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67화
16. 첫 광고(1)
“젓가락으로 해야지. 그래야 밥알이 안 뭉개져.”
숟가락으로 육회비빔밥을 슥슥 비비자 백우진이 젓가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근데 젓가락으로 비비는 게 빠를까. 숟가락이 빠를까?”
“숟가락?”
“그치. 이건 식사 예절하고도 관련 있는 일인데. 다른 사람하고 같이 밥을 먹을 때는. 특히 이렇게 가운데에 공동의 음식이 있을 때는 최대한 빨리 자기 몫을 먹어야 해.”
“왜?”
“그래야 불고기에 집중할 수 있거든.”
백우진이 입을 살짝 벌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게 뭐야.”
“이래서 네가 멀었다는 거야.”
혀를 찼다.
“생각해 봐. 이건 불고기의 주인은 빨리 먹는 사람이야. 경쟁이라고.”
“반씩 먹으면 되잖아.”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니까 아직 100㎏도 안 되는 거야. 이 되다 만 돼지야.”
“……어?”
“중국집 탕수육. 냉면집 만두. 샤브샤브집 소고기. 패스트푸드점 감자튀김. 그리고 여기 석쇠 불고기 모두 치열한 수싸움과 우월한 피지컬로 경쟁해서 쟁취하는 음식이야.”
백우진이 눈을 깜빡인다.
“여기서 우리 돼지들은 암묵적 합의를 거치게 돼.”
“무슨?”
“공동의 음식만 먹지 않기. 이 룰이 없으면 모두 탕수육, 만두, 감자튀김, 불고기부터 달려들잖아.”
“이해가 안 되는데 일단 계속 말해 봐.”
“단, 자기 음식을 다 먹은 사람은 공동의 음식을 먹어도 되는 권한이 부여 돼. 합법적인 식사지.”
“그냥 적당히 먹으면 안 돼?”
“지금까지 내 말을 듣긴 했어? 이건 경쟁이야. 싸움이라고. 치열하게 투쟁해서 한 점이라도 더 먹어야 한다고.”
“그런 거 몰라.”
“이건 아주 기본적인 예절이야. 우리나라 밥상 예절 3대 원칙.”
“나머지 두 개는 뭔데?”
“탕수육 먹기 전에 찍먹이냐 부먹이냐 물어보기. 고기는 얻어먹는 사람이 굽기.”
백우진이 눈을 굴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더치페이면?”
“그럼 역할을 나눠야지. 고기를 굽지 않은 사람이 반찬 리필을 하는 식으로.”
“셀프가 아니면?”
“쌈을 싸서 먹여줘야 해.”
“쌈?”
“고기를 굽는 사람에게 쌈을 싸 먹여줌으로써 너의 노고에 감사한다. 네가 구운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먹어봐라. 그런 의미지.”
“남자끼리라도?”
“남자끼리라도.”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
“야, 너 사람이 물에 빠졌어. 당장 CPR 해야 하는데 남자끼리라고 호흡 안 불어넣을 거야?”
“상황이 다르잖아.”
“다르긴 뭐가 달라. 숨을 못 쉬는 일하고 고기를 못 먹는 일하고 뭐가 다른데.”
백우진이 눈을 깜빡이다가 박상철 PD를 보고 말했다.
“형, 이 형 이상해.”
박상철 PD가 어이없는지 헛웃음 지었다.
“아무튼 비빔밥 두 술에 불고기 한 젓가락. 그 이상은 안 돼. 불고기를 연속해서 먹을 수 있는 상황은 비빔밥을 다 비웠을 때야.”
“알았어.”
백우진이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비비고 있는 사이, 나는 완성된 비빔밥을 크게 한 입 먹었다.
“어?”
제철 나물과 호박, 김가루, 육회 그리고 고추장만 들어 있는 비빔밥의 첫인상은 부드러움이었다.
나물은 숨이 죽지 않고 식감이 살아 있다.
고추장이 많아서 잠시 망설였는데, 매운맛보다는 깊은 맛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간이 세지 않으면서도 감칠맛이 부각된다.
여러 맛집을 다니면서 느끼지만 소문난 식당은 대부분 간이 적당하여 먹기 수월하고 그 안에서 오묘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식당들이 대부분 짜고 매운 음식을 내면서 그래야 장사가 된다고 하지만, 내가 다닌 맛집은 전부 너무 짜거나 매운 음식을 내놓지 않았다.
간이 센 음식들은 즐겨 먹기 힘들고.
이렇게 먹기 편안한 음식이 자주 찾을 수 있으니 맛집으로 오랫동안 사랑받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함께 나온 선지국을 한 술 떠 먹었다.
역시나 속이 편안해지는 맛이다.
“이거 봐. 내 생각이 맞다니까.”
“뭐가?”
“맛집은 대부분 이렇게 간이 안 세고 속이 편한 음식을 팔더라고.”
주 메뉴와 국을 맛봤으니 이제 반찬을 살필 차례다.
섞박지 맛은 어떨지 궁금해 가장 먼저 집었는데, 어마어마하게 짜다.
“…….”
“왜? 맛있어?”
백우진이 섞박지를 먹고는 날 물끄럼히 쳐다보았다.
“맛집은 안 짜다며.”
“메인 메뉴가 슴슴하니까 이렇게 짠 것도 있어야지. 그걸 몰라?”
“그래?”
“그럼. 여기가 어디야. 진주잖아. 남쪽에 있는 도시. 더운 지방은 땀을 많이 흘리니까 염분 섭취가 중요하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짠 반찬도 중요하지.”
“오. 좀 그럴듯해.”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했는데 다행히 납득한 것 같다.
* * *
진주에서 서울까지 운전해서 오니 시계가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작진, 백우진과 인사하고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는데, 현관을 열자마자 그대로 누워버렸다.
“이거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은 하루라 마음과 위장은 행복하나, 육체 피로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일어나 옷 벗을 기운도 없다.
“내일 업로드할 영상도 있는데.”
편집할 상태가 도저히 아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혼자 해결했는데 일이 늘어나니 점점 벅차다.
이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외주 쓰자.”
묵은지가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는 있지만 당장 영상을 올릴 사람이 필요하다.
이대로 일주일에 영상을 5개씩 올리는 미친 일정을 소화할 순 없다.
유튜브 수익도 오르는 추세고.
박상철 PD가 힘을 써 주어 출연료도 작게나마 올랐다.
도시락 사업에 쓰려고 따로 떼어 놓았던 1억 원도 나눠 부담하기로 했으니 자금 여유는 어느 정도 생겼다.
건강을 잃을 바에야 돈을 쓰는 게 맞다.
내일 공인노무사에 상담해서 프리랜서 계약서를 만들고, 묵은지에게 부탁해서 편집자 구인 공고를 내라고 해야겠다.
“일단 자고.”
세수랑 발만 닦고 곧장 침대에 엎어졌다.
눈을 감으니 오늘 먹은 음식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진주냉면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고 진주장어는 왜 미처 지금까지 몰랐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훌륭했다.
또 100년을 넘게 자리를 지켜왔다는 육회비빔밥 식당은 다음에는 꼭 육회와 선지국을 제대로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분을 제대로 전달했을까.
고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의식이 멀어진다.
“…….”
부우웅- 부우웅-
잠들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이 늦은 시간이 어떤 놈이 연락을 하는지 정말 무례하다.
이불을 들어올려 귀를 막았음에도 진동이 끊이질 않는다.
“아. 누구야.”
손을 휘저어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니 오전 10시 30분.
알람 맞춰놓은 시간이다.
“말도 안 돼.”
나 방금 잤는데?
* * *
진주 촬영을 다녀온 다음 날.
화요일 오후에 출근했다.
이번 주부터 오후 출근을 하자고 약속한 게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온몸이 얻어 맞은 것 마냥 쑤신다.
근력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러는 걸 보면 진짜 피곤하긴 한 모양이다.
“대표님.”
사무실 앞에 이르니 묵은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출근해서 일할까 봐 열쇠를 안 줬는데 그러기를 잘했다.
“안녕하세요. 언제 오셨어요?”
“5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아주 좋아요. 다음에는 5분 늦게 도착할 수 있게 노력해 주세요.”
묵은지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결국 수긍했다.
“그보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PD님도요.”
환자나 다름없는 두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서니 의사만 없을 뿐 병원이나 다름없다.
“당분간은 편집 외주로 돌리려고 해요.”
“그러셔야 합니다.”
묵은지가 바로 수긍했다.
공부하는 중이라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건만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오늘 노무사랑 상담해서 프리랜서 계약서 만들 거예요. PD님은 구인공고 글 작성해 주세요.”
“둘 다 제가 하겠습니다. 대표님은 오늘 업로드될 영상만 신경 쓰십시오.”
“괜찮겠어요?”
“하던 일입니다. 내일 쿡쿡이와 미팅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당밥솥 업체다.
그동안 유선상으로만 진행했던 광고 계약을 내일 만나서 결정하기로 했었다.
묵은지가 제안했던 도시락 사업 이야기를 건네니 쿡쿡이 측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고.
연락하던 사람이 대리에서 팀장으로 바뀌었다.
직급이 있으니 아마 내일 미팅에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을 듯싶다.
“해야죠. 지금 돈 많이 벌어야 해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건강을 잃으면 돈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묵은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왜 그러십니까?”
“본인한테도 적용되는 말 아니에요?”
“저는 건강합니다.”
“…….”
쑥 들어간 볼과 앙상한 팔, 어두운 눈 주변 등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함부로 언급할 수 없다.
“전 PD님을 존경해요.”
뜬금없었는지 묵은지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로요.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해내는 책임감도 그렇고. 뭐든 센스 있게 나서는 점도 그렇고.”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더 열심히 안 하셔도 된다고요. 지금도 대단해요. 진심이에요.”
섭식 장애.
특히 거식증을 앓는 사람 가운데는 강박증을 가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먹는 게 없으니 활동량도 줄 수밖에 없는데, 거싱증 환자는 대부분 운동이라든가 일에 열중해서 체중 감소가 더더욱 심각해진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를 옳다고 여겨 스스로 거부한다는 점인데.
그러한 금욕적인 정신이 완벽주의나 결벽증, 강박증과 유사하다고 들었다.
묵은지가 섭식장애를 가졌단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조금씩 거식증에 대해 알아보고 그녀를 관찰했는데.
업무를 완벽히 처리해내는 점이나 본인에게 엄격한 점 등 모두 책에서 본 내용과 맞아 떨어졌다.
난 의사가 아니고, 그녀의 사생활에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묵은지에게 본인이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인지는 알려주고 싶다.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이는 강박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제가 성실한 편이긴 합니다.”
“…….”
“하실 말씀 끝났으면 계약서 작성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쩌면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