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54화 (54/120)

치팅데이 54화

12. 백반따라(4)

나흘이 지나고 백반따라 두 번째 촬영일이 돌아왔다.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성적에 따라 추가 촬영이 결정될 수도 있다.

저번 강릉 여행이 친구랑 가볍게 놀러 다녀온 기분이었던지라 이래도 되나 싶긴 한데.

박상철 PD가 괜찮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

방송국 제1주차장에 도착하니 제작진과 백우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번 여행 때 단단히 고생한 백우진은 어두운 청바지에 워커를 신고 위에는 달마시안 무늬의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백우진과 제작진이 날 빤히 본다.

“왜요? 왜? 나 이상해요?”

“형, 달마시안 강아지 나오는 만화영화 알아?”

백우진이 물었다.

“응.”

“거기에 강아지 훔치는 도둑 나오잖아. 딱 그 사람들 같아.”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잘됐네. 콘셉트 맞잖아.”

백우진이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려 박상철 PD에게 물었다.

“오늘은 어디 가요?”

“오늘 여행지는 경주입니다.”

“경주.”

“네. 국내 여행지를 말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죠. 최근에는 황리단길을 중심으로 더욱 사랑받고 있고요.”

“맞아요. 1~2년 전부터 인스타에 경주 여행 사진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와. 너 인스타도 해?”

“형은 안 해?”

“응. 나 그런 거 잘 안 맞아.”

“연락 같은 건 어떻게 받아? 메일로 다 해?”

“응. 메일도 편한데?”

“요즘 맛집 중에 DM으로 예약받는 곳도 많잖아.”

“그런 데를 잘 안 가.”

“왜?”

“쉽지 않아.”

감성 카페라든가 파스타 먹는 곳에 관심은 있지만 왠지 내가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늘 경비 드리겠습니다.”

박상철 PD가 저번과 같이 흰 봉투를 건네 주었다.

이번에는 좀 더 먼 곳에 가니 저번보다는 넉넉히 주겠지 생각하며 봉투를 열었다.

“……진심이세요?”

“얼만데?”

백우진이 봉투 안에 든 10만 원을 보고 함께 항의했다.

“PD님 이건 아니에요. 경주 가는 KTX가 편도 49,300원이에요. 신경주역 도착해서 황리단길까지 가는 택시비도 안 남겠다.”

“다 방법이 있죠. 저희는 다 직접 해보고 제안 드려요.”

박상철 PD가 점점 미워진다.

“시외버스 타야 하나?”

“내가 찾아볼게. 형은 고속버스 찾아봐 줘.”

스마트폰을 꺼내 고속 버스 차편을 검색했다.

고속터미널에서 8시 10분에 출발하는 프리미엄 버스가 39,500원, 9시에 출발하는 우등 버스가 32,000원이다.

어느 쪽이든 두 사람이 왕복할 수 없는 가격이다.

“아, 갈아 타야 해.”

백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동서울에서 7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낙동강 휴게소에 갔다가 다시 11시 20분에 출발하는 차를 타고 경주로 가는 노선이다.

낙동강 휴게소까지는 14,700원이고 경주까지는 10,800원이니까 편도 25,500원.

두 사람이 왕복하면 102,000원이라서 예산 초과다.

“이거 더 싼 건 없어?”

“다 우등이야. 일반은 오후 7시 30분에 있어.”

일반 버스가 7,100원으로 더 싸긴 한데 시간이 너무 늦다.

돌아오는 차를 탈 수 없어서 노숙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PD님, 이거 말이 안 돼요. 여기서 동서울 터미널 가는 데도 돈 드는데.”

박상철 PD에게 항의했다.

“저번에 저희한테 짬뽕빵이랑 물 사 주셨잖아요. 그래서 만 원 더 드릴게요.”

박상철 PD가 큰 인심이라도 쓰듯 만 원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짬뽕빵 3개 9,000원에 물 한 병 1,000원을 더한 가격인가 보다.

어이가 없어서 만원권 지폐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가서 컵라면 먹으라고요?”

지하철 요금까지 제하면 대충 5,000원 정도 남는데 그걸 가지고 뭘 사 먹으라는지 알 수 없다.

“그건 찬용 씨 능력에 달렸죠.”

“이건 아니잖아요. 요새 국밥도 만 원이에요.”

“그쵸.”

“그쵸가 아니라!”

백우진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경기가 어려우니까 알뜰하게 여행 다니는 방법 소개 좀 해주세요.”

박상철 PD가 싱글싱글 웃으며 성질을 긁어댄다.

이 사람이 연출한 작품 출연자들이 왜 그렇게 억울해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도 타협이 안 된다.

“저희 예산 초과하면 PD님 사표 쓰신다고 하셨죠?”

“……네?”

“들었지?”

백우진에게 물으니 냉큼 고개를 끄덕인다.

“그냥 다 쓰자. 지갑 가져 왔지?”

“삼성페이, 애플페이 다 돼.”

백우진이 갤럭시와 아이폰을 한 손에 하나씩 들었다.

대체 왜 두 개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든든하다.

“경주까지 가는데 그냥 오늘 하루 정신 놓고 먹자.”

“찬용 씨.”

“안 되는데 어떡해. 그지?”

박상철 PD를 무시하고 백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그니까. 솔직히 알게 뭐야. 사표 쓰든 말든. 근데 나 오늘 하루 종일 사표 쓴단 얘기할 거야. 편집 못 하게.”

역시 중상모략에 익숙한 녀석이다.

박상철 PD가 사표를 쓴다고 말한 건 어디까지나 우리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뿐 사실은 아니다.

연출한 작품마다 성공한 스타 PD의 새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밥 한 끼 더 먹었다고 해서 문제될 일은 없다.

“에이. 설마 사표 쓰시겠어.”

“어? 시청자분들 앞에서 한 약속인데? 안 지켜? 난 그런 거 상상도 못 해봤어.”

백우진을 믿고 토스를 올리니 녀석이 스파이크를 때렸다.

백반 토론으로 다져진 공갈 음해 협박 능력이 이렇게 빛을 발한다.

“우진 씨?”

박상철 PD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상냥해졌다.

“형, 우리 뭐 먹을까? 경주 뭐가 맛있지?”

“넌 맛집 얘기만 나오면 나한테 묻는다?”

“그래서 어디가 맛있는데.”

“R식당 평 괜찮더라. 오무라이스랑 돈가스 파는데 분위기도 좋대.”

“또?”

“1994식당도 리뷰 많더라.”

“뭐야. 다 알잖아.”

“우연이야.”

“아무튼 그럼 다 먹으면 되겠네.”

“저, 잠시만요.”

박상철 PD가 결국 개입했다.

“원하시는 게 뭐예요?”

협상의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이럴 때 냉큼 받아먹을 만큼 착하지 않다.

“없어요.”

백우진과 동시에 답하자 박상철 PD가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어떻게든 협상을 이어나가고 싶은 모양이다.

“두 분이 모르셔서 그러는데 경주 안에서도 저렴한 식당 많아요. 그런 곳 찾으시면 가능해요.”

“5,000원으로 뭐 먹으라고요?”

“경주빵도 하나에 1,000원은 해요. 5,000원이니까 하나씩 나눠 먹으면 딱이네요?”

백우진이 나와 박상철 PD, 카메라 감독, 작가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좋고요.”

이 사람 진짜 독하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길 유도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요. 딱 2만 원만 더 주세요.”

2만 원만 더 있으면 어떻게든 한 끼는 멀쩡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안했는데.

박상철 PD가 냉큼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경주 도착하면 라이브 방송 켜서 시청자 1,000명당 1,000원 드릴게요.”

“아니.”

나와 백우진이 동시에 말했다.

“PD님, 이런 식으로 홍보하시려고요? 고작 1,000원으로?”

“우리 구독자 무시하시는 거예요?”

“WTV 이런 식으로 장사해요?”

“세상에 어떤 집이 광고를 돈 만 원에 해 줘요.”

“너무하시잖아요.”

“돈도 많으시면서 왜 이렇게 치사해요.”

“그러니까 머리가 빠지죠.”

사정 없이 두들기던 차, 백우진의 발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씩씩거리다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한마디 더 거들었다.

“심술쟁이 대머리.”

“푸학!”

카메라 감독이 소리 내어 웃었고 작가도 입을 막고 겨우 참는다.

박상철 PD가 발끈해서 백우진에게 소리쳤다.

“머리 가지고 놀리는 건 너무하잖아요!”

“그렇게 심술 부리니까 그렇죠! 형, 진짜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처음에 물 좋고 공기 좋은 데서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하셨잖아요!”

백우진이 대책없이 고개를 흔들며 항의했다.

“경주빵도 맛있어요!”

박상철 PD도 지지 않는다.

“맛있겠지! 근데 형 경주빵 하나 먹으려고 경주까지 갈 수 있어요?”

“그럴 수도 있죠!”

“아까부터 왜 자꾸 존댓말이야!”

백우진이 버럭 소리치자 박상철 PD의 말문이 막혔다.

나도 얘가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동태탕도 같이 먹은 사이잖아! 맥주에 소주 말아서 4잔이나 먹었잖아! 왜 근데 자꾸 존댓말이야!”

“아니. 그게.”

“형!”

“……네.”

“아니! 형!”

“어, 어…….”

“형 78이지?”

“어, 어. 어.”

“나 몇 년생이야?”

“90?”

“그래. 내가 동생이지?”

“그렇지?”

“근데 왜 자꾸 존댓말이야. 어?”

박상철 PD가 눈만 깜빡인다.

이런 미친놈을 처음 보는 모양이다.

“넌 왜 반말이야, 이 자식아.”

내가 나서니까 백우진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상철이 형이 자꾸 존댓말 하니까. 나랑 그날 사우나 가서 서로 등도 밀어줬는데. 내가 안 서운하게 생겼어?”

“그건 좀 심하네.”

고개를 끄덕이며 박상철 PD를 보니 카메라 감독과 작가도 상사를 정 없는 사람 취급했다.

“아니. 방송이니까 난 우진 씨, 아니, 우진이 널 존중하는 거지.”

“날 존중해? 정말?”

“그럼.”

“근데 왜 10만 원 주고 경주 가서 경주빵 하나 먹고 오라고 하는 건데. 대체 왜 날 이렇게 괴롭히는데.”

백우진을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울먹이는 척하며 백우진을 달랬다.

“이 보들보들하고 통통한 녀석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상처받았으면. 괜찮아. 형이 경주빵 하나 양보할게.”

“……정말?”

“이 자식이. 그걸 진짜 챙기려고?”

이 기회를 틈타 경주빵 하나 마저 챙기려는 속셈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좋습니다. 그럼 딱 만 원 더 드릴게요.”

박상철 PD가 백우진의 쇼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아쉽긴 하지만 만 원이 추가되면 그래도 밥다운 밥 한 끼 정도는 챙길 수 있다.

성공적인 협상이다.

“5만 원이요.”

나름 만족하고 있는데 백우진이 또 한 번 딜을 걸었다.

나름 큰 마음 먹고 양보했던 박상철 PD는 황당한지 고개를 기울이며 백우진과 눈을 마주했다.

어지간하면 물러설 법도 한데 백우진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안 돼요. 만 원.”

“5만 원.”

“2만 원.”

“5만 원.”

“3만 원.”

“오케이! 3만 원!”

이 정도면 연기 배워도 되지 않나 싶을 만큼 완벽한 연기를 펼친 백우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원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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