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83화
18. 백승용차(6)
경차가 준중형이 되고 준중형이 중형이 되고 준대형, SUV, 트럭까지 이어지니 조언을 구해봤자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타고 다닐 자동차니 직접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다 싶어 자동차 전시장을 몇 군데 돌아다녔는데.
내 몸에 경차나 준중형은 조금 좁은 느낌이라 선택지를 줄일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어떤 차를 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으음.”
의자에 앉은 채 빙글빙글 돌며 고민을 이어가던 차, 묵은지가 문을 두드렸다.
“네.”
“이번 주에 제안받은 광고 리스트 목록입니다.”
“아, 고마워요.”
쿡쿡이 밥솥 홍보 영상이 30만 조회 수를 기록하면서 제법 효과를 봤었다.
그 덕에 요즘에는 조리도구 업체 측에서 광고 요청을 해오는데, 요리사도 아닌 내가 맡아도 되는지 의문이 들긴 한다.
“제빵기?”
생소한 제품이라 되물었다.
“가정용 소형 제빵기입니다. 반죽부터 굽기까지 모든 과정을 소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최근 빵 가격이 워낙 높다 보니 니즈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새 빵이 비싸요?”
그러고 보니 당뇨 때문에 빵 사 먹은 적이 오래되었다.
“찾아 보니 상당히 비싸게 느껴졌습니다.”
제빵기로 검색해 보니 제조업체, 유통업체가 상당히 다양하다.
“갓 나온 빵이 맛있긴 하죠?”
묵은지가 멀뚱멀뚱 서 있다.
갓 나온 빵을 먹어본 적 없는 것 같다. 있어도 아마 기억이 안 날 것이다.
“이건 제가 성능을 모르니까 리뷰로 돌리죠. 제품 제공 요청드리면서 영상 올려도 되는지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도 돈 많이 벌고 싶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구독자와의 신뢰다.
사람들이 내 영상을 보는 이유는 진정성을 느끼기 때문인데, 돈을 벌겠다고 아무 제품이나 광고를 한다면 점차 신뢰를 잃을 거다.
그런 뒤에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 없음을 수많은 유튜버를 통해서 배웠다.
그보다는 차가 고민인데.
여전히 갈피를 못 잡겠다.
“고민 있으십니까?”
묵은지가 물었다.
어떤 자동차가 좋을지 물어보려다가, 도움은커녕 고민만 늘었던 기억 때문에 망설이니 묵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광고를 신중히 대하시는 건 좋은 태도입니다. 망설이실 필요 없습니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묵은지가 날 빤히 본다.
“법인 차량 살까 싶은데 뭐가 좋을지 애매해서요.”
“용도가 어떻게 됩니까?”
“출퇴근할 때 너무 힘들더라고요. 요새 날씨도 덥고, 자는 시간 조금 아낄 수도 있을 것 같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또 만약에 지방 맛집 탐방 가려면 대중 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도 있잖아요? 그럴 때도 필요할 것 같고요.”
“맛집 탐방 콘텐츠를 살릴 생각이십니까?”
“언젠가는 그래야죠. 요새 혈당도 안정되었고 지찬이 형이나 지승이 형처럼 되면 먹어도 괜찮대요.”
내 경우에는 비만으로 인한 당뇨기 때문에 다이어트로 체지방률을 줄이고 근육을 충분히 키우면 혈당이 안정될 수 있다고 한다.
계속 관리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라면 승차감을 가장 먼저 고려하셔야 합니다.”
“그러네요. 지방도 다니고 할 거면.”
그런 의미에서 경차나 준중형은 조금 힘들다.
“우리 사무실 건물 주차장은 좁습니다. 차량도 많고 게다가 대표님 출근 시간에는 이미 만차일 경우가 많을 겁니다. 너무 큰 차는 선택지에서 제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맞아요.”
출퇴근 시간만 되면 지하주차장이 아수라장이다.
한 번씩 1층으로 드나들 때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차들이 줄줄이 서 있는 장면을 몇 번 봤다.
더욱이 난 12시쯤 출근하니 빈자리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확실히 트럭, SUV처럼 큰 차량은 피하는 게 좋겠다.
“드디어 상담을 받네요.”
“무슨 말씀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근데 차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관심만 있습니다.”
“그래요?”
“저도 출퇴근이 불편해서 알아보는 중입니다.”
역시 직접 구매하려는 사람이 이것저것 고려해보는 것 같다.
“혹시 또 얘기해 주실 거 있어요?”
“비용처리를 고민하신다면 어느 정도 가격이 있는 차량을 추천드립니다. 대표님이 타고 다니실 테니 국산차가 이미지에 좋으니 국산 차량 중 준대형 내지 대형을 찾아보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대형은 왜요?”
“보는 눈 때문입니다.”
묵은지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가 성장하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반찬가게의 대표가 어떤 차를 타고 사무실은 어디에 있는지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업의 역량을 보지 못하니 그런 저열한 판단 수단을 사용하는 겁니다.”
“저열.”
“그런 사람과 일해야 할 때도 옵니다. 부조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뚱뚱한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비슷한 대화를 했었다.
묵은지는 이러한 부조리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라 나와는 가치관이 다른데 그 논리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러네요. 그럴 수 있겠어요.”
묵은지는 굳이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는 저답게 살고 싶어요. 손해 볼 수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런 사람과 하는 일에 스트레스가 따르지 않을까요?”
묵은지가 곰곰이 생각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들하고 일 안 해도 잘 먹고 잘 사는 걸 목표로 하죠. 그러려고 대기업 계약 무시하고 차린 회사잖아요.”
씩 웃으니 묵은지도 살짝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다.”
* * *
“PD님, 자동차 계약하려 하는데 같이 갈래요?”
“오늘입니까?”
“네. 저 자동차 처음 사서 좀 어버버댈 것 같은데, PD님이 같이 계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자동차 계약은 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동행하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서는 대표님의 뒷모습이 전에 없이 밝다.
법인 명의라고는 하지만 자동차를 산다는 일 자체로 들뜬 듯싶다.
개인 방송을 통해서 예전에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충분히 들었다.
한때는 돈이 없어 고시원에서 주는 라면과 밥만 먹고 살았으니 50만 구독자를 확보한 대형 채널을 운영하고.
본인 사업체가 있으며 자동차를 사는 일이 얼마나 기쁠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35살 남자가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
“어디로 가십니까?”
“도산공원 쪽이요.”
잘은 모르나 그쪽에 자동차 매장이 많은 듯하다.
오늘 계약을 한다고 했으니 미리 접선한 딜러가 그쪽에 근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흐흐흠흐흠.”
택시에 올라타서도 대표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사람들하고 일 안 해도 잘 먹고 잘 사는 걸 목표로 하죠. 그러려고 대기업 계약 무시하고 차린 회사잖아요.’
며칠 전 대화가 떠올랐다.
옳은 말이다.
유튜버 반찬용은 홍당무 엔터테인먼트 혹은 그보다 규모가 큰 토마토와도 얼마든지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직접 회사를 설립했다.
타인의 시선이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행동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부당한 처사, 비합리적인 일처리, 부조리한 사내 문화 모두 현실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다가 왔고 맞섰지만 끝내 내 발로 떠나왔다.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협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은 부분도 있었던 듯싶다.
‘남이 정해준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말자.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다이어트 인식과 방법 영상 제작회의를 할 때는 대표님과 서로 가치관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치기 어린 말이라고 여겼을 텐데 갖은 고난을 겪고 끝내 성공한 사람이 꺼내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마음만은 대기업처럼 갖자고요.’
돌이켜보면 대표님의 모든 언행이 일관된다.
회사를 운영하고,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이나 자동차를 사는 일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실을 모르는 이의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라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신념을 믿고 따르고 있다.
“여기예요.”
현대자동차 매장이다.
“대리점에서도 리스로 구입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저 그냥 할부로 사려고요.”
“리스로 구매하는 편이 비용처리에 유리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긴 한데. 일단 들어가죠.”
의문을 남긴 채 매장에 들어서니 직원이 나와 대표님을 맞이했다.
“혹시 반찬용 대표님?”
“네. 김 과장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딜러의 행동을 보니 접대에 익숙하고 대표님을 대하는 자세도 친근하지만 조심스럽다.
며칠 전에 나눈 대화를 통해 유추해 보면 대표님이 구입할 차량은 준대형급 승용차.
현대자동차에 왔으니 아마 신형 그랜저일 것이다.
최근에는 수입 차량과 제네시스가 있기에 예전과는 인식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버지 세대에는 성공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지금도 고급 차량으로 분류된다.
대표님의 상황과 가치관을 따져보면 최적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제네시스 G80 보시고 계셨죠?”
“네!”
“……?”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입이 찢어져라 함박 웃음을 머금던 대표님이 다소 당황했다.
“아니. 그게 처음에 그랜저랑 K8 중에 사려고 했거든요. 근데 계속 보다 보니까 이게 너무 예쁜 거예요. 봐요.”
대표님이 횡설수설하며 G80 카텔로그를 보여주었다.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제 눈이니까 괜찮아요.”
“…….”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묘한 배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너무 예쁘지 않아요? 전 이 하얀색이 예쁘던데. 무광인데 베르비에 화이트래요.”
“대표님 본인 차를 구입하시는 겁니까?”
“어……. 보다 보니까 이 예쁜 걸 사적으로 운행 못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업무 용도로만 쓰기엔 너무 불쌍하지 않겠어요?”
이미 틀린 듯싶다.
자동차에 빠져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지방 갈 때도 그냥 이거 쓰면 되니까. 회사 돈 아끼고 좋잖아요.”
“비용을 늘려 절세하려는 목적이셨습니다.”
“하지만 이 그릴을 보세요.”
내가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이 장난감 가게 앞에 서 있는 꼬마 같은 눈을 하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늦었다.
“대표님 개인 차량 구매에 토를 달 이유는 없습니다.”
“안 예뻐요?”
지금까지 지켜본 모습으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이 정도로 뻔뻔하게 나오니 황당할 지경이다.
“예쁩니다.”
“그렇죠?”
“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는데, 내 속도 모르고 따라 웃는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