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52화
12. 백반따라(2)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으니 백우진이 하얀 면 바지에 핑크빛 실크 셔츠, 어깨에 카디건을 걸친 채 나타났다.
선글라스까지 낀 모습이 꼭 부자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새끼 돼지 같다.
박상철 PD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뭔가 말하려다가 참은 느낌인데 추측하기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넘어간 느낌이다.
“안녕하세요.”
백우진이 방실방실 웃으며 인사했다.
“야, PD님이 화장 지우라고 하시잖아.”
“어? 정말요?”
백우진이 박상철 PD를 보며 물었다.
“그랬는데 지금 느낌도 괜찮네요.”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자연스러운 모습이 좋다던 양반이 말을 바꾼다.
전날 샵에 사정사정하고 웃돈까지 주면서 새벽 5시에 받은 화장을 지운 게 억울하다.
“그럼 설명드릴게요. 지금부터 두 분은 힘을 합쳐서 강릉 여행을 다녀오실 거예요.”
영문을 알 수 없어 백우진을 봤더니 녀석도 눈만 깜빡인다.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저희는 그냥 두 분 따라가기만 할 거예요. 어떻게 갈지, 가서 무엇을 드실지는 모두 두 분 자유입니다.”
사전 미팅 때 자유로운 여행을 추구한다고 듣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저희 강릉 모르는데.”
“지금부터 찾아보셔야죠.”
하다 못해 내가 혼자 방송할 때도 어느 정도는 계획을 짜놓는데, 유력 방송국 예능에서 이렇게 대책없이 나올 줄이야.
당황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여행에서 사용하실 수 있는 돈은 여기 들어 있습니다.”
박상철 PD가 봉투를 주었다.
열어 보니 만 원 지폐 10장이 들어 있다.
“10만 원으로 여행을 다녀오라고요?”
“네. 저희가 사전답사를 했거든요. 이 정도면 풍족하게 다녀오실 수 있을 거예요.”
“둘인데요?”
“PD님, 서울역에서 강릉역까지 가는 KTX만 1인당 27,600원이에요. 2명이서 왕복하면 110,400원. 이미 예산 초과되는데요?”
백우진이 항변했다.
“넌 KTX 가격도 외우고 다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고개를 끄덕이고 박상철 PD를 보았다.
“에이. KTX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찾아보시면 더 저렴하게 갈 수 있어요.”
“……어떡하지?”
“찾아봐야지, 뭐.”
별 방도가 없어 보여 스마트폰을 켰다.
오전 6시 30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품이 절로 나온다.
“KTX 말고 다른 기차는 없나?”
“몰라. 형, 버스 찾아볼래?”
“아. 그래. 시외버스가 더 싼가?”
“그럴걸?”
찾아보니 강릉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생각보다 많다.
6시 40분부터 간격을 두고 있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다.
“편도 21,200원인데?”
“그것도 비싸다.”
둘이서 왕복하면 84,800원이니까 강릉 안에서 걸어서 이동한다고 해도 식비로 쓸 수 있는 돈은 15,200원뿐이다.
장칼국수 두 그릇 먹고 나와서 커피 먹을 돈도 안 된다.
“아. 16,300원짜리 있다. 21,200원이 우등이네. 일반은 16,300원이야.”
“어디?”
백우진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둘이서 왕복해도 34,800원이 남으니까 장칼국수에 커피를 마시고 어쩌면 초당 순두부도 맛볼 수 있다.
“근데 이거 7시 10분이잖아.”
“다음 차는 언젠데?”
“1시 50분.”
“차가 그렇게 많은데 다 우등이라고?”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나도 녀석도 지금 당장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PD님.”
“네.”
“예산 초과하면 어떻게 돼요?”
“별일 없어요. 그냥 백반따라 정규 편성 안 되고. 저랑 여기 있는 카메라 감독님, 희주 작가 사표 쓰면 돼요.”
“그게 무슨.”
“저는 괜찮은데. 우리 정우 감독님 아들이 이번에 대학생 되거든요. 희주 작가는 이제 겨우 학자금 대출 상환해서. 아, 근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괜찮아요.”
아주 교묘한 협박이다.
한 두 번 한 솜씨가 아니다.
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만 방송으로 나갈 내용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당장 가방을 챙겼다.
“지하철?”
“늦어! 내 차로 가자.”
“어, 자차 이용은 안 돼요!”
백우진이 주차장으로 뛰려고 하니 박상철 PD가 다급히 외쳤다.
돌아보니 싱글벙글 웃고 있다.
출연자들이 박상철 PD를 왜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택시 탈까?”
“택시 탈 거면 우등 타지 뭐 하러 일반을 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일단 움직여야 한다.
“가자.”
* * *
“…….”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7시 13분이었다.
버스는 이미 떠났고 숨은 차오르고 일단 주저앉았다.
“흐억. 하악.”
나도 지쳤지만 백우진은 꼴이 말이 아니다.
머리는 바람에 날려 잔뜩 헝클어졌고 분홍색 셔츠는 땀에 젖어 등에 찰싹 달라 붙어 있다.
박상철 PD가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헤엑. 헤엑. 나 이제 못 움직여.”
주저앉아 있던 백우진이 결국 드러눕고 말았다.
“넌 어떻게 나보다 체력이 없냐.”
“형은. 지찬이 형이랑. 계속 운동하잖아.”
이 녀석 통통한 편이고 운동 부족인 걸 보니, 이대로 가다간 내 꼴 나겠다 싶다.
당뇨 오기 전에 짐꾼 헬스장에 끌고 가야겠다.
“이제 어떡하지?”
고개를 돌려 제작진을 살폈다.
박상철 PD, 김정우 카메라 감독, 황희주 작가 세 사람 모두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우리를 따라 왔으니 지치긴 마찬가지일 거다.
특히 방송국에서부터 촬영을 해오던 김정우 감독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돌아오는 차. 그건 일반 타자. 그럼 돈이 좀 남잖아.”
“그래. 그러자.”
강릉으로 갈 때는 우등, 돌아올 때는 일반을 타면 딱 25,000원이 남는다.
밥 한 끼에 커피 마실 돈으로는 충분하다.
“진작에 그럴걸.”
“그러니까.”
“……다음 차 언제야?”
백우진이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8시. 표 사 올게.”
“나 물 마시고 싶어.”
“그럴 돈 없어.”
“있잖아.”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하나 사서 나눠 마시자.”
“안 돼.”
단호히 선을 긋자 백우진이 팔다리를 털며 투정을 부렸다.
표를 사 가지고 돌아오니 8시까지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백우진과 의자에 나란히 앉아 멍하니 있다 보니 이래도 되나 싶다.
“뭐라도 하자.”
“뭘?”
“이러고 있어도 돼?”
백우진과 동시에 박상철 PD를 보니 이 아저씨도 지쳤는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말 유능한 PD 맞나 싶다.
“강릉 가서 뭐 먹을지 찾아보자.”
“그래.”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활용해 보고자 스마트폰을 들었다.
강릉 맛집으로 검색해 보니 회나 대게 같은 해산물이 많이 나오고 카페, 순두부 종류도 많이 나온다.
“회 맛있겠다.”
군침을 흘리는 백우진에게 흰 봉투를 보여주었다.
“25,000원 남지? 그걸로는 못 먹나?”
“광어도 30,000원은 줘야 소자 하나 먹을걸?”
“하아. 강릉 뭐가 맛있어?”
“유명한 건 초당 순두부, 장칼국수, 곰치국 정도?”
“싸고 맛있는 집 몰라?”
“야, 내가 무슨 전국 맛집을 다 알고 다니냐? 왜 나한테 물어.”
“난 그런 줄 알았지.”
백우진이 내 배에 손을 얹고 쓰다듬길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흔들다 보니 오늘 아침 이 녀석 때문에 새벽 같이 일어나 화장 받고, 그 화장을 지운 일이 생각났다.
“너 때문에 오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어?”
“아그아우억.”
“조금 전에도 힘들다고 걷지만 않았어도 버스 탔잖아!”
“그만해! 힘이 왜 이렇게 세?”
백우진이 날 뿌리치더니 머리카락을 넘겼다.
“더 못 뛰겠는 걸 어떡해. 이미 지난 일이야.”
“에휴. 그래. 말을 말자.”
“그런 의미로 물 하나만.”
“네가 사 와.”
봉투를 넘겨주니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편의점으로 향한다.
박상철 PD에게 물었다.
“근데 저희 대본 같은 건 없어요?”
“네.”
“……사전답사 다녀오셨다면서요. 그래도 대략적인 동선이라든가.”
“아, 10만 원으로 다녀올 수 있는지 확인해 봤어요. 가능하더라고요.”
“찍고 오신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앗. 차거.”
뺨에 차가운 촉감이 들어 화들짝 놀랐다. 백우진이 반쯤 남은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형, 생각 좀 해봤는데 강릉 안에서도 우리 이동해야 하잖아. 최대한 가까운 데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강릉까지 가서 터미널 주변 식당 갈 거면 뭐 하러 가.”
“그렇긴 한데 돈이 없잖아.”
“기다려 봐.”
문득 강릉에 성남 시장에 맛집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소머리국밥은 아예 골목이 형성되어 있고 칼국수, 닭강정 등 맛집이 꽤 여럿 있었던 것 같다.
오래된 기억이라 검색해 보니 다행히 아직 있는 모양이다.
“뭐 좀 찾았어?”
“성남시장으로 가자. 여기 돌아다니면서 찾으면 될 것 같은데?”
“터미널에서 가까워?”
“어. 걸어서 30분 정도면 가네.”
반응이 없어 고개를 들자 백우진이 눈과 입을 벌린 채 굳었다.
“왜?”
“나 더는 못 걸어. 일주일 움직일 거 다 움직였어.”
“야, 그래봤자 3㎞도 안 돼.”
말을 내뱉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나 방금 뭐라 한 거야?”
“형이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응.”
내가 언제부터 3㎞ 걷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대체 차지찬 이 인간이 나를 얼마나 가스라이팅했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무서운 사람이다.
“버스 타자. 둘이 타도 얼마 안 하잖아.”
“버스 타면 2만 원밖에 안 남잖아.”
“2만 원이면 한 끼는 먹을 수 있지 않아?”
“너 시장 다니다가 꽈배기 봤어. 그거 안 먹을 수 있어?”
“응.”
“설탕 듬뿍 뿌려가지고 촉촉하면서도 쫄깃한 꽈배기 그걸 참을 수 있다고?”
“응.”
“방금 막 튀겨 가지고 고소한 냄새 풍기는 그걸 참을 수 있다고?”
“밥 먹으면 되지.”
“아, 얘가 정말 기본이 안 되어 있네? 밥은 밥이고. 간식은 간식이지. 너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백우진이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잘못한 거야?”
“그래. 이 고생을 해서 가는데 하나라도 더 먹어야지.”
“시청자들한테 맛집 하나라도 더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어차피 안 가시잖아. 우리라도 맛있게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