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56화
13. 신호(1)
‘백반따라’ 편집을 마친 박상철 PD가 기지개를 켰다.
며칠동안 밤을 새워 편집한 1회가 만족스럽게 완성되었기에 오늘은 일찍 퇴근할 생각이었다.
“고생하셨어요, 선배님.”
“고생했어. 그래도 잘 나온 것 같지?”
“네. 시청률도 잘 나오면 좋겠는데.”
백반따라는 여러모로 실험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유명 유튜버를 섭외한 만큼 유튜브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는데, 영상 길이를 10분 내외로 잡아서 정규 프로그램 사이에 짧게 방영하는 콘셉트였다.
평소라면 허가가 쉽게 떨어질 리 없지만.
기존 방송 일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저예산 프로젝트이며 동시에 스타 PD 박상철이 도전한다고 하니 WTV에서도 흔쾌히 진행한 일이었다.
되면 좋고 안 되도 손해가 크지 않은 일.
WTV의 윗선은 백반따라를 그 정도 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게.”
그러나 박상철 PD와 일부 직원의 생각은 달랐다.
유튜브, 넷플릭스 등 영상 콘텐츠를 다루는 매체가 늘어났고 TV 방송국의 힘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다.
박상철 PD와 그를 따르는 몇몇 직원은 방송국의 힘이 콘텐츠에서 나온다고 믿었고.
그들은 WTV가 앞으로도 경쟁력을 갖추려면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생각으로 시작된 여러 기획 중 하나가 백반따라였다.
유명 크리에이터를 섭외하고 인터넷 문화를 반영해서 TV를 보지 않는 젊은 층을 유입시키고.
국내 여행지와 맛집을 소소하게 소개하여 기존 WTV 시청자들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길 바랐다.
“괜찮을 거야. 우리가 재밌으면 또 재밌게 보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네.”
정민아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모니터를 보곤 피식 웃었다.
백우진이 박상철 PD에게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우진이 너무 웃기지 않아요?”
“입심이 보통이 아니야. 앞뒤 안 보고 나서는데 못 당하겠더라니까.”
입담 좋은 연예인들을 20년 넘게 상대해 온 박상철 PD가 고개를 내저으니 웃음만 나왔다.
“진짜. 처음 섭외한다고 하셨을 땐 좀 긴가민가했거든요. 교양 프로그램하곤 다르니까.”
박상철 PD 외 모든 사람이 이번 프로그램 출연자 섭외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백우진은 13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확보한 인플루언서면서 TV에도 종종 출연했지만, 주로 교양 프로그램에서 활동했기에 예능 분위기에 적응할지 미지수였다.
“그래?”
“유튜브도 지식 전달 위주였고요.”
“백반 토론 안 봤어?”
“봤죠. 그래서 반대 안 했는데 그래도 대본 있는 거랑 리얼은 다르니까 걱정은 했죠.”
정민아 조연출이 그동안의 의문을 털어놓았다.
백반토론은 확실히 대중적 웃음 포인트가 있었지만, 두 사람이 어느 정도 합을 맞춰 진행하는 이야기였다.
반면 백반따라는 상황만 제시할 뿐, 그 어떤 준비도 없이 출연자에 기대는 프로그램이었다.
날고 기는 사람도 아무 준비 없이 카메라 앞에 서면 얼기 마련이기에 정민아 조연출의 우려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백반토론도 주제만 정해놓고 하더라고.”
“그래요?”
“백우진 하는 거 봐. 보통 내기 아니라니까.”
정민아 조연출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반찬용은 생각보단 그렇게 나서진 않네요.”
제작진은 반찬용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비록 아직 인플루언서라고 말할 정도로 유명하진 않지만, 백반토론에서 보여준 입담은 백우진 이상이었다.
“긴장한 것 같진 않은데.”
“어. 자연스럽게 잘했어.”
박상철 PD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방송 콘셉트를 제대로 이해한 거야. 백우진이 저렇게 나서는데 자기까지 거들면 분위기가 뜨잖아.”
백반따라는 편하게 볼 수 있는 영상이어야 했다.
과한 제스처와 언행은 자제하길 바랐고, 반찬용은 박상철 PD의 의도를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쓴다고요?”
정민아 조연출은 의아했다.
개인 방송을 2년간 했다곤 하지만, 방송 콘셉트에 맞춰 진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끼 있는 연예인들도 돋보여야 한다는 압박감과 조급함에 종종 선을 넘고는 했다.
“원래 편집 하던 친구래. 보면 편집점도 잘 잡잖아. 멘트도 안 겹치게 하고. 편집 쉽지 않았어?”
“……그랬어요.”
“얘들 보통내기 아니야. 아무튼 난 국장님 뵙고 퇴근할게. 내일 봐.”
“국장님이요?”
박상철 PD는 씩 웃어 보이곤 편집실 문을 열었다.
평소 신중한 박상철은 좋은 일이 있어도 굳이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선 결과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그럴 때마다 작게 미소 짓는 것으로 행동을 대신했다.
백반따라 팀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은 정규 편성.
정민아 조연출은 입을 앙다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직 송출도 되지 않은 프로그램이 확정되었다니 성취감이 피로를 씻어내는 듯했다.
정민아 조연출이 다리를 살짝 구르며 기쁨을 표출했다.
* * *
“목요일 8시 45분이요? 네. 감사합니다. 넵.”
박상철 PD가 ‘백반따라’ 첫 방송시간을 알려주었다.
다음 주 목요일 방송 결과에 따라서 정규 편성 여부가 결정된다고 하니 조금 긴장된다.
“백반따라 방송일자 정해졌습니까?”
곁에 있던 묵은지 PD가 물었다.
“네. 좀 긴장되네요.”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다다음 주 월요일에는 혹시 모르니 시간 비워달라는 정도? 별말 없었어요.”
“비워 놓겠습니다.”
묵은지가 사무실 한 쪽에 놓인 화이트보드에 다가가 다다음 주 월요일 일정을 지웠다.
“커뮤니티에 공지도 올리겠습니다.”
다른 일은 없고 개인방송만 하는 날이긴 한데 성급하다 싶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니까. 공지는 다음 주에 올려도 될 것 같아요.”
“정규 편성이 되었다고 언질을 준 겁니다.”
묵은지가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
“방송국 일정은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다음 주에 파일럿이 방영되는데 다다음 주에 시간을 비워 놓으라는 뜻은 곧장 2회를 송출하겠단 뜻입니다.”
확실히 이상하다.
파일럿이 방영된 뒤에 정규 방송이 나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촬영과 편집 외에도.
제작비도 편성, 광고주 섭외, 일정 조율, 시간대 정리 등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곧장 촬영에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다.
“그럼.”
“축하드립니다.”
묵은지가 한 달치 일정을 정리해 둔 화이트보드를 살폈다.
묵은지의 말대로 백반따라가 정규편성 된다면 상당히 빠듯해진다.
월요일 백반따라.
화요일 개인방송.
수요일 언제까지 뚱할 거야?
목요일 백반토론.
금요일 맛집 탐방.
토요일 반찬을 만들어 주지용.
일요일 개인방송.
월요일은 종일 촬영이라 힘들지만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개인방송을 안 하는 날이 없고 당연히 편집도 해야 한다.
거기에 운동도 하고 있다.
집 청소할 기력이 없어서 방이 돼지우리가 되어 가는 중이다.
“잠은 얼마나 주무십니까?”
일정을 확인하던 묵은지 PD가 물었다.
“4~5시간 정도?”
“이렇게 살다간 실업자가 됩니다.”
“무슨 뜻이에요?”
“대표님이 오래 못 사니까요.”
“……아.”
내가 죽으면 본인이 실업자가 된다는 말이었다.
“편집자를 구하거나 방송일을 줄여야 합니다. 피로가 쌓이면 방송에도 영향이 갑니다.”
“그러고 싶죠. 그런데 돈이 없어요.”
“투자하셔야 할 때입니다. 상황이 지속되면 돈 때문에 모든 걸 잃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고민된다.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뒷머리를 긁다가 직접 보여주는 편이 좋겠다 싶어서 손짓했다.
방으로 들어서서 혼자서 정리하던 매출 문서를 보여주었다.
수입과 지출을 확인한 묵은지가 모니터에서 멀어졌다.
“저 때문이군요.”
묵은지가 본인 봉급을 언급해서 깜짝 놀랐다. 그렇게 생각하라고 보여준 게 아닌데 오해가 생긴 듯싶다.
“아니요. PD님 때문이 아니에요.”
“맞습니다. 여유 자금의 상당량이 제 월급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묵은지가 모니터를 빤히 보길래 슬며시 문서를 아래로 내렸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뭘요?”
“편집 말입니다.”
“네?”
“사람을 더 구할 자금이 부족하니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또 PD 직책을 가진 사람이 편집을 못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니 공부하겠습니다.”
기특하다.
“왜 그러십니까?”
“정말 고맙긴 한데 이게 한다고 해서 쉽게 되진 않거든요. 기술이야 금방 익힐 수 있어도 감각이라는 게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렇군요.”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어렵다는 건 알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할게요.”
“해보겠습니다.”
“음. 잠깐만요.”
고민이 된다.
편집 프로그램을 두루 사용할 줄 알면 좋지만, 사실 이쪽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높은 수준을 바라는 건 무리다.
맥(Mac)이라는 진입장벽만 제외하면 파이널컷에 모션이 배우고 활용하기 쉽다.
다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작업이 섬세해질수록 다루기 난해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쉽게 배우고 활용하기에는 좋은데 내 스타일과는 약간 안 맞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줄지.
아니면 내가 주로 사용하는 어도비 쪽 프로그램을 요구할지 고민된다.
“PD님 맥 써본 적 있으세요?”
“애플 컴퓨터 말씀이십니까?”
“네.”
“없습니다.”
맥에 익숙하지 않다면 차라리 프리미어를 배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입문은 어려워도 나중에 복잡한 편집 과정을 거치기엔 프리미어 쪽이 좀 더 유리하다.
하지만 처음이니까 또 맥에 익숙해지면 기능 숙달은 금방 늘 것이다.
무엇보다 파이널컷과 모션은 작업 속도가 빠르다.
내 방송 시간이 길고 일주일 업로드 영상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파이널컷이 유리할 수 있다.
마침 안 쓰는 맥이 있으니까 추가 비용이 들지 않고 가르치기도 쉽다.
“대표님.”
고민이 깊어지던 차 묵은지가 나를 불렀다.
“네.”
“무슨 고민을 하시는지 몰라도 빨리 결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게 좀 복잡해요. 사실 우리가 엄청 고화질 영상을 만들진 않는데 나중에는 그러고 싶단 말이죠?”
“네.”
“그러려면 프록시 코덱을 걸어야 해요. 파이널컷은. 아, 파이널컷은 맥에서 쓰는 프로그램이에요. 파이널컷은 어차피 인풋할 때 프록시 코덱으로 만들어서 그냥 만들면 되는데. 어도비는 따로 설정을 해줘야 하거든요. 이게 또 인코딩을 돌려야 해서 작업 시간이 느려요.”
“그럼 파이널컷을 배우겠습니다.”
“배우기도 쉽고 작업 속도가 빠르니까요. 연동도 좋고. 근데 나중에 섬세한 작업에 들어가면 어도비 프리미어가 나은 부분이 있거든요. 워크플로우라고.”
“대표님.”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계신 프로그램은 무엇입니까?”
“어도비 프리미어요.”
“그걸로 하겠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