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51화
12. 백반따라(1)
WTV 소속의 박상철 PD와 준비 중인 ‘백반따라’ 촬영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TV 매체 출연은 처음인지라 마지막 사전 미팅을 가졌음에도 얼떨떨하다.
“나 떨려.”
방송국을 나서는 자동차 안에서 백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형이?”
“진짜로. 나 낯가린단 말이야.”
백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못 믿겠단 눈치다.
“사람 많은 데 가면 얼어서 아무것도 못해. 눈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내가 유일하게 안 가는 식당이 어딘 줄 알아?”
“어딘데?”
“서브웨이.”
“왜?”
“주문하는 게 어려워.”
“뭐가 어려워. 먹고 싶은 거 달라고 하면 되잖아.”
“말을 많이 해야 하잖아.”
“혼자 몇 시간씩 떠들면서 뭐래.”
“그건 쉽지. 혼자 말하는 거잖아.”
“뭐가 다른데? 방송할 때 시청자들도 있잖아.”
“사람 얼굴 보면서 말하는 게 쉽지 않다고.”
백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좀 믿을 만한 이야기를 해.”
“진짜라니까?”
“그런 사람이 개인 방송은 어떻게 하냐고.”
“안 보이잖아. 안 보이면 괜찮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단 둘이면 그나마 괜찮은데 사람이 늘어날수록 머리가 안 돌아간다.
“그럼 난?”
“너?”
“나보고는 어떻게 말하는데.”
“넌 무해할 것 같아서 괜찮아.”
백우진이 눈을 굴리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귀여우니까.”
대꾸하기도 싫어서 가만 있으니 백우진이 악 하고 소리쳤다.
“왜 이렇게 굳어 있어? 어차피 출연도 우리 둘만 하는데 뭐가 걱정이야.”
“PD님이랑 스태프들도 있잖아.”
백우진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냥 우리끼리 하던 대로 하면 된다니까?”
“하던 대로 너 때리면 되는 거야?”
유튜브에서는 선동과 날조로 혼구멍을 내주면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TV에서도 괜찮을까 싶다.
말도 곱게 해야 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뭐래. 형 토론 개못하잖아.”
지난 번 백반토론 광어 VS 우럭에서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졌다.
“그거 그냥 너 불쌍해서 한 번 져 준 거야.”
“웃기네. 아무 말도 못 했으면서.”
“야, 강원도에서도 우레기라고 부르는 거 보여줬으면 끝났어.”
“그럼 왜 안 보여줬는데?”
“너가 계속 뾰로퉁하게 있으니까 형으로서 양보한 거지.”
“형이 그럴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날 인간쓰레기로 만들지도 않았어. 토론 지기 싫다고 사람을 아동학대, 노인학대범으로 모는 인간이 양보는 무슨 양보.”
들켰다.
“근데 형.”
“응.”
“녹화날에도 그러고 올 건 아니지?”
“뭐가?”
신호를 받아서 운행을 멈춘 백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한번 훑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도 TV 나오는데 머리도 자르고 옷도 제대로 입고.”
“옷 제대로 입었잖아.”
몸을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해 4XL 사이즈 후드티와 고무줄 바지를 즐겨 입는다.
또 검은색이 날씬해 보인다고 해서 외투도 상의도 바지도 모두 검은색이라 완벽한 코디라고 할 수 있다.
“음.”
“신호 바뀌었다.”
차를 몰기 시작한 백우진이 전방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옷은 없어? 맨날 입잖아.”
“너 말 이상하게 한다? 맨날 입긴 뭘 맨날 입어. 매일 바꿔 입는구만.”
“똑같은데? 형 영상 댓글란에도 이 사람은 왜 항상 똑같은 옷 입냐고 묻는 사람 있잖아.”
“생긴 게 비슷해서 그래. 다 다른 옷이야.”
백우진이 숨을 세게 내뱉었다.
오늘 한숨을 자주 쉰다.
“안 되겠다. 형 집으로 가지?”
“응.”
“내가 좀 봐 줄게.”
“뭘?”
“옷 봐준다고.”
잠시 후 집에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옷장을 열어젖힌 백우진은 눈썹을 잔뜩 찡그리곤 날 노려보았다.
“귀신이야? 저승사자야? 아니, 진짜 검은색만 입어? 다른 색 없어?”
“날씬해 보이는 색이잖아. 나도 패션 좀 알아. 밝은색은 부해 보인대.”
“형은 그냥 뚱뚱해서 효과 없어. 멀리서 보면 그냥 검정 눈사람이야.”
“말넘심.”
너무 놀라 벌린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백우진은 신경도 안 썼다.
“뭐 입고 가려 했는데?”
“야, 상처받았다고 하는데 들은 척이라도 해라.”
“응. 아닌 거 알아. 빨리. 그래서 뭐 입으려 했냐고.”
“이거.”
반찬용이 호랑이 얼굴이 커다랗게 박힌 검은색 맨투맨을 꺼냈다.
백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왜? 별로야?”
호랑이 얼굴이 제법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귀엽게 나온 내 배 덕분에 호랑이 주둥이가 튀어나와서 좀 더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여 좋아하는 옷이다.
“그 옷 입고 클러치 가방만 들면 딱 동네 일수꾼이야. 치워.”
나름 패셔너블하다고 생각해서 아껴 입던 옷이었는데 건달처럼 보인다니 또 상처받았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건 뭐야.”
백우진이 내가 좋아하는 옷을 들었다.
“아, 그거 촉감 좋지?”
“목 다 늘어났잖아. 잠옷이야?”
“아니…… 기분 좋을 때 입는 건데.”
“버려.”
백우진이 옷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야.”
“진짜 이런 것밖에 없어? 하다못해 다른 색이라도. 어떻게 그 흔한 셔츠 하나 없냐? 형 회사 다닐 때 입던 옷은?”
“다 버렸지.”
“왜?”
“작아서…….”
백우진이 날 보더니 딴청 부린다.
“그래서 진짜 다른 색 옷 없냐고.”
“있어.”
“어디?”
뭔가 기분이 이상하긴 한데 백우진이 너무 강하게 나오니 어쩔 수 없이 얇은 옷을 정리해 둔 박스를 꺼냈다.
열어 보이니 녀석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사람이 어떻게 검은색 옷만 있어. 형도 사람이었던 거야.”
맨 위에 놓인 하얀 와이셔츠를 들어올린 백우진이 날 뱀눈으로 쳐다본다.
“왜?”
“이거 왜 민소매야?”
“살 찌니까 겨드랑이가 좀 불편하더라고.”
백우진이 겨드랑이쪽을 살피곤 물었다.
“그래서 잘랐어?”
“응. 편해. 어차피 밖에 입고 나갈 것도 아니고 방송할 때 입는 거니까. 반응 괜찮았어.”
백우진이 셔츠를 또 한 번 내팽겨쳤다.
조금 전에 던진 것과 같이 주섬주섬 줍는데 방바닥에 떨어지는 옷이 하나씩 늘어난다.
“버려. 버려. 버려. 버려.”
“야! 다 버리면 뭘 입으라고!”
“입지 마! 차라리 벗고 다녀.”
“그렇게 심해? 그 정도까진 아니지 않나?”
“아니긴 뭘 아니야! 정상적인 옷이 하나라도 있어야지. 이 천 쪼가리들은 대체 왜 모아둔 거야? 이건 뭔데!”
노란색 조끼를 들어보였다.
“그거 어머니가 맨날 칙칙한 옷만 입지 말고 밝은 옷도 사라고 하셔서 하나 샀어.”
“……뭐랑 같이 입었는데?”
방금 주운 민소매 와이셔츠를 들어 보이니 백우진이 조끼와 와이셔츠를 빼앗아 냅다 던졌다.
“야!”
“형,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고마워해야 해.”
“웃기고 있네! 남의 옷을 걸레 다루듯이 하는데 화가 안 나냐!”
“걸레보다 못 한 걸 입고 다니니까!”
백우진이 버럭 소리쳤다.
너무 단호하게 나오니까 내가 잘못한 건가 싶어 망설이게 된다.
“알기 쉽게 알려줄게. 만약에 형이 상의랑 하의를 둘 다 검은색으로 입는다고 쳐. 그럼 외투 정도는 밝은색으로 가는 게 맞아. 오케이?”
“…….”
“오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전부 어두운 계열로 하고 싶으면 소재라도 다르게 입어. 청바지 있네. 청바지에 면티, 코튼 재킷. 이런 식으로. 이해했어?”
“아니.”
“모르겠으면 외워.”
백우진이 또 옷을 막 꺼내더니 일어섰다.
“이렇게 죄다 반타 블랙 끼얹은 것처럼 어둡게 말고 톤을 좀 다르게 가져가. 상의랑 외투를 회색, 바지는 검은색 같은 느낌으로. 밝은 톤 2개, 어두운 톤 1개로 기억해도 돼.”
“…….”
“적어.”
“으, 응.”
백우진이 쫑알대는 말을 적다 보니 어느새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다.
하다하다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어느 시점부터는 옷을 던져주며 입어보라고 했는데.
내가 왜 이 한밤중에 패션쇼를 펼쳐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몸은 열심히 움직였다.
“너무 밋밋하다.”
“네가 입어 보라며.”
“으음~ 아니야. 이걸로 입어 봐.”
“또?”
“형, 나도 바쁜 사람이야. 이거 다 형을 위해서 하는 일이잖아. 내 마음을 그렇게 모르겠어?”
“……가스라이팅 경험담에서 많이 들어본 말 같아.”
“아니야. 형이 착각하는 거야. 빨리 갈아입어.”
“그치?”
“그렇다니까.”
나를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낸 백우진에게 고마우니까 1시간 동안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가 하는 것도 힘들지 않다.
“좀 돌아 봐. 바지 그렇게 올려 입지 좀 말고.”
“이렇게?”
“아니. 하. 형, 하기 싫어? 하기 싫으면 그만하자.”
“그런 게 아니라.”
“전국에 송출될 텐데 창피한 건 형이지. 아니다. 어머님은? 형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님은 얼마나 속상하시겠어. 진짜 이러면 안 돼.”
“아, 알았어. 다시 입을게.”
“……좋아. 다 좋은데. 칼라는 왜 올렸어? 완전 아저씨 같아.”
“아저씨 맞잖아.”
“요즘 누가 35살한테 아저씨라고 해. 한창 때지. 칼라 내리고 이걸로 입어 봐.”
“이제 그만 하면 안 돼? 나 한 20벌은 입은 것 같은데.”
“괜찮은 게 없으니까 이러지. 내가 뭐 형 괴롭히려고 이러는 것 같아?”
“조금.”
“맞아. 좀 재밌긴 해.”
“야.”
“그래도 잘 보여야 하잖아. 거지처럼은 보이면 안 되잖아. 예쁘게 보이면 좋잖아.”
“……그렇기야 한데. 그 말은 지금 내가 거지 같다는 뜻이야?”
“응.”
“이 미친.”
아웅다웅하며 옷 갈아입은 지 1시간 정도 흘러 몸도 마음도 지쳤다.
더는 못하겠단 심정으로 밖으로 나서자 백우진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괜찮아?”
“응.”
“진짜? 이제 된 거지?”
“응. 이제 그 옷 입고 옷 사러 가면 되겠다.”
“…….”
* * *
사무실은 묵은지 PD에게 맡기고 아침 일찍 WTV로 향했다.
당일치기라고는 해도 밤 늦게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라 오늘 개인 방송은 쉬어야 한다.
‘백반따라’의 첫 장소는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 주문진, 경포대 등 관광지가 많은 곳이지만, 동해시가 고향인 나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장소다.
최근에는 가보지 못해서 뭔가 달라진 점이 있을까 싶긴 한데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 찬용 씨?”
박상철 PD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니 박상철 PD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이야. 뭐 어디 갔다 왔어요? 인물이 달라 보이네.”
“아하하.”
2년 만에 미용실을 갔고 피부 관리도 받고 모처럼 옷도 사 입은 데다 새벽 같이 샵에서 메이크업도 받았는데 괜찮은 모양이다.
일주일 동안 백우진에게 시달린 보람이 있다.
“근데 우리 방송이 내츄럴한 거라서. 화장은 지우는 게 좋겠다. 괜찮죠?”
“……네.”
백우진 이 자식 오기만 하면 목을 비틀어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