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76화
17. 메뉴 개발(7)
다음날.
편집 외주자 포트폴리오를 확인하는데,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몇 보인다.
묵은지가 한 번 정리해 준 덕분에 사람을 쉽게 추릴 수 있었다.
“PD님.”
“네.”
“다들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이 네 분한테 어제 백반토론 원본 영상 보내주시고 20분 맞춰서 편집해 보라고 해주세요.”
반찬가게 스타일을 얼마나 잘 소화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마지막 과정이다.
네 명 중에 가장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두 사람을 뽑을 생각인데, 아무리 테스트라도 노동에 대한 대가는 줘야 한다.
건당으로 치면 보통 10만 원부터 시작하는데, 업로드하는 영상이 아니고 내부 테스트를 위한 일이니 최저로 맞추더라도 이해할 것이다.
“기한은 어떻게 잡으시겠습니까?”
묵은지가 물었다.
“모레 자정까지로 하죠. 다음 날 10만 원 보내준다고 알려주세요. 이미지랑 음악은 상업 이용 가능한 무료 소스를 활용하라고 해주시고.”
묵은지가 내 말을 요약해 적는다.
“단가는 확인용 작업이라 최저로 맞춘다고 설명해 주세요. 계약서 작성할 땐 건당 20만 원 명시한다는 말도요.”
구인 공고에 건당 200,000원을 준다고 적어두었기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설명을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송 시간 전까지 편집을 끝내려고 서두르는데 묵은지가 불러 세웠다.
“네.”
“급여 입금을 실수하셨습니다. 계좌번호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묵은지가 스마트폰을 꺼내 자기 계좌를 보여주었다.
오늘 출근하자마자 묵은지에게 보낸 저번 달 급여 3,045,970원과 인센티브 3,045,970원이 제대로 찍혀 있다.
“맞는데요?”
“두 번 보내셨습니다. 아무래도 오류가 생겼던 모양입니다.”
묵은지가 급여와 인센티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실수령액의 100%를 지급해서 오해한 모양이다.
“아니에요. PD님한테 드린 거 맞아요. 쿡쿡이 계약 건으로 드리는 인센티브예요. 봐요. 인센티브라고 적었잖아요.”
묵은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PD님 없었으면 1억 받을 일이었어요. 2억 챙겼으니 당연히 인센티브 드려야죠.”
“이런 일은 회사가 안정된 이후에 진행하셔도 됩니다.”
“당장은 넉넉해요. 도시락 사업에 쓸 돈도 아꼈고 광고비도 챙겼고.”
“…….”
“받아도 돼요.”
묵은지가 고장났다.
무슨 말을 해도 가만히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아직 인센티브를 어떻게 지급할지 정해두진 않았는데, 앞으로도 비슷하게 진행할 거예요.”
“과합니다.”
“전혀 과하지 않아요. 이 회사 저랑 PD님 둘이서 운영하잖아요.”
어쩌면 과할지도 모르겠다.
직장생활 할 때 인센티브를 받아본 적 없고 다른 회사에서는 어떤 기준으로 지급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건강도 시간도 취미도 포기한 채 내 일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인센티브는커녕 연봉 협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뭘 했냐’,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냐’와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 일이 한 해, 두 해 반복되면서 회사를 아끼는 마음과 내 일만큼은 제대로 처리했다는 자부심은 사라졌다.
나는 반찬가게가 그런 회사가 되길 바라지 않고.
묵은지가 이 회사를 그때의 나와 같은 마음으로 대하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말씀드렸던 거 진심이에요. 그러니 이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대단했어요. 고마워요.”
묵은지가 스마트폰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참, 다음 주부터 새 콘텐츠 준비하는 거 어떻게 되고 있어요?”
“작성 중입니다. 월요일에는 드릴 수 있습니다.”
“좋네요.”
오늘 방송 예정 시간까지 4시간 남았다. 서둘러야 영상 하나를 뽑아낼 수 있다.
* * *
‘대단했어요. 고마워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콕콕이와의 광고 계약 협상 자체는 성공적이나,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를 다닐 적에는 한 달에 서너 번씩 성사시킨 수준이었다.
매주 업무 보고에 한 줄로 작성되는 사소한 일이었다.
‘3,045,970원.’
월급에 100%에 달하는 인센티브 역시 생소했다.
묵은지가 입사했을 때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는 아직 신생 업체였고, 대표는 회사가 성장 중이니 인센티브는 추후에 나누자고 얘기하며 직원들을 달랬다.
아쉽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직할 여건은 안 되었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반찬용의 말처럼 당연하지 않았다.
점심 즈음에 날아온 메시지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계좌를 열어보니 급여 3,045,970원과 인센티브 3,045,970원이 각기 따로 입금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새로고침을 눌렀고 인센티브라는 글자를 놓칠 리 없었다.
반찬용의 의도를 모를 수도 없었다.
순간 너무 놀랐지만 이내 걱정이 따랐다.
당장 한 달 전만 해도 인건비를 더 지출할 여유가 없어 대표가 모든 영상을 홀로 편집해 왔는데 이렇게 큰 돈을 받아도 되나 싶었다.
이 돈을 아껴 외주 편집자에게 지급한다면 반찬용의 부담이 훨씬 줄어드리라 생각했다.
해서 묵은지는 모른 척하며 반찬용에게 말을 꺼냈다.
본인에게 지급된 인센티브를 실수로 취급한다면, 반찬용도 금액을 돌려 받을 명분이 생기니 부담 없이 돈을 돌려주고 싶었다.
고민해 볼 법도 한데 반찬용은 그러지 않았다.
태연하게 당연한 일이라며 대단했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당연한 대우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쿡쿡이와의 계약은 반찬가게의 첫 광고 계약이면서 아쉬운 자금 사정을 타개할 수단이었기에 응당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노력과 성과를 인정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당연했던 노력이 특별해지고.
특별했던 보상이 당연해졌다.
묵은지는 아직 그 변화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아주 오래 전에나 경험했던, 그래서 잊고 살았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묵은지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벽 너머 반찬용은 어제 방송을 되돌려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눈에 담은 그녀는 들뜬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 주 새 콘텐츠로 활용할 자료를 찾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밤 10시가 되어 반찬용에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섰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근처 공원 앞에서 내렸다.
봄을 맞이해 나무에 피어난 꽃들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살랑거렸다.
꽃구경 다닐 시간도 친구도 없었지만 출근길과 퇴근길에 거니는 이곳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묵은지가 이어폰을 꺼내 끼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 은지야.
“잤어?”
-졸고 있었어. 왜?
“아니. 그냥.”
-지금 퇴근하는 거야?
“응.”
-아이고. 이 시간까지 사람을 괴롭힌대냐.
“아니야. 우리 12시 출근이라 지금이 맞아.”
-그래? 힘든 건 없고?
“응. 하나도 안 힘들어.”
-후회 안 해?
대기업 자회사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를 그만두고 스타트업에 들어간 딸이 걱정되었다.
“잘한 것 같아.”
-그래? 무슨 일 하는데?
“대본 쓰고. 계약하고. 사람도 구하고. 편집 공부도 하고.”
딸의 말을 듣던 어머니의 걱정은 더해졌다.
소규모인 만큼 한 사람이 해야 할 역할이 너무나 많아 보였다.
“밥도 짓고 물도 마시고.”
-뭐? 사장이 밥도 지으라고 시켜? 요즘 세상이 어떤데.
“아니히.”
웃음이 터졌다.
“밥솥 광고하는데 홍보 영상 찍다 보니까. 물은 음. 그럴 일이 있었어.”
대기업 다니던 귀한 딸을 꼬드기더니 밥을 짓게 한다고 해서 성이 났건만.
딸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몇 년만에 듣는 밝은 목소리인지 몰랐다.
-다닐 만한가 보네.
“응. 있지.”
묵은지가 잠시 뜸을 들였다.
-뭔데?
“나 오늘 월급 받았는데 인센티브도 받았다?”
-정말?
“응. 300만 원.”
-월급이 300만 원이라 하지 않았어?
“인센티브로 받았다고. 월급 100%. 나 한 번에 600만 원 들어온 적 처음이야.”
-히~ 정말이야? 정말 그랬어?
“그렇다니까. 대표님이 나 정말 잘했대.”
-아이고 기특해라. 뭘 했길래 보너스를 그렇게 많이 줘?
“아까 밥솥 광고했다고 했잖아. 그거 계약금 협상하는데 금액을 좀 올렸거든.”
-큰일했네. 사장이 그렇게 보너스를 줄 정도면 엄청 잘했나 봐.
어머니에게 본인이 했던 일을 설명하니, 흔하고 당연했던 일이 조금씩 특별해졌다.
“아니,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닌데…….”
묵은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이 그러시더라고. 대단했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서 괜히 민망해진 묵은지는 괜히 길에 놓인 작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 * *
토요일.
‘반찬을 만들어 주지용’을 시작하기 전에 도시락 메뉴를 의논하고자 부천에 모두 모였다.
말로 하다 보니 끝이 없어서 결국 각자 한 가지씩 적어서 생각을 공유하자고 말을 모았고.
메뉴 개발 책임자인 주지승이 접힌 쪽지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제육볶음, 떡볶이, 닭가슴살.”
주지승이 책상을 내려쳤다.
“너희 장사할 생각 있긴 하냐?”
나도 백우진도 차지찬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다이어트 도시락에 떡볶이를 집어 넣어. 백우진 너지?”
백우진을 보며 말했다.
“희망사항 적으라며! 제로 떡볶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지!”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러는 닭가슴살 이건 뭐야. 삶은 닭가슴살을 누가 돈 주고 사 먹는데! 이거 지찬이 형이지!”
“다이어트하면 닭가슴살이지. 내가 광고하는 거 쓰면 싸게 떼올게.”
“그냥 생닭가슴살을 삶아서 주자고? 욕 먹고 싶어 작정했어?”
“제육볶음보단 낫지. 이거 찬용이 너냐?”
“제육볶음이 뭐 어때서. 설탕만 안 넣으면 완전 맛있는 영양식인데.”
“다들 진정하고.”
주지승이 쪽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메뉴는 나 혼자 생각할게. 그게 맞는 것 같다.”
“그건 아닌 것 같아.”
걱정이 앞서 말리니 백우진과 차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형이 만든 다이어트 도시락을 누가 믿어.”
“뭐?”
“그렇잖아! 어제 올라온 영상 뭔데!”
“백우진, 너 아무리 그래도 형한테 너무하잖아.”
백우진이 빽 소리치자 차지찬이 말렸다.
“너무하긴 뭘 너무해? 이 형 어제 건강식이라고 올린 영상 못 봤어?”
백우진이 유튜브를 틀었다.
짧고 가느다란 꼬치에 방울 토마토와 대파를 번갈아 끼우고 사과잼을 듬뿍 바른 와플로 감싼 뒤 녹인 초콜렛에 담갔다 빼서 굳히는 영상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이해했을 텐데 그걸 튀김옷에 묻혀 튀기는 장면에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나님 맙소사.”
“이딴 걸 올리는데 건강 도시락? 사람들이 믿겠어?”
백우진의 말이 맞다.
“요즘 이래야 조회 수가 나와. 건강식도 하잖아. 오늘도 찬용이랑 만들 건데 뭐.”
주지승이 자기변호에 나섰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건 어떨까요?”
반야식경의 최미카엘 PD가 나섰다.
“가면 같은 걸 씌우고 음식을 하는 거예요. 부캐 느낌으로. 누가 봐도 반야식경 주지승이지만 도시락 만들 때는 건강 음식만 만드는 캐릭터로 나서는 거죠.”
백우진 차지찬과 함께 주지승을 빤히 보던 중 좋은 생각이 났다.
“형, 승복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