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61화
14. 찍먹(3)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묵은지가 나를 빤히 보고 있다.
눈빛이 무섭다.
“왜, 왜 그래요?”
“……혹시 빌게이츠 사위 되는 방법 알고 계십니까?”
“네? 그게 뭔데요?”
“아들에게 내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라고 요구합니다. 아들은 거부하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지만 그 사람이 빌게이츠의 딸이라고 말하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근데 그건 빌게이츠 사위 되는 방법이 아니잖아요.”
“다음은 빌게이츠를 만납니다. 그리고 당신 딸과 내 아들을 결혼시키자고 합니다. 당연히 거절당하겠죠.”
“그렇죠.”
“하지만 내 아들은 월드뱅크 CEO라고 합니다. 빌게이츠는 고민 끝에 수락합니다.”
어딘가 익숙한 진행이다.
“그런 다음 월드뱅크 회장을 찾아가 내 아들을 월드뱅크 CEO로 임명해 달라고 합니다.”
“싫다고 하면 빌게이츠 사위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너무나 간단하게 축약되었지만 요지는 각각의 욕구를 판단해서 그것을 충족시켜 주고, 모든 사람이 윈윈한다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적용하려면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지만 비즈니스의 핵심을 짚는 이야기 같다.
“그렇습니다. 예전에 잠시 화제가 되었던 유머글인데 설마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누군데요?”
묵은지가 날 빤히 본다.
“저요?”
“옆에서 지켜보는데 능수능란한 사기꾼처럼 보였습니다.”
“네?”
“백반토론에서 보여주었던 음해 협박 갈취 모함이 콘셉트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에요. 무슨 말씀을. 음해랑 모함은 해도 협박 갈취는 안 했어요.”
“곧 할 것 같습니다.”
“…….”
“사기 전과가 생기면 반찬가게는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정말 걱정하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영상 편집본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아, 같이 보죠. 의자 가지고 오세요.”
“네.”
어제 기존 방송 분량에서 재밌는 부분을 잘라내 하고 싶은 대로 편집해 보라고 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해서 연습일 뿐, 큰 기대는 안 한다.
“어…….”
영상을 재생한 지 3초 만에 이상한 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영상을 멈추고 확인해 보니 보노보노다.
“PD님?”
“네.”
“이거 왜 넣으신 거예요?”
“귀엽습니다.”
“……그쵸. 귀엽죠.”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일단 이미지 사용은 조심해야 해요.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까 꼭 필요한 건 비용을 지불해야 해요.”
“걱정 마십시오. 결재해 주시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결제하겠습니다.”
“네?”
“사비로 결제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당당한 태도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넣고 싶어요?”
“귀엽습니다.”
“음. 으음. 이유. 이유가 필요해요. 귀여운 거 말고 다른 명확한 이유가요.”
이 정도까지 말하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상도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영상 재생하시면 보노보노가 무작위로 튀어나옵니다.”
묵은지가 본인 편집 영상을 재생했다.
“5초나 10초 스킵을 반복하면 볼 수 없는 보노보노도 있습니다.”
“……그래서요?”
“귀여운 보노보노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대표님의 영상을 스킵 없이 볼 테고 영상 시청 시간 확보는 곧 수익으로 연결됩니다.”
“어?”
“귀엽습니다.”
묵은지가 본인의 의지를 밀어붙이듯이 말했다.
보노보노 이미지를 쓰는 건 문제가 있지만 영상을 스킵 없이 보게 유도한다는 발상 자체는 신선하다.
아니, 오히려 좋다.
사실 유튜브 영상에 걸린 광고는 대부분 스킵된다.
그것만으로도 수익이 나긴 하지만, 유튜브 프리미엄 대중화되면서 영상 시청 시간에 따른 수익 보장에 주목하고 있다.
프리미엄을 구독한 사람이 영상을 얼마나 보았는가, 즉 시청시간을 기준으로 수익이 배분되기 때문이다.
사실 스킵 없이 시청하는 건 결국 콘텐츠 자체가 재밌어야 하는 문제고.
묵은지의 아이디어는 보조적 수단일 뿐이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
“괜찮네요.”
“알아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보노보노는 안 돼요. 다른 이미지를 사용해서 같은 방식을 적용해 보죠.”
묵은지가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하는 얼굴은 처음이다.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지를 사용하는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봐야죠. 우리 회사 규모로는 보노보노 같은 유명 캐릭터를 상업적 용도로 사용하기 힘들 거예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내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하지만 귀엽습니다.”
못 한 것 같다.
* * *
“이거 완전 사기꾼이네?”
“난 처음부터 알았어.”
“찬용이 그렇게 안 봤는데.”
“…….”
기쁜 마음으로 모인 일요일 점심.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았다.
네 명이 함께 모여 대화하던 와중에 차지찬이 주지승에게 형이 진짜 할 줄은 몰랐다고 말꼬를 튼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주지승은 장사를 해본 백우진이 한다고 해서 마음먹었다고 했고, 백우진은 차지찬이 공실을 내어준다고 해서 괜찮아 보였다고 말했으며, 차지찬은 다시 주지승이 요리를 해준다니 나섰다고 했다.
그렇게 모든 눈이 날 향하게 되었다.
“여러분,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오해.”
“죽어.”
“이거 누가 뒤통수를 쳤나. 머리가 아프네.”
차지찬, 백우진, 주지승이 차례로 한마디씩 하니 정신이 없다.
“생각해 보세요. 사실 여러분이 바랐던 조건이 모두 성립하지 않았습니까?”
“일에 순서가 있잖아. 지승이 형이 한다고 하면 한댔지 내가 언제 먼저 한다고 했어.”
차지찬이 따지고 들었다.
“순서 중요하지. 근데 지금 세 명이잖아. 누가 제일 먼전데?”
“나지.”
“나지.”
“나지.”
세 명이 동시에 대답하곤 서로를 둘러본다.
“그래. 순서를 정할 수 없으니까 내가 나서서 서로 입장을 조율한 거잖아.”
차지찬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했고 주지승은 고개를 갸웃한다.
백우진만이 볼을 부풀리고 날 노려보다가 차지찬, 주지승을 선동했다.
“이 사람 말에 현혹되지 마. 순식간에 매국노되니까.”
“무슨 말이야. 어떻게 건강 관리하는 사람들한테 좋은 도시락 싸게 제공하는 일이 매국노야. 선행이지.”
차지찬과 주지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이 하면 되지 왜 우리까지 끌고 들어가는데.”
“좋은 일이니까. 생각해 봐. 이거 잘 되면 이미지도 좋아지고 부가수입도 생기고. 경험도 쌓고. 유튜브 콘텐츠도 생기고. 얼마나 좋아.”
백우진이 인상을 썼다가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자, 지찬이 형은 건물이 있어. 공실이 있고. 그거 가만히 두면 어차피 수익이 안 나잖아. 우리 매장 열어서 월세 좀 깎아주더라도 빈 채로 두는 것보단 낫지 않아?”
“그렇기야 한데.”
차지찬이 주지승과 백우진 눈치를 보다가 떨떠름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회원들 식단 하나하나 어떻게 짜. 그냥 제공하면 된다니까? 회원들한테도 엄청 메리트 있고 짐꾼 헬스장 잘 되면, 더 좋은 거 아니야?”
“맞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지승이 형도. 형처럼 인기 있는 유튜버가 매장을 열어. 그것만으로 화제가 되잖아. 그치?”
“음. 뭐.”
“근데 형도 알다시피 장사는 경험이 필요하다며. 이번 기회에 찍먹해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나중에 형 매장 차릴 때 도움될 거고. 유튜브 콘텐츠할 때 매장 이용하면 되고. 점심 장사만 하면 저녁에는 부엌 마음대로 쓸 수 있잖아. 형 오피스텔 자리 좁다고 했잖아.”
“맞네.”
주지승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진이 너도. 너 솔직히 말해 봐.”
“뭘?”
“하고 싶지.”
“내가? 아니?”
“아니긴 뭘 아니야. 더 다음 소설 식당 얘기 쓴다며. 자료 조사하고 있었잖아.”
“……응.”
“소설을 어? 경험도 없이. 어? 그렇게 막 써도 돼? 적어도 식당 얘기를 하려면 식당 운영 정도는 해보고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어떤 미친 인간이 그런 짓을 해.”
“백우진은 그래야지. 고증에 미친 백우진은 그래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백우진이 날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모차르트 in 조선>이라는 웹소설을 쓰면서 고증 문제로 얼마나 고생했고 신경 썼는지 알기에 식당 운영에 관심을 가질 거라 예측했는데, 정확했다.
“봐. 다들 할 이유가 있잖아. 우리가 힘을 모으면 서로 윈윈할 수 있다니까?”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다시 내게 물었다.
“넌 뭐 하는데?”
“다 하지. 지승이 형 도와서 요리도 하고, 식자재도 떼 오고, 홍보도 하고, 매출입 관리도 하고.”
주지승이 물었다.
“그렇게 힘들어? 너 요새 잘 되잖아.”
“그니까. 나도 그게 궁금해. 굳이 하려는 이유가 뭔데?”
“나 밥 해 먹기 귀찮아서.”
“어?”
“아니. 유튜브 하고 회사 일 하고 방송 나가고 그러다 보니까 진짜 밥을 못 해먹겠더라고.”
“음.”
주지승과 차지찬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뇨병 환자인 그들은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식단 관리를 하지 않으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기고 나아가면 장애, 심각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병이 당뇨다.
내게는 생존의 문제다.
그리고 나와 같이 당뇨병을 가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나한테도 절실하고. 달리 절실한 사람도 많을 거야. 지금 당장 거창하게 하자는 건 아니야.”
“그럼?”
“기간을 정해두고 해보자고. 잘 되면 계속하고 안 되면 접고. 하다 보면 또 다른 생각 들 수도 있으니까.”
통장을 꺼내 식탁 가운데 놓았다.
“나 진심이야.”
“이게 뭔데?”
“1억. 내 전재산.”
매장을 차리는 데 한참 부족할지 몰라도, 나도 많은 것을 걸고 시작한다는 마음만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돌겠네. 진짜.”
차지찬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하자. 월세는 됐고 우리 회원들한테 30% 할인만 해줘. 그럼 돼.”
“진짜?”
“그래, 인마.”
“그래. 얘기 들어보니까 안 하는 게 잘못인 것 같네. 해보자.”
주지승도 나섰다.
역시 당뇨끼리 통하는 게 있다.
“……그럼 나 흥부 형 올라오라고 한다?”
백우진이 농사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흥부를 언급해 깜짝 놀랐다.
“어? 여기 와 계셔?”
“아니. 어차피 할 거면 같이 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오라고 했지. 조금 전에 도착했다고 카톡 왔는데.”
이 귀여운 녀석.
처음부터 할 생각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