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38화
9. 일어서다(4)
일요일.
모처럼 쉬는 날이라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배가 고파 냉장고를 열었다.
닭가슴살, 숙주 나물, 시금치.
“…….”
지긋지긋하다.
6주 동안 몇 끼를 제외하곤 대부분 이것들로만 식사를 해왔다.
어머니가 보내주셨던 반찬도 다 떨어져서 오늘은 정말 현미밥에 닭가슴살만 먹게 생겼다.
어제 배운 거 해볼까.
어제 주지승이 만들어 준 중화풍 계란 순두부와 토마토 계란탕이 생각난다.
어차피 산책도 해야 하니 겸사겸사 장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대강 옷을 주워 입고 근처 마트로 가 신선 제품 코너를 살폈다.
“순두부 있고. 계란.”
계란은 30알짜리 한 판과 10알짜리 중에 무엇이 좋을지 고민된다.
들고 갈 생각을 하면 10알짜리가 나은데, 하나당 가격을 생각하면 30알짜리가 훨씬 싸다.
생활비를 줄이기도 했으니 한 판을 사서 부지런히 먹어야겠다.
카트에 계란 한 판을 담고 소스 코너를 찾았다.
주지승처럼 부지런할 자신이 없어서 고추기름과 굴소스를 하나씩 샀다.
이제 남은 건 토마토 정도인데.
“……오.”
멀리서 빵 냄새가 흘러들었다.
갓 만든 빵 냄새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자애롭다.
이토록 마음이 평온해지니 말이다.
눈을 감고 천천히 냄새를 따라가니 어느덧 눈앞에 여러 빵이 펼쳐졌다.
크림 치즈와 카라멜 시럽, 아몬드를 잔뜩 넣어 만든 머핀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할인 가격이라고 해도 18개에 6,500원밖에 안 한다.
“미쳤다.”
한 끼에 6개씩 먹어도 세 끼를 챙길 수 있는데 6,500원뿐이라니.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에게 한 턱 낸 탓에 생활비가 빠듯한 지금으로서는 최적의 상품이다.
당뇨만 없었다면 말이다.
문득 눈을 돌리니 생크림 롤케이크가 눈에 들어 왔다.
폭신한 빵이 초콜릿 생크림을 두른 모습은 아기 고양이를 품은 검은 고양이처럼 사랑스럽다.
더욱이 빵 표면에 슈가 파우더도 잔뜩 뿌려져 있다.
꿀꺽-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안에 든 5가지 색상의 마카롱을 보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4개씩 줄지어 잠든 모습이 꼭 보석 같다.
“…….”
차마 집지는 못하고 바라볼 뿐이다.
이런 곳에서 만든 마카롱은 그렇게 맛있지도 않고, 먹을 거면 제대로 된 곳에 가서 먹는 게 낫다.
하지만 20개에 17,980원인데?
저것도 충분히 맛있을 텐데?
“아. 돌겠네.”
애초에 빈 속으로 장을 보러 나온 것이 잘못되었다.
고개를 세차게 젓고 토마토를 찾았다.
* * *
주지승이 만들어 준 요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 괜찮은 점심이었다.
속이 풀리는 토마토 계란탕과 계란 순두부를 먹었더니 밥을 먹지 않았음에도 퍽 만족스럽다.
대강 정리하고 누워 유튜브를 보고 있기를 얼마간.
벌떡 일어났다.
“진짜 미치겠네?”
5색 마카롱이 눈에 아른거린다.
마카롱뿐만 아니라 우유 크림볼과 호두파이, 치즈케이크, 떠먹는 티라미수까지 빵 코너에 있던 모든 제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런 상상을 하니 이상하게도 배가 고파진다.
점심 먹은 지 고작 2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미치도록 배가 고프다.
“아.”
이런 게 짝사랑일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본 적 없지만, 자꾸만 생각 나고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지금 이 기분이 짝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뭐 있는지 보기나 할까.”
주문만 안 하면 되니까.
배달 어플을 열어 배달 가능한 빵집을 검색했다.
“앙크림단팥. 하아. 맛있겠다.”
그냥 단팥빵도 맛있는데 크림까지 들어간 아주 흉악한 녀석이다.
부드러운 크림과 팥소가 어우러지는데 고소한 빵과 우유까지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거기에 일반적인 크림단팥빵보다 크림이 훨씬 많이 들어 있으니 맛이 없을 수 없다.
“……아니야.”
모르긴 해도 빵에다가 팥소에 크림까지 혈당이 엄청나게 높아질 거다.
아직 내 이성이 제 기능을 하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사라다고로케?”
튀긴 빵 사이에 추억의 샐러드를 넣다니.
어릴 적 시장을 따라 나서면 어머니가 가끔 사 주셨던 케찹과 마요네즈로 섞어 만든 양배추 샐러드를 고로케에 넣었다.
이건 무조건 맛있다.
“아니야. 아니야.”
정신차리자.
오늘은 치팅데이가 아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참았는데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걸 되돌릴 순 없다.
“……어제 건강한 거 먹었잖아.”
생각해 보니 치팅데이인 어제 너무나 건강한 음식을 먹었다.
토마토 계란탕과 계란 순두부 모두 당을 높이는 요리는 아니다.
“당 먹는 날이라고 그랬구나.”
그래.
생각해 보면 금요일에도 아이스크림을 참았고 토요일에도 건강식을 먹었다.
그럼 오늘 빵 조금 먹는다고 해서 탈이 나진 않을 거다.
“그래. 최대한 혈당 안 높이는 빵 먹으면 되지. 카스테라 정도면 완전 건강하지 않나?”
카스테라는 어머니들이 아이들 간식으로 내주는 빵이다.
설마 어머니들이 건강에 안 좋은 걸 자식에게 주실까.
오히려 내가 모르는 영양성분이 들어 있어 건강 음식일지도 모른다.
작은 카스테라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크루아상. 이건 진짜 건강식이지. 그냥 빵이잖아. 유럽 사람들한테는 이게 밥인데 건강에 나쁘겠어?”
크루아상 2개를 선택했다.
“소금빵? 빵에 소금만 얹은 거야?”
이것도 괜찮지 않을까?
빵 자체가 혈당에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단당류가 들어간 마카롱보다는 괜찮으니까.
“식빵 좋네. 토스트 해 먹으면 맛있고. 통밀 식빵이면 건강에도 좋고.”
정말 오랜만에 배달 어플로 주문을 하고 누웠다.
곧 있으면 빵을 먹을 수 있단 생각에 설레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진짜 조금씩만 먹자. 그럼 돼.”
불안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짜장면을 먹고도 걸어서 혈당을 낮췄고.
지난 6주 동안 잘했으니까.
병원에서도 추이가 좋다고 했으니 조심하면 큰 문제 없을 거다.
* * *
오후 9시.
짐꾼 헬스장을 다녀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당뇨병 판정을 받기 전에는 스스로 불면증인가 싶을 만큼 자는 시간이 불규칙적이었고,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해 2~3시간마다 깨곤 했는데.
요새는 잠을 편하게 이루는 편이다.
아마 식습관과 운동을 하면서 차차 좋아지지 않았나 싶다.
반찬가게
@banchan2
구독자 18만 명
누운 채로 유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평소에도 수시로 유튜브 채널에 들러 댓글과 조회 수, 구독자 수를 체크하는데 요새는 볼 때마다 숫자가 달라져 있다.
그 재미에 빠져서 시간을 빼앗기는 걸 알면서도 새로 고침을 계속 누를 때도 있다.
└이걸 여기서 뒤집는다고?
└민초 미쳤다 ㅋㅋㅋㅋ
└백우진 카카오 얘기만 나오면 발작하네ㅋㅋㅋ
마음 같아서는 댓글 하나하나 하트를 눌러주고 싶건만 너무 많은 댓글이 올라와 벅차다.
“백반 토론이 확실히 다르네.”
반야식경 채널과 동시에 업로드되는 ‘반찬을 만들어 드립니다’와 마찬가지로 짐꾼 채널과 나눠 올리는 ‘언제까지 뚱할 거야?’도 반응이 좋지만.
현재 내 채널 성장의 주 원동력은 ‘백반 토론’이다.
반찬가게에만 업로드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네 편 모두 100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백반 토론을 업로드한 날이면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백반 토론 캡처 사진을 찾아볼 수 있고.
이렇게 댓글도 꾸준히 달린다.
여기서 하나만 더 터져준다면 급성장이 가능할 것 같다.
“…….”
일전에 차지찬이 전해준 방송국 PD 이야기가 마음에 걸린다.
비록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해도 TV 방송 출연 자체가 도움이 되긴 할 거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인터넷 방송과는 다른 환경을 미리 경험할 수 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아이템인 데다 무엇보다 백우진과 함께다.
혼자 출연하는 것보단 긴장이 덜할 거다.
“하는 게 좋겠지.”
지금 기세를 이어나갈 좋은 방법이란 확신이 든다.
내일 백우진에게 출연 의향을 물어보고 모레 짐꾼 헬스장을 찾으면 차지찬에게 전달해야겠다.
고민을 끝내고 침대에 누우니 출출하다.
저녁을 점심에 만들었던 토마토 계란탕과 식빵 한 조각으로 간단히 먹은 탓이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며 마음을 달랬다.
이 시간에 먹으면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 모두 무너진다.
“…….”
맛있었지.
토스트기로 3분 동안 구운 식빵은 겉면이 바삭하고 안쪽은 쫄깃해서 잼이나 크림치즈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너무나 훌륭해서 먹어서 줄어드는 식빵이 아까울 정도였다.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꾸 잡생각이 나 옆으로 누웠다.
숨을 고르고 다시 잠을 청하는데 허기가 더욱 심해졌다.
하나만 먹을까.
아니야.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데.
내일 먹자.
하나 정도로 그렇게 크게 잘못되는 것도 아닐 텐데.
오만 상념이 치고 올라오니 잠이 깨버렸다.
“후.”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허기 때문에 잘 수가 없다.
“오늘 운동도 다녀왔는데.”
그렇게 핑계를 대면 끝이 없다.
“점심에 밥도 안 먹고. 저녁에도 식빵 한 조각밖에 안 먹었는데.”
차지찬과 주지승이 그랬다.
배가 고프고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나는 이유는 부족한 영양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혈당이 갑자기 낮아지면 식욕이 생기는 이유도 부족해진 당을 얻기 위함이라고 했다.
“오늘 탄수화물 너무 안 먹긴 했지.”
불을 켜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한 장만 먹자.”
토스트기에 식빵 하나를 넣고 기다리니 이내 빵 냄새가 부엌을 채웠다.
잼이나 크림치즈 없이 오직 빵 하나를 접시에 올려놓고 먹기 시작했다.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고소한 향.
바삭거리면서도 쫄깃한 식감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완벽한 음식이다.
오히려 잼이나 소스, 고기, 야채가 들어가면 빵 맛을 온전히 즐기기 힘드니 이대로 먹는 걸 좋아한다.
“딱 하나만 더 먹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한 장 정도 더 먹는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니까.
“……따악 하나만 더 먹을까.”
먹고 나서 걸으면 되니까.
“따아악 하나만 더 먹을까?”
좀 더 걸으면 되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이성이 남아 있음에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 번 물꼬를 튼 식욕은 계속되어 4장째 식빵을 먹은 이후로는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식빵 한 봉지를 다 비우고 마무리로 소금빵을 먹어 포만감을 느낀 뒤에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점차 깨닫게 되었다.
“…….”
지난 6주 동안 했던 일들이 모두 수포가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했을까.
조금만 참았으면 됐을 텐데, 왜 그 잠시를 못 참고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질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