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55화
12. 백반따라(5)
낙동강 휴게소를 거쳐 도착한 경주 터미널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평일이라 여행객이 없어 보인다.
“안녕하세요. 지금 촬영 중이에요. 프로그램 명은 말씀드릴 수 없는데, 경주에 왔습니다.”
백우진이 고프로와 스마트폰을 연동해서 방송을 켰다.
안 한다고 하더니 3만 원을 확보해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사실 ‘백반따라’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야 우리나 제작진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홍보 자체에 반대하진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이다.
야외라 채팅을 확인하기 힘들어서 나도 우지니 생방송에 접속해 채팅창을 확인했다.
“찬용이 형이랑 같이 왔어요.”
백우진이 카메라를 돌렸다.
“요샌 무엇이든 알려드리는 그거 안 해?”
“그게 언제 적 인산데. 기억도 안 나.”
“무엇이든 알려드리는 램프의 지니 우지니입니다.”
백우진이 유튜브 초창기에 밀던 인사를 따라 하니 우지니어스 채널 시청자들이 키읔을 도배했다.
“하지 마!”
“왜? 좋아하시잖아.”
“창피하다고.”
“네 과거가 창피해?”
“어! 창피해!”
지금 돌아보면 인사말을 하는 게 촌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지만.
채널을 막 열였던 시기에는 어떻게든 채널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나도 지찬이 형도 백우진도 예전 영상을 보기 힘들어 하고.
또 이렇게 가끔 서로 놀리는 수단으로 활용하곤 한다.
└경주 어디 감?
└황리단길 가나?
└어? 방금 박상철 PD 아님?
└ㄷㄷ 우지니 박상철 PD 프로그램 나가는 거?
└월클 인증
시청자들이 카메라에 살짝 잡힌 박상철 PD를 알아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백우진이 박상철 PD를 보며 말했다.
“형, 인사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박상철입니다.”
시청자들이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저희 경주 왔는데 뭐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추천 좀 해주세요.”
백우진이 물으니 시청자들이 저마다의 맛집을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경주 맛집을 아는 걸 보면 확실히 경주가 여행지로 사랑받는 모양이다.
“R식당? 여기 아까 버스에서도 보지 않았나?”
“괜찮나 보네. 가자.”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걸으면 황리단길에 있는 R식당에 갈 수 있다.
카메라에 황리단길도 담아야 하니 느긋하게 마음먹고 발을 옮겼다.
“엥.”
백우진이 이상한 소리를 내길래 고개를 돌리니 나도 엥 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벅스 건물이 기와로 되어 있다.
저런 건 처음 본다.
“경주다.”
“경주네.”
신기해하며 계속 걸으니 이번에는 기와집에 들어선 버거킹이 눈에 들어왔다.
“경주니까.”
“경주면 그럴 수 있지.”
나름대로 경주에 왔다는 기분을 느끼며 걸으니 어느새 황리단길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턴가 봐.”
“그러게.”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골목을 이룬 황리단길에 입구에 도착했다.
큰 길 양옆으로 여러 매장이 있는데 눈 돌리는 데마다 십원빵이 보인다.
“십원빵이 뭐야?”
“몰라.”
도대체 십원빵이 뭐길래 여기저기서 파나 궁금해서 한 매장 앞으로 갔다.
십 원 동전처럼 생겼는데 경주시의 상징물인 하나인 불국사 다보탑이 있어서 이런 모양으로 만드는 모양이다.
무슨 맛일지 궁금하긴 하지만 예산이 부족하니 구경만 하고 발을 옮겼다.
“여기도 뭐가 있네?”
“그러게.”
골목마다 들어서면 또 작은 매장들이 있어서 탐험하는 기분이 든다.
편의점마저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지어져서 확실히 구경만 해도 재밌다.
“저기다.”
골목 끝에 있는 R식당을 찾았다.
점심시간을 벗어나는 시간임에도 줄 서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맛집인 모양이다.
우리는 줄을 섰고 박상철 PD는 안으로 들어갔는데 촬영을 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기 위함이다.
우리 테이블만 찍을 거라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저, 우지니시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차 백우진을 알아본 사람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했다.
백우진은 기꺼이 사진을 찍었다.
“감사합니다.”
“이 형이랑은 안 찍으세요?”
“어…….”
“야, 너 왜 그래.”
“이 형 모르세요? 우리 합방 많이 하는데?”
우지니어스 채널 구독자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너 지금 일부러 나 먹이려고 그러는 거지.”
“형 이런 거 좋아하잖아. 사인, 악수. 사진.”
예전에 묵은지에게 농담으로 악수하자고 했던 걸 얘기하는 거다.
분명 농담이라고 말했는데, 끝까지 연예인병 걸렸다며 놀린다.
“이 형도 사진 찍어 주고 싶으시대요. 한 번만 찍어주시면 안 돼요?”
“안 돼요.”
우지니어스 채널 구독자가 단호히 거절했다.
“형, 안 되신대. 아깝다. 그치.”
“너 나중에 보자.”
다음 백반토론 때는 철저하게 털어주리라 마음먹었다.
“저 혹시 야외도 괜찮으시면 지금 자리하실 수 있거든요.”
R식당 직원이 우리 앞에 줄 선 사람에게 야외 자리를 권했다.
“아니요. 저흰 안에서 먹을게요.”
“네. 혹시 야외 괜찮으신가요?”
거절당한 직원이 내게도 물었다.
박상철 PD와 백우진의 동의를 얻으려고 고개를 돌리니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건물 밖에도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그리 춥지도 않고 개방감이 있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직원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확인하했다.
돈가스가 14,000원, 볶음우동이 13,500원, 오무라이스가 13,500원 등 전체적으로 비싸다.
“3개는 못 시키겠다.”
“그러게. 뭐 먹을래?”
“돈가스 전문점이니까 돈가스 하나에 오무라이스 어때?”
“좋아.”
백우진이 버튼을 누르자 내부에 있던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나왔다.
“사장님, 저희 카츠 하나, 오무라이스 하나 이렇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시고요?”
“넵.”
잠시 기다리니 음식이 금방 나왔다.
“와.”
오무라이스와 돈가스 모두 보자마자 감탄이 나온다.
“너무 예뻐.”
오무라이스는 예쁜 접시에 너무도 우아하게 플레이팅되어 있었다.
선명한 노란색 계란 오믈렛이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인다.
소스 한쪽에 자리잡은 모습이 꼭 호수에 비친 달 같다.
방울 토마토와 파슬리로 보이는 가루로 포인트를 준 점도 완벽하다.
“어디.”
오무라이스를 한 입 떠 먹었다.
예상대로 입 안에서 녹아내린다.
흐물거리면서도 식감이 느껴질 만큼 완벽하게 조리된 오믈렛과 감칠맛을 돋우는 소스 그리고 볶음밥이 예술이다.
“아니, 미쳤어 진짜.”
“야채 식감도 너무 좋은데?”
“난 소스. 이거 뭐야?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달큰한 소스와 잘 볶인 야채볶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옷감 같은 오믈렛 조합이다.
사실 오무라이스 하나에 13,500원이라고 해서 거부감이 살짝 들었는데 이 정도라면 오히려 싸다는 느낌마저 든다.
완벽한 경험이다.
“돈가스는?”
백우진이 돈가스를 하나 집어 먹고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만 봐도 맛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도 하나 먹었는데 절로 눈을 감게 된다.
코로 숨을 길게 내쉬니 비강을 가득채우는 소스향과 육향이 더욱 풍부히 느껴진다.
“되게 부드럽다.”
“그치. 겉은 바삭한데 안에 고기가 말도 안 되게 부드러워.”
이 집 요리는 대체적으로 부드러워 보인다.
“형, 형, 누나. 이거 먹어 봐요. 빨리.”
백우진이 PD, 카메라 감독, 작가에게 손짓했다.
세 사람 모두 멀뚱멀뚱 있는데 백우진이 직접 돈가스를 하나씩 입에 넣어주었다.
박상철 PD는 그렇다 치고 언제부터 카메라 감독, 작가를 형, 누나로 부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맛있죠?”
카메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고 작가는 박상철 PD를 때리며 좋아한다.
“맛있네.”
“그러니까 하나만 더 시켜줘요.”
“어?”
“같이 드셨잖아요. 하나만 더 시켜요.”
“아니.”
“사장님, 저희 누들도 하나 주세요! 죄송한데 젓가락도 세 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박상철 PD가 뭐라 하기도 전에 백우진이 볶음우동을 주문했다.
역시 사람이 뻔뻔해지려면 정신줄을 놓아야 하는데, 내게 잘 배운 듯하다.
칭찬하는 의미로 돈가스 하나를 먹여주니 냅다 받아먹는다.
“주문하신 누들입니다.”
식탁에 놓인 볶음우동은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그 어떤 볶음우동보다 호화로웠다.
새우와 각종 야채가 정갈하게 담겨 있는 와중에 견과류로 마무리해서 먹기 전부터 이미 맛있다.
“뭐 해요. 빨리 달려들어요.”
백우진이 PD, 카메라 감독, 작가에게 젓가락을 나눠주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폭력적인 비주얼에 저항하지 못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나도 한 젓가락 집어 맛을 보았는데 맵다.
아주 맵진 않고 매운맛이 있다는 정도로 느껴지는데, 그 와중에 야채들이 눅눅하지 않고 저마다의 식감을 유지하고 있다.
아삭아삭한 청경채와 함께 새우살이 탱글탱글하고 쫀쫀한 우동 면발이 혀를 농락한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한 입.
향과 식감, 감칠맛을 음미하고 눈을 뜨니 접시가 텅 비어 있다.
믿을 수 없어서 접시를 보고 고개를 드니 네 사람 모두 자기 먹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심지어 볶음우동뿐만 아니라 오무라이스랑 돈가스도 없다.
“아니.”
“아, 맛있다.”
백우진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배를 쓰다듬는다.
“나 한 젓가락밖에 못 먹었는데.”
“왜?”
“왜긴! 너희 놈들이 다 드셨으니까요!”
화를 내며 박상철 PD를 보니 시선을 회피한다.
“나 몰라. 그냥 내가 사 먹을 거야. 카메라 끄고 앉아요. 다들. 사장님, 저희 주문이요!”
미친자들 사이에서 정상인인 척해봐야 나만 손해다.
이 맛있는 음식을 한 입만 먹고 경주를 떠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