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50화 (50/120)

치팅데이 50화

11. 대기업(5)

“수고하셨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밖으로 나섰는데 묵은지가 인사를 해서 깜짝 놀랐다.

방송 시작하기 전에 먼저 퇴근하라고 얘기했던지라 여태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퇴근 안 하셨어요?”

“처리할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광고, 합방, 출연 제안 모두 정리해 메일로 보내두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대표님이 어떤 일을 선호하는지 확실히 몰라서 우선 모두 정리했습니다. 체크해 주시면 다음부터는 반영해서 선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묵은지가 고개를 숙이고는 가방을 챙겼다.

딱딱하긴 하지만 역시 믿음직스럽다.

서로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파악이 안 되어 있으니,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차근차근 알아가려 했는데.

묵은지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할 때는 들어오는 일을 가급적 모두 받았지만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다.

혹시나 문제가 생길 일은 사전에 차단하고, 그러지 않은 일 중에서 더 나은 조건을 선택해야 한다.

그 판단 기준이 아직은 모호한 만큼 차차 만들어 갈 예정이다.

“시간이.”

8시 30분이다.

서둘러 짐을 챙겨 짐꾼 헬스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묵은지가 보낸 파일을 열었는데 역시 이런 일을 하던 사람답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항목은 폰트를 볼드 처리하고 색상도 빨갛게 설정해서 읽기 편하다.

역시 협찬 문의가 가장 많다.

정식 계약을 맺고 광고를 하는 게 아니라 제품을 제공할 테니 리뷰를 해달라는 요청이다.

업체 입장에서는 광고 비용을 추가로 들이지 않아도 되고, 유튜버 입장에서는 콘텐츠 소재가 생기면서 동시에 평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양쪽 모두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사실 그동안 여러 차례 광고 문의를 받아도 시원하지 진행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평가다.

광고 문의를 하는 업체는 대부분 본인들이 원하는 멘트를 해주길 바라는데.

내 얼굴과 이름을 걸고 방송을 하는 이상 돈 몇 푼에 신용을 팔 순 없었다.

만에 하나 제품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몰매 맞을 테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제품을 협찬받아서 내 마음대로 품평하는 편이 낫다.

“저당 밥솥?”

중요 표시된 항목 중에 한 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한 기업에서 제안한 협찬인데 혈당 상승을 억제하는 밥솥이라고 한다.

이런 게 있었나?

그동안 현미밥만 먹어서 흰밥 좀 마음 편히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있었다.

만약 정말 괜찮은 제품이라면 써보고 싶다.

비고란에 저당 밥솥과 관련된 기사 두 개가 링크로 걸려 있다.

“……음.”

기사를 살펴 보니, 밥을 지을 때 전분이 빠져나가게 하여 당질을 줄이는 원리 같다.

다만 같은 양을 먹었을 때 효과를 볼 수 있고,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여 더 많은 양을 먹게 될 우려가 있다고 적혀 있다.

또 임상시험 결과를 날조한 불량 제품이 상당히 많아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1)

“효과는 있는데 수준 미달인 제품도 있다는 말이네.”

내게 연락한 업체를 믿어도 되는지 의문이다.

그들 말로는 밥이 질어진다거나 과정이 복잡했던 기존 저당밥솥의 단점을 개선했다고 하니 확인해 볼 가치는 있다.

“써 보고 결정해야겠는데.”

만약 업체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나 같은 당뇨인이나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제품이니 영상으로 남겨도 괜찮을 듯싶다.

혹여 실험 결과가 나쁘더라도 그 자체로도 괜찮은 리뷰 영상이 될 테니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해서 어제 방송분을 편집하고 있으니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뭐 먹지.”

그제와 오늘 느꼈지만 이 주변은 당뇨병 환자가 마음 놓고 찾을 식당이 없다.

내일부터는 도시락이라도 싸야 하나 싶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네.”

대답하니 묵은지가 어제 확인해 준 리스트를 들고 들어왔다.

“읽어 보셨어요?”

“네. 대표님이 광고를 어떻게 접근하시는지도 대강 파악했습니다.”

“당장에 수익은 덜할지 몰라도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이니까 조심해서 가려고 해요.”

“같은 생각입니다.”

역시 이 사람은 앞을 본다.

누군가는 들어오는 광고를 마다하는 날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간다고 혀를 찰 수 있지만 난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 생각한다.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웃고 즐길 수 있다.

반대로 부정한 행동으로 신용을 잃으면 무슨 말과 행동을 하든 소용없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이란 모두 그렇다.

“당분간은 어제처럼 전부 정리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명함 만들 건데 디자인 한번 볼래요?”

“아, 네.”

내 방으로 들어가 어제 만든 명함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고 명확한 1번 시안과 반찬통 모양의 2번 시안 두 개를 만들었는데 양쪽 모두 마음에 든다.

1번은 깔끔해서 어디에서나 꺼내기 쉽고 2번은 반찬가게를 잘 이미지한 느낌이다.

“어떤 게 좋아 보여요?”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1번입니다만 2번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왜요?”

“반찬가게의 이미지를 잘 나타냅니다. 특이해서 기억하기도 쉽습니다.”

“그럼 2번으로 가죠. 이제 은지 씨 직책을 정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 것 같아요?”

대답이 없어 고개를 돌리니 묵은지가 날 빤히 보고 있다.

조금 무섭다.

“인사권은 대표님께 있습니다.”

“둘 뿐인 회사인데요. 뭘.”

“둘 뿐이라도 회사는 회사입니다.”

그냥 넘어가진 않을 기세다.

“그러면 PD로 하죠. 지금 콘텐츠 기획은 전부 은지 씨가 맡고 있으니까.”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어깨를 으쓱이니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콘텐츠 기획을 지원했지만, 온전히 만든 경험은 없습니다. 제 능력 밖의 직책입니다.”

“앞으로 하나씩 만들면 되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묵은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마음을 접은 것 같은데, 해야 할 말을 삼키는 성격은 아닌 듯하니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은 둘이지만 나중에는 팀원도 생길 테고. 그 사람들하고 같이 멋진 팀도 꾸려요. 그때 가면 이름만 PD가 아닌 진짜 PD로 활동해 주시고요.”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다.

우지니 스튜디오를 가기 전에 인쇄소에 들러야 하니 서둘러야 한다.

“그럼 전 우진이네 다녀올게요. 늦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퇴근하시고요.”

“알겠습니다.”

* * *

백우진과 합방을 마치고 지하철을 탔다.

밤 9시가 되어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싶다가 어제 확인하지 못했던 광고 제안도 살피고, 오늘 방송 분량을 대강이라도 잘라내고 싶어 사무실을 찾았다.

“어?”

사무실 불이 켜져 있다.

설마 하며 들어서니 역시나 묵은지가 자리에 앉아 있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모습이 낯설다.

날 보더니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아니, 퇴근 안 하셨어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묵은지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모니터에 방송 콘텐츠로 삼을 만한 소재가 정리되어 있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저당 음식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테스트’하는 아이템이라든가 ‘나 VS 나’로 석 달 전 운동 영상과 교차편집을 해 내 운동능력이 얼마나 상승한지 비교하자는 아이디어 등이 적혀 있다.

내 기준으로 괜찮아 보이는 소재도 있고 다소 진부해 보이는 것도 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많은 아이디어를 짜냈다는 게 신기하다.

정말 머리를 쥐어뜯었겠구나 싶다.

단순히 발상만 적어둔 것이 아니라 이 아이디어를 영상화할 때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결과를 기대하며 주의해야 할 점 등도 함께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다.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묵은지를 보곤 말했다.

“은지 씨.”

“네. 부족한 부분은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려고요. 명심하세요.”

평생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려고 하니 어색하다.

그래도 최대한 무게를 잡고 말을 풀었다.

“앞으로 추가 근무 금지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겠습니다.”

“추가 근무 수당 드릴 돈이 없어요.”

“그 점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사업 초기니 이해합니다.”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에요.”

묵은지가 눈만 깜빡인다.

여전히 이해 못 하는 눈치다.

“이런 식으로 일하시면 쓰러져요. 하나뿐인 직원이 몸져누우면 우리 회사는 누가 지키겠어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무리하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알겠습니다. 업무 시간 내에 처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그럴 수 있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 길어도 되니까 업무 시간 내에서만 해요. 저는 은지 씨한테 뭐라 할 생각 없어요.”

묵은지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정말이에요. 애초에 이런 기획 처음부터 잘할 거라고 생각해서 함께해 달라고 말씀드린 거 아니에요. 누가 와도 서로 맞춰가야 하니까 적응 시간은 필요해요. 더군다나 안 하던 일인데.”

“…….”

“그렇게 부담 느끼지 말아요. 정말 약속해요. 뭐라 안 그래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내가 본 이 사람은 스스로 일을 더 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옆에서 보기에 안쓰럽게 보일 정도로 스스로를 내모는 스타일이다.

“은지 씨 지금도 너무 잘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기존 방송에서 몇 가지 차용해 왔습니다.”

알고 있다.

이쪽에서 몇 년이나 굴렀고 그전에 한 사람의 시청자로 온갖 방송을 즐겨 보았다.

묵은지의 아이디어가 독창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러나 기존 형식에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보강하면 좋은지, 내가 소화할 때는 어떤 장점이 생기는지 분석하는 눈만큼은 정확하다.

이렇게 무엇을 깊이 분석하는 경험이 쌓일수록 콘텐츠를 만드는 힘도 강해진다.

“처음에는 다들 이렇게 시작해요. 천재도 아니고 갑자기 세상에 없던 게 바로 나오겠어요?”

“…….”

“은지 씨는 분석하는 눈이 있으니까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잘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거고요.”

“그렇습니까.”

“네. 정말로요. 굳이 몸 혹사하면서 무리하지 않아도 정말 잘하고 있어요.”

돌아오는 길에 챙긴 명함을 꺼냈다.

“그건.”

“명함이에요. 회사 차렸다고 하니까 금방 만들어주시더라고요.”

한 장을 꺼냈다.

반찬통처럼 생긴 바탕에 묵은지 PD라고 선명히 적혀 있다.

“이건 좀 사족일 수 있는데.”

묵은지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제가 얼마 전에 파스타를 먹었어요. 두 그릇이나.”

“그렇습니까.”

“그전에는 식빵을 한 봉지 다 먹었어요.”

“자랑입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요. 좋긴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나쁘죠? 혈당이 높아졌으니까.”

“그렇군요.”

“아무튼 식욕 조절하기가 힘들어서 가끔 그렇게 폭주하게 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꽤 자책감이 심하게 들었는데.”

“…….”

“다음 날 몸무게 재보니까 그대로더라고요. 내가 왜 그렇게까지 자책했지 싶을 정도로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한 번 실수가 지금까지 공들여 온 일을 모두 망가뜨리진 않더란 말이었어요. 실수해도 괜찮다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그러니까 저도 은지 씨도 실수해도 괜찮아요.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서 홍당무 못지않은 대기업 만들어 봐요.”

내 딴에는 꽤 멋진 말이었는데 씨알도 안 먹히는 모양이다.

묵은지는 눈만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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