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65화
15. 진주(2)
“무슨 짓이야!”
백우진을 떨쳐냈다.
“배고파서 그런다! 왜!”
“이게.”
옷을 붙잡고 옥신각신했는데 생각보다 힘이 약하다.
조금 힘을 줘서 흔들었더니 백우진이 춤추는 풍선 인형처럼 움직였다.
조금 재밌다.
“그만해!”
“조금만 더 하면 안 돼?”
“어지러워. 나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백우진을 내려놓았다.
“너 운동 좀 해야겠다.”
“또 그 소리. 그거 다 지찬이 형한테 가스라이팅 당한 거라니까?”
“아니야. 너 그러다 내 나이 되면 나랑 똑같아져.”
걱정되어 한 말인데 들은 척도 안 한다.
“나 진짜 이제 못 버텨. 빨리 뭐라도 먹자. 어? 빨리.”
“지찬이 형이 몇 군데 소개해 줬는데.”
차지찬과 나눈 메시지 창에 진주라고 검색했다.
차지찬은 육회비빔밥으로 유명한 C식당과 진주냉면 전문점 H식당, 장어 맛집으로 소문난 Y식당 그리고 특이하게도 스페인 요리를 다루는 O식당을 추천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12시 8분이다.
“나 육회비빔밥 먹을래.”
“여기 이 시간에 사람 엄청 많대.”
“그럼 냉면.”
“가자.”
내비게이션에 H식당을 검색하니 지점이 여럿 나왔다. 진주 안에서도 이렇게 지점을 낼 정도니 확실히 맛집이긴 한 모양이다.
“본점파야?”
직영이라고 해도 맛집은 무조건 본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물었다.
“가까운 게 좋아.”
정말 배가 많이 고픈가 보다.
나도 굶기는 마찬가지라 가장 가까운 촉석루점으로 길을 잡았다.
“와. 크다.”
겉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매장 크기에 놀랐다.
지점이 있음에도 매장을 이렇게 넓게 운영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벌써부터 기대된다.
상 두 개를 차지하고 한쪽은 제작진, 한쪽은 나와 백우진이 앉았다.
“난 물냉.”
백우진이 다급히 말했다.
“나도 물냉.”
“비빔이 더 좋다며.”
첫 번째 백반토론 때 비빔냉면을 지지했었다.
“물냉이 더 맛있지.”
“어이없어.”
“육전도 시킬까?”
“육전 말고 갈비. 갈비 먹자.”
백우진이 메뉴판을 보며 말했다.
육전이 냉면 위에도 올려져 나온다고 알고 있고, 내 인생에서 가장 배고픈 18시간을 보낸 터라 예산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배부터 채우고 생각할 문제다.
“저희 물냉면 2개랑 돌판 소 참갈비 2인분 주세요.”
“이쪽은.”
“따로 주문하실 거예요.”
박상철 PD를 보며 말했다.
자기들 먹을 것까지 사 달라고 하면 양심이 있냐고 따질 생각이었는데 그럴 정도로 안하무인은 아닌 모양이다.
“오늘 점심 두 번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백우진의 힘없는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렇게 오랫동안 배를 비워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배가 고프면 손이 떨리는 모양이다.
“나 봐. 배고파서 손도 떨려. 식은땀도 나는 것 같고.”
백우진이 히매가리 없는 얼굴로 날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형, 혈당체크기 있어?”
“응. 왜?”
“재 봐. 저혈당 증상 같은데.”
“내가?”
“빨리.”
듣고 보니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저혈당이 오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들었다.
비슷해서 서둘러 혈당을 체크하니 57이 나왔다.
“어?”
당뇨병 판정 받은 이후로 처음 보는 수치다. 57이란 숫자가 가능한지도 몰랐을 만큼 생소하다.
“다행이네. 저혈당 기준이 50으로 알고 있는데.”
백우진이 안도하며 말했다.
“근데 엄청 낮은 수치긴 해. 정상 범주가 60부터 120 사이야.”
“와. 나 배고파서 이런 줄 알았어. 너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다 먹어. 어? 지금은 단 거 먹어도 돼. 아니, 먹어야 해.”
“……그러네?”
내게 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저혈당 증상이 찾아와 그동안 먹지 못했던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이었다.
저번에 찾아왔던 가짜 저혈당과 달리 지금은 수치상으로도 혈당이 낮으니 오늘은 마음껏 먹을 생각이다.
저혈당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억제해 온 식욕을 풀 생각 때문인지 점점 더 초조해졌고 마침내 음식이 내 앞에 당도했다.
직원분이 식탁을 채워가는데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무슨 냉면집 밑반찬이 이래?”
“그니까.”
백반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밑반찬이 푸짐하게 나왔다.
메밀묵에 나물, 김치, 전, 샐러드.
무엇보다 선지국이 일품이다.
“와. 국물 먹어 봐. 진짜 대박이다.”
“흐어어.”
백우진이 거의 울면서 반찬을 집어 먹었다.
“냉면 나왔습니다.”
냉면 놓을 자리도 부족하다.
식탁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진주냉면은 보기에도 푸짐하고 시원했다.
맑은 육수 위로 육전과 계란지단이 푸짐하게 쌓여 있다.
빨갛고 노랗고 녹색까지 여러 색이 함께 있어 보기에도 맛있어 보인다.
“잘 먹겠습니다.”
면을 섞기 전에 우선 육수를 쭉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오는 서늘한 감각과 입 안에 감도는 감칠맛이 멀리 진주까지 온 보람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 진짜 고기 육수 내나 봐.”
백우진도 감탄한다.
내가 알기로 보통 냉면집은 시판되는 육수에 감미료를 첨가할 텐데, 국물이 이렇게나 맑으면서 감칠맛이 돈다면 감미료는 써도 분명 고기 육수일 거다.
그만큼 맛이 깊다.
“으음.”
이번에는 면을 크게 넣었다.
과거에 칡냉면으로 불렀던 쫄깃쫄깃한 면빨을 매우 혐오하는데, 이 집은 면이 아주 훌륭하다.
질기지 않으면서도 메밀향을 풍기는데 정말 만족스럽다.
“뜨겁습니다.”
직원분이 소갈비를 소개해 준 순간 사랑에 빠졌다.
탐스럽게 익은 구리빛 살결과 허리에 두른 노란 랩스커트가 너무나 폭력적이다.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소갈비보다도 건강하고 활력이 넘친다.
싱그럽게 빛나는 하얀 자갈 위를 내달리며 웃는 구릿빛 살결의 소갈비에 이끌려 젓가락을 가져다댔다.
“으음.”
“맛있어!”
백우진이 눈을 감고 몸서리쳤다.
파인애플을 작게 잘라 갈비, 양파와 함께 먹으니 입 안에서 난리가 났다.
파인애플의 단 과즙이 소갈비의 육즙과 만나면서 춤추기 시작하는데.
육질과 과육, 양파가 어우러져 씹을 때마다 달라지는 식감 또한 예술이다.
백우진은 앉은 채로 삼바를 추고 있다.
“여기 진짜 맛있다. 그치.”
“그니까. 와. 여기서 더 먹어도 되겠는데?”
“이렇게 갈비 쓰면 진짜로 육수도 고기로 내는 건가 봐. 고기를 떼올 테니까. 형. 형. 듣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면서 면빨을 빨아들였다.
* * *
냉면 한 그릇 더 먹고 싶었지만 진주에는 맛집이 너무도 많다.
강릉, 경주 때와는 다르게 예산도 풍족하니 다른 곳도 가볼 생각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58,500원입니다.”
계산을 하는 순간 아차 싶다.
배가 차고 나니까 슬슬 예산을 걱정하게 되는데, 한 끼에 58,500원이나 썼으니 호강을 제대로 했다.
“그래도 오늘은 20만 원이나 있으니까.”
“있으니까~”
앞으로 갈 곳이 남아 있더라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돈이 수중에 있다.
“그럼 좀 걸으면서 소화 좀 하다가 점심 시간 지나면 C식당 가볼래?”
“찬성. 나 가보고 싶은 데 있는데.”
“어디?”
“진주성.”
“거기가 어딘데?”
“논개 이야기 알아? 거기서 있었던 일이야.”
“아.”
임진왜란 당시 적군 장군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든 영웅 이야기다.
“나중에 소설에도 써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한번 가보고 싶었어.”
“그래. 가자.”
어차피 백반따라는 제작진이 정해주는 게 없다시피 하다.
발길 닿는 곳에 가다가 먹고 싶은 걸 먹어도 되니까 부담이 없다.
“가까워?”
“응. 엄청 가까워. 걸어서 몇 분도 안 돼.”
“그럼 걸어 가자. 주차장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니까.”
천천히 남강의 봄바람을 맞으며 발을 옮겼다.
백우진이 말한 대로 조금만 걸으니 논개길이 나왔고 정면에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사로를 올라 입장비를 지불하고 들어서자마자 바로 촉석루가 보인다.
루에 앞에는 사람들이 벗어놓은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와 백우진도 신발을 벗고 촉석루에 오르니 탁 트인 시야와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와.”
“좋다.”
봄이 완연해지기도 했고 남쪽으로 와서 살짝 더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곳은 선선한 바람이 분다.
카메라 감독은 경치에 반하셨는지 남강을 카메라에 담았고 박상철 PD와 작가는 촉석루 아래로 내려갔다.
백우진도 관심을 보이길래 따라 내려갔더니 진주 의암이 나타났다.
이곳이 논개가 적장을 물리친 장소인 듯하다.
백우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무엇인가를 적었고 남강 바람을 충분히 만끽한 뒤 걸음을 옮겨 진주성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1시간 30분 정도 구경하고 나오니 후문 건너편에 Y식당이 보였다.
3층 높이 건물로 지붕이 기와 형태로 되어 있어 진주성과 잘 어울리는 건물이다.
“어.”
“왜?”
“저기 지찬이 형이 추천하더라고. 장어 맛있다고.”
“장어?”
백우진이 눈을 빛냈다.
“먹을까?”
“이건 동선이 너무 완벽하잖아. 당연히 먹어야지.”
“그치?”
적당히 걸어서 소화도 됐겠다.
애초에 냉면으로는 배가 다 차지 않아서 망설이지 않고 Y식당 문을 열었다.
내부는 상당히 깔끔하다.
연등을 걸어 두었는데 진주성에서 연등 축제를 하기에 분위기를 맞춘 듯싶다.
“어디 보자.”
“바다장어랑 민물장어가 있네. 뭐가 더 맛있어?”
“민물이 더 맛있지. 봐, 더 비싸잖아.”
바다장어구이는 1인분에 24,000원이고 민물장어구이는 1인분에 32,000원이다.
“음. 그럼 민물로 2인분 시킬까?”
“민물 하나 바다 하나는 어때?”
“그래.”
“사장님, 저희 민물 하나 바다 하나 주세요.”
주문하고 식당 내부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1972년부터 매장을 이어왔다는 소개 문구가 인상적이다.
육회비빔밥으로 유명한 C식당이 100년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진주에는 전통을 오래 잇는 매장이 많은 모양이다.
냉면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배가 고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