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62화
14. 찍먹(4)
의논 끝에 도시락 장사는 한 달 동안만 하기로 결정했다.
나를 포함한 네 명 모두 여유가 없었기에 시간을 정해둘 수밖에 없었다.
본인 얼굴을 무기로 삼는 사람들이다 보니 목적과 조건이 좋다 하더라도 기존 일정을 조절하기 힘들었고.
네 명이 다함께 모이기도 쉽지 않아서, 월요일은 백우진과 마케팅 방식을 논의했고 화요일에는 주지승과 함께 메뉴 개발 회의를 진행, 수요일은 차지찬과 인테리어를 알아보았다.
그러는 와중에 개인 방송도 진행하니 저당밥솥 리뷰 콘텐츠는 전적으로 묵은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저당밥솥 도착했습니다.”
묵은지가 택배 박스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광고 제안이 들어온 물건인데 성능을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제품을 보내준 모양이다.
“밥을 해 먹어야 할 텐데.”
마침 점심시간이다.
반찬만 사 와서 밥이랑 같이 먹으면 될 듯싶다.
“같은 쌀 써서 혈당이 얼마나 오르는지 비교하면 되겠죠?”
“네. 식전 혈당을 체크하신 뒤에 식사 후 시간대별로 비교하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반찬도 같은 걸 드시고요.”
식전 혈당을 완벽하게 맞추고 진행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해서 일반 밥솥으로 지은 밥을 먹었을 때의 혈당 상승 추이와 저당 밥솥으로 지은 밥을 먹었을 때의 결과를 비교하기로 결정했다.
“쌀이랑 반찬 좀 사 와야겠네.”
“바로 하십니까?”
“네. 어차피 점심시간이고 저녁엔 우진이 오니까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묵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찬으로 뭘 사면 좋을까 고민하며 마트로 향했다.
쌀은 1㎏ 짜리로 소포장된 걸 사면 되고 반찬은 팩으로 된 게 있으면 좋겠다.
메인 반찬으로 고기를 먹고 싶은데, 사무실 안에서 조리하기에는 제약사항이 많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트에 이르니 마침 좋은 식재료가 눈에 띄었다.
“연어회 좋지.”
그러고 보니 생선 먹은 지 오래되었다.
연어는 맛있는데도 단백질, 오메가3 지방산, 아미노산이 풍부해서 다이어트 건강에 좋다.
닭가슴살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녀석이다.
* * *
사무실로 돌아와 택배 상자를 열다가 문득 고민이 되었다.
제품 테스트만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리뷰 영상을 올릴 거면 언박싱부터 촬영하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저당밥솥을 상자째로 들고 방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설치했다.
“음.”
“필요하신 것 없으십니까?”
묵은지가 다가와 물었다.
“테스트할 때 바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대본을 안 써서요. 그냥 바로 할까 고민 중이에요.”
“작성해 두었습니다.”
“네?”
묵은지가 본인 자리로 가더니 서류철을 가져왔다.
“꿀처럼 달달한 남자. 당뇨 아저씨 반찬용입니다?”
첫 줄을 읽고 고개를 들었다.
“PD님?”
“목소리와 혈당이 달다는 이중적 의미를 포함하는 PR 문구입니다. 대표님의 특징을 잘 잡았습니다.”
잘했단다.
“…….”
대본을 살펴 보니 리뷰 순서와 참고할 정보를 정리해 두었다.
대사를 모두 적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즉석으로 촬영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
“언제 준비했어요?”
“바로 촬영하신다길래 장 보러 가셨을 때 준비했습니다. 요 며칠 계속 여유가 없으셨으니 필요할 거라 판단했습니다.”
“아.”
“대표님이 어떻게 진행하실지, 제품이 괜찮을지 몰라 틀만 잡았는데. 말씀하시면 대사도 적어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충분해요. 리뷰 영상 대본은 이렇게 준비했어요. 고마워요.”
묵은지가 고개를 숙이고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매번 도움을 받으니 피곤한 와중에 기분이 좋아진다.
든든하다.
“…….”
내 목소리가 그렇게 좋나?
듣기 좋은 말도 할 줄 알고.
우리 PD님을 다시 보게 된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켜고 리뷰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꿀처럼 달달한 남자. 당뇨 아저씨 반찬용입니다.”
막상 말하고 나니 부끄럽다.
이 부분은 드러내야겠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당뇨병이 있다 보니 흰쌀 대신 현미를 먹는데, 가끔 정말 사무치게 흰밥이 그립더라고요. 그러던 와중에 한 업체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바로 저당밥솥이죠.”
택배 박스를 두드린 뒤 박스를 개봉했다.
“혈당을 상승시키는 요인은 바로 탄수화물입니다. 그래서 이 업체는 탄수화물을 최대 40%나 줄여주는 밥솥을 개발했다고 하는데요. 과연 혈당이 얼마나 조절되는지. 직접 이 밥을 지어 먹고 혈당 체크를 해보겠습니다.”
디자인은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적당히 언급한 뒤 밥솥을 열었다.
구성품이 들어 있다.
“안에는 계량컵, 전원 케이블, 저당 트레이가 들어 있네요. 이 트레이가 핵심인데, 밥을 지으면 이쪽에 당질이 모인다고 합니다. 여기에 당질이 모이는지, 얼마나 모이는지에 따라서 혈당이 조절되겠죠. 우선 세척부터 할게요.”
카메라와 밥솥, 쌀을 챙겨 싱크대로 향했다.
“PD님, 촬영 좀 도와줄래요?”
“네.”
묵은지가 카메라를 들었다.
밥솥 세척 장면을 담아낸 뒤에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실험 방식은 간단합니다. 같은 쌀, 같은 양을 같은 방식으로 지어서 혈당 변화 과정을 비교해 볼 거예요. 저당 밥솥으로 만든 밥이 일반 밥솥으로 만든 밥보다 혈당이 낮게 나오면 효과가 있다는 뜻이겠죠? 그럼 쌀을 딱 한 컵만 퍼서 씻어주겠습니다.”
카메라 앞에 계량컵 가득 푼 쌀을 보여주었다.
이후에는 평범하게 밥솥에 쌀과 물, 저당 트레이를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를 설치해 밥이 지어질 때까지의 과정을 모두 담았다.
괜히 조작 의혹 같은 걸 받고 싶지 않아서 리뷰 영상에서 밥이 지어지는 과정을 배속으로 넣을 생각이다.
피곤해서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취사가 완료되었다는 알림 소리가 났다.
밥솥을 열어보니 저당 트레이에 당질물이 가득 고여 있다.
카메라 렌즈에 김이 서리지 않도록 잠시 기다리고 화면을 담았다.
“설명서대로 트레이에 뿌연 물이 고여 있네요. 이게 당질인 것 같습니다. 물을 많이 잡아서 밥이 질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카메라를 묵은지에게 넘기고 두 손으로 저당 트레이를 들었다.
밥을 짓느라 내부 온도가 올라가 있는 상태라, 휴지로 손을 보호하고 들어내야 했다.
묵은지가 갓 지어진 쌀밥을 화면 가득 담았다.
“밥이 잘 됐습니다. 포슬포슬하니 보기에는 다른 밥과 다르지 않네요.”
김과 나물 3종류, 연어회를 책상에 차려놓고 저당밥솥으로 지은 흰쌀밥을 가운데 놓았다.
사무실에서 차린 밥상치고는 제법 그럴듯하다.
삼각대에 설치한 카메라를 책상 정면에 두었다.
“식사를 하기 전 혈당부터 체크할게요.”
혈당 체크기를 꺼냈다.
피를 내서 체크지에 묻히고 기기에 삽입하니 이내 129가 떴다.
“현재 공복혈당은 129입니다.”
숫자를 잘 보여주고자 기기를 카메라 앞으로 가져가 보여주었다.
“그럼 먹어볼게요. 흰쌀밥은 진짜 오랜만이라서 너무 기대되는데?”
젓가락을 들었다가 이내 숟가락으로 교체했다.
오랜만에 먹는 흰쌀밥이니 숟가락으로 크게 한 술 뜰 생각이다.
보기에는 다른 밥과 크게 다를 바 없는데, 어떤 점이 다른지 궁금하기도 하다.
“호우. 허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을 크게 떠 한 입에 넣었다.
뜨거워서 숨을 거칠게 내뱉는데 확실히 일반 흰쌀밥하고는 느낌이 다르다.
입 안에 든 밥을 삼켰다.
“이게 확실히 맛이 다르긴 하네요. 찰진 느낌이 거의 없어요. 당질이 빠져나가서 그런가 싶고. 원래 밥을 꼭꼭 씹다 보면 단맛이 나잖아요? 그런 느낌은 또 있네요.”
느낌상 확실히 당질이 빠져나가긴 했다.
흰쌀밥 특유의 찰진 느낌이 덜해서 건강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당질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건 아니라 단맛이 돌긴 하다.
“아 진짜 너무 맛있다.”
흰쌀밥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김치찌개, 계란후라이만 있으면 5공기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다른 반찬 없이도 그 정도는 먹을 수 있겠다.
“확실히 흰쌀밥이 맛있어요. 일반밥솥으로 지은 것보단 맛이 덜하긴 한데, 잡곡이나 현미, 보리를 먹을 거냐? 저당밥솥으로 지은 흰쌀밥을 먹을 거냐고 물으면 전 이게 나아요. 흰쌀밥은 못 따라와.”
말하다 보니 내가 흰쌀밥을 오랜만에 먹어서 맛있게 느껴지는지, 아니면 본래 맛이 괜찮은지 의문이 생긴다.
“잠깐 궁금한 건 제가 식단을 오래하다 보니까 흰쌀밥을 되게 오랜만에 먹거든요. 그래서 맛있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 부분은 참고해 주시고.”
비교군이 있으면 좋겠다 싶던 차, 시야에 묵은지가 들어왔다.
“PD님.”
“네.”
“이 밥 맛 봐주실 수 있으세요?”
혹시나 싶은 욕심에 말을 꺼냈는데, 바로 아차 싶었다.
거식증을 앓고 있는 그녀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
묵은지가 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네?”
놀라 되물으니 묵은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제가 실수했어요. PD님 아픈 거 아는데 순간 깜빡해서. 괜찮아요. 잊어 주세요.”
“다른 사람의 경험도 담고 싶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네. 그렇긴 한데.”
“해야 하는 일이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묵은지가 새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아니에요. 진짜. 진심으로 안 해도 돼요. 아니, 안 드셨으면 좋겠어요.”
날 빤히 보다가 어이 없다는 느낌으로 살짝 웃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멀뚱멀뚱 보고 있으니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뭐 좀 먹으라는 사람은 있었어도 먹지 말라는 말은 처음 들어서요.”
“아. 드셨으면 하죠. 근데 억지로 먹는 게 안 좋다고요.”
“괜찮습니다. 개인 성향을 업무에 반영하진 않습니다.”
개인 성향이 아니라 병이다.
거식증을 이름만 알고 있던 터라, 묵은지가 섭식 장애를 앓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조금 찾아봤는데.
결코 성향으로 여길 수 없는 병이었다.
묵은지가 밥을 아주 조금만 집어서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지로 입을 감쌌다. 삼키고 싶진 않아서 뱉은 모양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어때요?”
“그렇습니다.”
“네?”
“오랜만에 먹어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연다.
“어떻게 다릅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몰라서 물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