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85화 (85/120)

치팅데이 85화

19.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1)

짐꾼 헬스장 1층 매장에 조리 도구와 집기 등이 도착했다.

한 달만 사용할 물건이라 식당집기 렌탈 업체와 단기 계약을 맺었는데 덕분에 싱크대, 가스레인지 설치에 애먹지 않았다.

차지찬과 백우진은 식탁과 의자를 날랐고 나와 주지승은 냄비 등 조리도구를 씻는 중이다.

“백우진, 똑바로 들라고.”

“들고 있잖아.”

“네가 제대로 안 드니까 자꾸 내 쪽으로 쏠리잖아.”

“그건 형 키가 작아서 그런 거고.”

“뭐, 인마?”

“키가 땅콩만 해서 그렇다고!”

“이 자식이.”

차지찬이 식탁을 내려놓자 백우진이 부리나케 도망쳤다.

하지만 평생 운동 한번 안 해본 녀석이 차지찬에게서 도망치기란 불가능했다.

통유리 너머로 머리끄덩이를 붙잡힌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매장 안으로 끌려왔다.

“쟨 대체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지 몰라.”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자 주지승이 씩 웃었다.

“저렇게 당해도 씩씩한 게 귀엽지 않아?”

“악! 이거 놔!”

“땅콩? 따앙콩?”

“빨리! 나 안 그래도 요즘 머리 빠진단 말이야!”

“그전에 할 말 있잖아.”

“경찰 아저씨!”

백우진이 주먹을 쥐고 팔을 붕붕 휘둘렀다. 어찌나 가냘픈지 솜으로 때려도 저보단 아프겠다.

“지찬아, 여기 박스 좀 뜯어줄래?”

주지승이 말했다.

아마 두 사람을 떼놓기 위해서 일부러 일을 주었을 거다.

“어휴.”

차지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백우진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는 다가왔다.

“이거?”

“어. 우진이 넌 도시락통 좀 쌓아주고.”

주지승이 백우진에게도 일을 주었다. 입을 잔뜩 내밀고 씩씩거리던 녀석이 택배 박스를 뜯으며 툴툴댔다.

“내가 힘들어서. 어? 좀 쉬면서 하자니까 말도 안 듣고. 지쳐서 못 드니까 뭐라 그러고. 땅콩만 해서 땅콩이라 했더니 머리 쥐어뜯고.”

“조용히 해.”

“뭐! 대머리 되면 형이 책임질 거야?”

차지찬이 벌떡 일어나자 백우진이 또 도망칠 준비를 했다.

주지승 말대로 그렇게 당하면서도 자기 할 말 꿋꿋하게 하는 녀석이 이제는 대단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박상철 PD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지찬아, 네가 참아.”

주지승이 차지찬을 말렸다.

“저 자식이 자꾸 놀리잖아.”

“그렇다고 머리카락을 뜯으면 안 되지.”

차지찬이 슬쩍 주지승의 머리를 보더니 이내 군말 없이 냄비를 정리했다.

차지찬, 주지승, 나, 백우진 순으로 나란히 앉아 각자 맡은 일을 하는데 잠시 말이 비었다.

“지찬이 형, 우진아.”

두 사람이 양끝에서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니 또 으르렁댄다.

“지금 우리 카메라 돌리고 있는 건 알지?”

차지찬과 백우진이 맞은편에 서 있는 카메라와 직원들 눈치를 살폈다.

반야식경의 최미카엘 PD는 물론, 짐꾼 채널 안상규 PD, 우지니어스 채널 이지혜 PD 그리고 우리 묵은지 PD 모두 나와 있다.

차지찬은 입맛을 다시더니 어휴, 한숨을 내쉬며 냄비를 정리했고 백우진은 그런 차지찬을 향해 몰래 혀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장사할 때 진짜 지켜야 하는 게 있어.”

주지승이 말을 꺼냈다.

“뭔데?”

“위생은 철저히.”

“맞네. 무조건 지켜야지.”

차지찬이 주지승의 말에 동의했다.

음식 장사인 만큼 확실히 위생만큼은 타협할 수 없다.

백승용차 도시락은 구독자들과 함께하는 공익성 활동이다. 우리 얼굴과 이름을 내걸고 하는 일인 만큼 무엇하나라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위생모가 안 보이네.”

음식에 머리카락이라도 떨어지면 안 될 것 같은데 위생모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거 지승이 형이 필요없다고 해서 주문 안 했어.”

재고를 담당하는 백우진이 말했다.

차지찬과 동시에 주지승의 머리를 봤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메인 요리사가 대머리니 적어도 머리카락 나올 일은 없을 듯하다.

“내 건 내가 챙겨올게.”

나도 음식을 하니까 따로 주문해야겠다.

“그리고 정량도 지켜야 해.”

“그치. 이 사람, 저 사람 양이 다르면 안 되니까.”

백우진이 의견을 내니 주지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200개나 되잖아. 딱 정량으로 나눌 수 있나?”

내가 의문을 제시했다.

200인분을 만들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주지승조차 이렇게 대용량으로 음식을 해본 적은 없다.

제대로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넉넉히 해서 넉넉히 줘. 운동 열심히 했으면 먹기도 잘 먹어야 하니까.”

차지찬이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다이어트 도시락이 아니라 벌크업 아니야?”

“더 움직이면 되지.”

이 인간 머릿속에는 그저 운동뿐이다.

“사실 먹는 사람에 따라서 먹는 양도 달라야 한단 말이지.”

주지승이 말했다.

“사람마다 필요한 양이 다르니까. 큰 사람하고 작은 사람, 운동 많이 하는 사람과 적게 하는 사람 다 따로 주는 게 맞지.”

“그럼 돈도 따로 받아야 하고.”

“그러기엔 너무 번거로우니까 어쩔 수 없지.”

“양이 안 차는 사람도 있겠는데?”

차지찬이 물었다.

“그러게.”

“흠.”

장사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줄은 정말 몰랐다. 그동안 꽤 많이 준비했음에도 매일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

“사이드는 어때? 도시락 하나로 부족한 사람은 사이드 메뉴 먹으면 되잖아.”

백우진의 아이디어가 그럴듯하다.

“사이드라.”

주지승이 잠시 그릇을 내려놓고 고민에 빠졌다.

“식재료를 더 다루기는 힘들고. 지찬이 말대로 아예 곱빼기를 만들까?”

“그것도 괜찮겠다.”

관리할 품목이 늘면 손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 그럴 바에는 같은 반찬을 조금 더 주는 방식이 효율적이다.

“그럼 도시락통 또 주문해야 해?”

백우진이 물었다.

“작은 걸로 500개만 주문하자. 얼마나 나가는지 보고 더 사고.”

“나 질문.”

아무래도 이해가 안 돼서 세 사람에게 물었다.

“골고루 많이 먹으면 그냥 건강한 돼지 되는 거 아니야?”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이어트 도시락, 건강 도시락으로 소개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자기가 먹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막냐?”

“사람마다 필요 영양분, 칼로리가 다 다르니까 본인들이 공부할 수밖에 없어.”

우리처럼 진심인 사람들조차 다이어트 도시락을 판매할 때는 고민이 많아진다.

마른 사람은 좀 더 먹어야 하고, 뚱뚱한 사람은 좀 덜 먹어야 하는데 장사하는 입장에서 음식을 정량으로 팔지 않을 수 없다.

시중에 판매되는 여러 다이어트 도시락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를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

“아.”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또 하나 생각났다.

세 사람이 나를 보길래 곧장 이야기를 꺼냈다.

“식당이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이 있어. 이건 진짜 절대, 절대 하면 안 돼.”

“뭔데?”

“다음에 잘해드릴게요.”

세 사람 모두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한 것 같아 설명했다.

“만약에 도시락에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어. 진짜 만약에.”

“그렇게 강조 안 해도 알아.”

“아무튼 그럼 죄송하다고 하고 도시락을 바꿔 주든 환불을 해줘야 하잖아?”

“그치?”

“근데 꼭 어쩌죠? 하고 묻는 곳이 있더라고. 진짜 어쩌라고.”

“있어. 있어.”

“그러고 다음에 잘해준다는 거야. 나 기분 나빠서 다음에 안 갈 건데.”

백우진이 격하게 공감했다.

“나도 있었어. 아니, 돈가스를 시켰는데 소스를 안 보낸 거야. 그래서 전화했더니 그냥 먹으래. 소스 보내달라니까 배달료 때문에 안 된대. 이게 말이야? 별점 1점 주려다가 말고 다음부터 안 시켰어.”

우리도 싫어요나 악플로 상처 받는 입장인지라 어지간하면 별점을 나쁘게 주지 않는다.

“말이 안 돼. 이게 회사로 치면 거래처에 납품 품목 하나 빠졌더니 다음 거래할 때 보내준단 말하고 똑같잖아. 당장 필요한 걸.”

차지찬도 공감했다.

“맞아. 맞아.”

“음식 장사하는 사람들 마음 이해해서 그냥 넘어가긴 하는데 기분 나쁘지. 나도 그런 곳은 다시 안 가게 되더라.”

주지승도 같은 입장인 모양이다.

“우린 배달 안 하니까 빼먹을 일은 없지만 만약에 실수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사과하고 대처하자.”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또 있어.”

백우진이 말했다.

“주문 순서 틀리는 거. 이거 진짜 기분 나빠.”

“얼마 차이 안 나는데 얘기하면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고?”

“먼저 음식 받은 사람도 내 눈치 보고.”

“잘못 간 음식 돌려받으면 찜찜하고.”

한마디씩 줄줄 나온다.

“그니까. 우린 순번 딱딱 지켜서 줘야 해. 틀리면 사과하고 다시 내주고.”

옳은 말이다.

“근데 남은 건 어떻게 해?”

차지찬이 물었다.

“뭘?”

“남한테 줬던 음식 넘겨주면 기분 나쁘다며. 새로 해서 주면 하나가 남잖아.”

“내가 먹을게.”

세 사람이 동시에 날 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왜? 어차피 남는 거 내가 먹어도 되잖아.”

“살이나 빼.”

“사리사욕 채우지 마.”

“4,000원 내고 먹어.”

정말 정 없는 인간들이다.

“식당에선 보통 어떻게 해?”

차지찬이 주지승에게 물었다.

“보통은 직원들이 먹지?”

“거 봐. 내가 먹는다니까?”

나라는 훌륭한 음식물 처리기가 있는데 또 무시한다.

“그럼 찬용이 형은 살 빼야 하니까 내가 먹을래.”

“너도 만만치 않아.”

“내가 뭐 어때서. 딱 보기 좋은데.”

“어쩌지?”

음식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손님에게 내어주기 모호한 상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 봤지만 답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지 택배 박스를 뜯고 그릇을 정리하는 소리만 간간히 나는데 최미카엘 PD가 입을 열었다.

“시식 코너로 활용하면 어떨까요?”

“시식?”

“다섯 개 정도 샘플을 만들어서 매장 앞에서 시식할 수 있게 하는 거죠. 그러다 손실이 나면 시식 코너에 넘겨주고.”

“홍보도 되고 괜찮네요. 짐꾼 헬스장 회원들한테 드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안상규 PD도 한마디 거들었다.

달리 더 좋은 의견이 없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참. 너희 모레 일찍 나와야 해.”

주지승이 말했다.

“왜?”

“재료 손질해야지. 그거 나랑 찬용이 둘이서 못 해.”

기본 도시락 200개와 곱빼기 분량, 시식 분량까지 생각하면 최소 250인분은 준비해야 하는데 둘이서는 확실히 힘들다.

차지찬이 백우진을 보더니 어깨동무를 했다.

“우진이가 홍보 좀 도와달라 하던데?”

“내가?”

백우진이 되묻자 차지찬이 갖은 인상을 다 썼다.

“어. 맞아. 아침부터 열심히 뛰어야지. 음식 남으면 안 되잖아.”

“어. 홍보 더 안 해도 돼. 나와서 나물 다듬어.”

어림도 없지.

주지승이 씩 웃으며 선을 긋자 두 사람이 아쉬워하며 어깨동무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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