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42화
10. 홍당무 엔터테인먼트(2)
차지찬의 소개로 WTV 예능국의 박상철 PD를 만났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서글서글한 인상이라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이지만 연출한 작품 모두 성공시킨 대단한 사람이다.
“인사 드려. 박상철 PD님.”
차지찬이 나와 백우진에게 인사를 권했다.
“안녕하세요. 반찬용입니다.”
“안녕하세요. 백우진입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상철입니다.”
“맞아요. 엄청 바쁜데 박상철 PD님이라고 하셔서 시간 냈어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백우진은 태연하게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박상철이 사람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영광인데요. 자, 들어들 가시죠.”
특이하게도 룸이 따로 있는 동태탕집에 둘러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박상철 PD가 좋아하는 단골집이란다.
“오늘은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요즘 두 분이 하시는 백반 토론 너무 재밌게 봐서요. 지찬이가 친하다고 하길래 밥이나 한번 먹고 싶어서 부탁 좀 했습니다.”
부담 갖지 말란 뜻이고.
오늘은 일 얘기를 꺼내지 말자는 의미도 포함하는 말이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태탕 상태를 확인했다.
무와 두부, 대파, 동태가 투박하게 들어가 있지만 잘 살펴보면 대단히 섬세하다.
동태 내장과 알을 충분히 넣어서 국물 맛이 깊을 수밖에 없고,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아 국물이 맑다.
들어올 때 보니 손님도 많아 재료 순환이 원활할 테고 자연스레 재고가 신선한 상태를 유지할 거다.
심상치 않다.
마지막 확신을 얻기 위해 깍두기 하나를 집어 먹었다.
주지승이 무는 겨울 무가 맛있다고 했는데 과연 아삭아삭 식감이 살아 있고 양념도 달짝지근하다.
깍두기가 맛있으니 이곳은 분명 맛집이다.
“PD님은 저보다 바쁘시잖아요.”
백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냥 밥 한 번 먹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 아니에요?”
백우진의 당돌한 태도에 박상철 PD가 잠시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시끌벅쩍한 밖과 이 방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이 정도 동태탕이면 시간 낼 만하지.”
분위기를 풀고자 동태탕을 가리켰다.
“봐. 머리부터 꼬리까지 한 마리를 다 썼고 내장이랑 알도 엄청 많아. 해산물 요리는 재료가 중요한데 손님도 많으니까 좋은 게 계속 들어오고 나가는 선순환 시스템이 돌아간단 뜻이지. 게다가 이 깍두기. 미쳤어. 겨울 무가 맛있다는 거 알아? 엄청 맵지도 않고 진짜 아삭하더라.”
말을 마치고 나니 박상철 PD, 차지찬, 백우진 모두 눈만 껌벅였다.
“맛있다고요……. 드셔 보세요. 원래 국물 요리 하는 데 오면 김치부터 먹는 게 예의인데.”
깍두기 하나를 더 먹자 박상철 PD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핫!”
“야, 너 별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엄청 적극적이네.”
“뭔 소리야?”
듣고 있던 차지찬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한다. 영문을 모르겠어서 되물으니 웃는다.
“어딜 가도 할 말이 있다. 내가 이렇게 음식에 진심이다. 말 잘한다. 그러니 나 써라. 그런 말이잖아.”
어색함을 풀려고 꺼낸 말인데 그렇게 보였나 보다.
“어우. 제가 못 보던 캐릭터라 잠시 실례했어요. 우진 씨처럼 직진해서 오시는 것도 그렇고 찬용 씨처럼 하시는 분도 그렇고.”
박상철 PD가 물을 마셨다.
“부담 가지실까 봐 천천히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그냥 할게요.”
차지찬이 동태탕을 앞접시에 뜨길래 손을 뻗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편하게 얘기 나누라는 뜻이다.
“유튜버들 모아서 맛집 찾아다니는 프로그램 준비 중이에요. 오래된 노포나 전통 시장 같은 곳들. 요즘 TV 보는 시청자들 연령이 높다 보니까 그쪽을 타깃으로 잡았는데, 유튜브에도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요새 젊은 분들이 그런 곳을 힙한 장소로 여기시는 것도 어느정도 기대하고 있고요.”
“우리 방송 보시는 분들 유입도 기대하시고.”
백우진이 한마디 얹었다.
“그렇죠. 그래서 섭외 명단을 추리는 중인데 백반 토론 재밌더라고요. 두 분 케미도 있고. 찬용 씨는 먹방하시던 분이라 워낙 표현을 잘하시고 우진 씨도 음식 관련 지식이 많더라고요.”
“맞아요. 저 아는 거 많아요. 저랑 찬용이 형 쓰실 거면 대본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하하핫핳!”
백우진은 처음부터 출연에 긍정적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걸 보니 아마 출연 조건을 좀 더 좋게 받으려는 모양이다.
“든든하네요.”
박상철 PD는 백우진의 말을 긍정하곤 있지만 태도를 바꾸진 않았다.
방금 그가 꺼낸 말은 차지찬에게도 대강 전해 들은 내용이다.
백우진이 출연 의사를 적극적으로 내비치니 조건 관련 이야기로 넘어가도 될 텐데, 아직 본인의 카드를 내보이진 않는다.
신중한 태도가 구르고 구른 베테랑이란 느낌을 준다.
“파일럿인 거죠?”
“네.”
“정규 편성이 되는 조건은요?”
“아직 조율 중입니다.”
여전히 수비적인 태도.
그러나 차지찬의 말에 따르면 사실상 정규 편성이 내정되어 있다고 한다.
15년 동안 매년 히트작을 만들었던 박상철 PD의 힘 덕분이다.
“아직 준비 중이지만 저랑 찬용이 형을 마음에 두고 계신 거네요?”
“하하. 그렇죠.”
“다른 분은요?”
“글쎄요. 아직은 없습니다.”
정말 아직 정해진 게 없는지.
아니면 아직은 프로그램 규모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를 일이다.
다만 출연자가 몇 명인지, 정규 편성이 되는지 등 작은 정보로 출연 조건을 어떻게든 추측해 보고 싶은 백우진에게 쉽게 정보를 내주진 않겠단 태도 자체는 분명하다.
다만 박상철도 백우진이 어느 정도 조건을 기대하는지 대강 파악하고 있을 거다.
방송 출연이 잦은 만큼 섭외비가 얼마나 필요한지도 알려졌을 테니까.
“아. 맛있다. 형, 여기 진짜 괜찮은데?”
차지찬이 동태탕을 먹고선 감탄했다.
“괜찮지? 자주 와. 싸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30,000원이면 괜찮네.”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으니 나도 입장을 정해야 한다.
백우진의 말대로 박상철 PD 정도 되는 사람이 시간이 남아서 나와 백우진을 만나진 않았을 거다.
분명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니 접근했을 테고, 우리가 실제로 어떤지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을 거다.
백우진은 TV매체에서도 여러 번 검증된 만큼 계약 조건을 중점으로 볼 것이고.
그러지 못한 나에 대해서는 박상철 본인이 준비하는 프로그램에 적합한지 파악해 볼 것이다.
나야 기회가 주어진다면 열심히 해볼 생각인데.
문제는 구독자 18만 명의 유튜버를 섭외하기 위한 출연료를 그리 높게 받긴 힘들다는 점이다.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묵은지 대리도 말했지만 아직 난 기대해 볼 만한 사람이지 검증된 카드는 아니다.
박상철 PD가 날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계약 조건을 일정 수준 이상 받긴 힘들다는 뜻이다.
“저는 PD님이 하시는 프로그램 출연하고 싶어요.”
“큽.”
이것저것 저울질하는 와중에 백우진이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덕분에 사레 들리고 말았다.
차지찬이 따라 준 물을 마시고 겨우 진정했다.
“저도 우진 씨랑 같이 재밌는 프로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근데 거기엔 찬용이 형이 있어야 해요.”
“왜 그런지 여쭤도 될까요?”
박상철 PD의 태도가 처음으로 바뀌었다.
“찬용이 형이 있어야 진정성이 있어요.”
백우진이 내 뱃살을 잡았다.
차지찬은 활짝 웃고 박상철 PD는 입을 씰룩였다. 웃음을 참는 거다.
너무 황당해서 화를 내는 것도 잊었는데 백우진이 말을 이어갔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 그걸 표현하는 어휘력, 문장력, 제스처 모두.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이 형이 제일 잘해요.”
“…….”
“그리고 저랑 찬용이 형은 같이 있을 때 시너지가 나요. 백반 토론 보셔서 아실 테지만 각자 방송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저는 말이 너무 많아서 듣는 사람이 피로감을 느끼는 걸 잘 몰라요. 찬용이 형은 그러기 전에 제 템포를 끊어줘요. 이상한 드립 치면서.”
박상철 PD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또 이 형도 하는 말마다 웃긴 건 아니라 가끔 재미없는 얘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받쳐줄 수 있어요. PD님도 확인하셨으니 케미라고 말씀하셨겠죠.”
박상철 PD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PD님은 평범한 아이템도 확실한 타깃을 정해서 효과적으로 연출하는 분이에요. 그런 PD님이 저랑 찬용이 형을 같이 쓰시면.”
백우진이 말 사이에 간격을 두었다.
“반응 있어요.”
성공할 것이다. 괜찮아 보인다. 가능성이 있다.
그런 추측과 기대 섞인 말이 아니다.
완벽한 확신 속에 나와 백우진이 왜 박상철 PD와 함께해야 하고, 박상철 PD가 왜 우리를 섭외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박상철에게 내가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내 가치를 높이고 있다.
배를 꼬집는 대신 이런 일을 해준다면 왼쪽 옆구리살도 대줄 수 있다.
“그리고 PD님은 그걸 이미 알고 계시고요.”
시간 낭비 하지 말자는 뜻이다.
박상철 PD는 가만히 있다가 벨을 눌렀다.
“네~ 뭐 필요하세요?”
“소주 2병 주세요.”
“네~”
술을 주문한 박상철 PD가 씩 웃었다.
“너무 잘 알고 계셔서 뭐, 따로 드릴 말이 없네요.”
백우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본인이 할 말은 끝냈으니 박상철이 어떻게 나올지 기다리는 듯했다.
“사실 이런 내부적인 일은 공적인 자리에서 진행해야 해서요. 대외비이기도 하고.”
“…….”
“근데, 뭐. 술 먹다가 실수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죠?”
박상철 PD의 능글맞은 행동에 백우진이 씩 웃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는 떠들고 다니면 안 되죠.”
박상철 PD가 박수를 쳤다.
“아유. 우리 마음이 너무 잘 맞는데요? 하하하!”
* * *
술이 제법 들어간 박상철 PD가 드디어 조건 이야기를 꺼냈다.
“파일럿 때는 크게 못 드려요. 근데 정규 편성 되면 원래 받으시는 정도는 드려야죠.”
아무리 친해도 백우진의 방송 1회 출연료까진 모른다.
굳이 물어본다면 알려주겠지만, 그런 사적인 부분까지 확인하고 싶진 않다.
백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찬용 씨는 어때요? 다른 방송 출연하신 적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음.”
박상철 PD가 숨을 길게 내쉬더니 고개를 들었다.
“마음은 충분히 드리고 싶은데 우리 회사 방침이 찬용 씨한테는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어요.”
“네.”
이미 예상했던 내용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네.”
“방송분을 제 채널에서 다뤄도 될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제가 리뷰하는 느낌으로요. 작게나마 프로그램 홍보도 될 테고요.”
“……음.”
사실 방송국 입장에서는 망설여질 수 있다.
본인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도 아니고 개인 채널에서 방송을 볼 수 있다면, 시청자가 나뉘게 된다.
우지니어스 같은 대형 채널에서 진행하는 경우는 종종 있는데, 그것은 조회 수가 보장되고 그 자체로 홍보효과가 있다고 판단해서 진행하는 일이다.
나처럼 중소 규모 채널에서는 다루기 힘들 수 있다.
“그렇게 해드려야죠.”
박상철 PD가 씩 웃었다.
“반찬가게. 우리 프로 방영할 즈음에는 뭐, 한 100만 구독자 되지 않겠어요?”
“네?”
“하하핫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