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 당했기 때문이다.
지도로 검색해 보니 3시간.
내 걸음 속도로 따지면 최소 3시간 30분에서 4시간은 잡아야 한다.
집에 도착하면 새벽이다.
“아…….”
조금 전부터 어지럽다.
아마도 혈당이 오른 탓이다.
내가 알기로 짜장면은 떡볶이와 더불어 혈당이 가장 많이 오르는 음식이다.
그런 걸 있는 대로 먹었으니 몸이 이상신호를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에휴. 걷자.”
내일은 방송도 없고 외주로 처리할 영상도 없으니까.
“참.”
스마트폰을 꺼내 어머니 계좌로 100만 원을 송금하고 전화를 걸었다.
-아들~
“어머니. 뭐 하고 계세요?”
-저녁 먹고 치우고 있지. 아들은?
“친구들하고 저녁 먹었어요. 방송 도와줘서 고맙다고.”
-그래. 사람이 서로 돕고 살아야지. 잘했어.
“그리고 어머니 계좌로 돈 좀 부쳤어요.”
-돈? 무슨 돈.
“저번 달에 방송 잘 돼서 기분 좀 냈죠.”
말씀이 없으시다.
아마 핸드폰으로 입금 내용을 확인하시는 모양이다.
-아이고. 찬용아, 뭘 이렇게 많이 보냈어?
“돈 많이 벌었다니까요. 옷도 사 입으시고 맛있는 것도 드세요.”
-엄마 돈 벌잖아. 이렇게 안 해도 돼.
“그냥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어우 추워. 저 들어갈게요.”
-그래. 잘 자고. 고마워.
“네.”
전화를 끊었다.
저녁을 크게 한 턱 내고 어머니께 용돈도 드리면서 순식간에 1,381,000원을 섰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다.
도리어 알 수 없는 만족감이 피어오른다.
돈이 없어 고시원 공짜 라면을 눈치 보며 먹던 시절.
블랙 기업에서 온갖 모욕을 받으며 무기력하게 살았던 사회초년기.
그리고 당뇨병 판정을 받아 먹방 유튜버로 살아갈 수 있을지조차 막막했던 얼마 전까지.
말로 풀어내기 힘든 여러 감정과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 죽는 거 아니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을 죽이기 좋은 타이밍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좌우를 열심히 살피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