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86화
19.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2)
건강 도시락 백승용차 오픈이 내일로 다가왔다.
첫날이라 사람이 꽤 많이 몰릴 것을 감안해서 하루 먼저 재료 손질하러 나왔는데, 벗겨도 벗겨도 줄지 않는 도라지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와.”
싱크대 앞에 서 있던 차지찬이 허리를 쭉 폈다.
“그냥 손질된 거 사면 안 돼? 이걸 언제 하고 자빠졌어.”
“비싸.”
“그 돈이면 좋은 거 사야지.”
백우진과 주지승이 차례로 답하자 차지찬이 신경질적으로 도라지를 벅벅 문댔다.
10㎏이나 되는 도라지를 손질하는 일이 보통이 아니라 분업을 하고 있는데.
차지찬이 흐르는 물과 수세미로 흙을 닦아내면 내가 받아서 단단한 뇌두와 잔뿌리를 잘라냈다.
그걸 넘겨주면 백우진과 주지승이 반으로 갈라 껍질을 벗겨냈다.
햇도라지는 벗기기 쉽다고 하던데, 작년에 난 거라 쉽지 않은 모양이다.
“크긴 더럽게 크네. 이런 건 어디서 구했냐?”
“안동.”
물건을 떼 오는 백우진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안동 도라지가 실하고 좋은 모양이다.
“하기 싫으면 가. 어차피 형 원래 일 안 하기로 했잖아.”
평소답지 않게 말투에 가시가 돋혀 있다. 어제부터 차지찬을 대하는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
“다 같이 하는데 어떻게 혼자 놀아. 의리 없게.”
“의리는 개뿔.”
“백우진.”
“자, 자.”
차지찬과 백우진이 또 으르렁대니 주지승이 중재에 나섰다.
“왜들 그래. 어?”
둘 다 말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 아무 문제 없었는데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싶다.
“뭔데.”
가만 두면 안 되겠다 싶어 나도 거드니 백우진이 울상을 짓다가 도라지를 탁 내려놓았다.
“저 형이 내 만두 뺏어 먹었단 말이야.”
“만두?”
너무 뜻밖의 말이라 나도 주지승도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차지찬이 수세미를 싱크대에 던졌다.
“너 진짜 치사하게 굴래? 그깟 만두 하나 가지고 여태 삐졌냐?”
“하나? 그 만둣국 만두 3개 들어 있었어! 고작 하나라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하면 만두가 돌아와? 내가 배고프다고 했지! 진짜 안 시킬 거냐고 물었잖아!”
“그렇게 배고픈 줄 몰랐지! 바로 찐만두 시켜 줬잖아!”
“난 국물 잔뜩 머금은 만두가 먹고 싶었다고!”
주지승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지도 못한 유치한 싸움에 김이 샌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아주 예민한 문제다.
“지찬이 형이 잘못했네.”
“뭐?”
“그치?”
차지찬과 백우진이 동시에 날 보았다.
“봐? 라면을 3개 끓였어.”
“왜 하필 3개야?”
“야식으로 먹기엔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좋은 양이니까.”
백우진과 차지찬이 눈을 찌푸렸다.
“아무튼 혼자 먹기 그러니까 형한테 물어보는 거야. 라면 먹을 거냐고. 진짜 3개를 먹어야 해서 물어보는 건데 괜찮다고 하다가 꼭 다 끓여 놓으면 한 입만 달라고 한 상황이잖아?”
“그래!”
“3개나 끓여놓고 한 입만 주는 게 그리 아깝냐?”
“단순한 한 입이 아니야. 100%가 아니게 되는 거라고.”
백우진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래. 뭐, 그렇다고 치고. 찐만두 시켜 줬잖아. 계산도 하고. 뭐가 문젠데?”
“국물을 안 머금었잖아.”
“넣으면 되지.”
“에이. 그게 그게 아니지.”
“아니지.”
이번 사건은 무조건 백우진이 피해자다.
녀석을 두둔하고 나서니 차지찬이 기가 차다는 듯 하 하고 헛웃음 지었다.
“우리가 만두 하나 못 나눠 먹을 사이였냐?”
세 사람 모두 어려웠던 시절.
컵라면 하나에 소주 한 병 사서 나눠 먹으며 밤을 지새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렇게 정 없는 사이였냐고.”
차지찬이 한 번 더 물었다.
확실히 만둣국의 만두 한 알은 소중하지만 우정은 그보다 소중하다.
“백우진 변했네.”
고개를 돌려 백우진을 탓했다.
“갑자기?”
“우리가 어떤 사인데. 컵라면 하나도 나눠 먹었잖아. 근데 어떻게 만두 하나 가지고 그러냐?”
“내 말이 그거야.”
“내가 보기엔 둘 다 잘못했어. 빨리 서로 안아주고 화해해.”
주지승의 말에 나도 차지찬도 백우진도 당황했다. 안아주고 화해하라는 말은 유치원 때나 들었었다.
“아, 어서.”
“굳이 그래야 하나?”
“뭘 또 그렇게까지.”
“왜? 아깐 유치하게 잘하더니 화해할 땐 창피해?”
주지승이 칼을 내려놓았다.
“빨리 해. 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일 못 해.”
차지찬과 백우진이 눈치를 보았다.
창피함과 자존심에 차마 화해는 못 하고 딴청을 부리는데, 주지승이 칼로 도마를 내려찍자 황급히 끌어안았다.
“PD님 이 부분 인트로로 쓸게요.”
묵은지에게 말하니 차지찬과 백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반찬용.”
“이 형이 제일 악질이야.”
“형, 인터넷 찾아보니까 쓴맛 빼려면 설탕물에 넣으라던데?”
불리한 화제를 계속 이어가서 득될 것이 없다.
주지승에게 도라지 손질 방법을 물었다.
“에이. 그러면 물렁해지지. 설탕 들어가니 좋지도 않고.”
“그럼?”
“굵은 소금으로 좀 버무리면 돼.”
“저걸 다?”
주지승과 백우진 옆에 차곡차곡 쌓인 도라지 무덤이 눈에 들어 왔다.
“장사하던 사람이면 뭐 노하우가 있겠는데. 아는 사람 없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해야지. 얼마 안 걸려.”
“도라지 쓴맛 빼면 안 좋대.”
백우진이 또 아는 게 있나 보다.
“쓴맛이 나는 이유가 사포닌인데 이게 몸에 좋은 성분이래.”
“맞아. 몸에 좋은 음식을 굳이 사포닌도 빼고 설탕 넣어서 안 좋게 만들 필요 없지.”
“맛이 없어지잖아.”
중대사항이다.
“고춧가루가 맛있어서 괜찮아.”
주지승이 턱짓으로 고춧가루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고춧가루만 영수증이 없던데?”
백우진에게 물었다.
매출 목록을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했는데 유독 고춧가루만 영수증이 따로 없어 의아해하던 차였다.
“이거 우리 큰이모 옆집 아주머니 사촌 언니가 고추 키우는데 그분한테 샀어.”
“대체 왜?”
차지찬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상한 고추 섞고, 철가루 나오고 그래서 아는 사람들한테 알음알음 사는 게 좋대.”
몰랐다.
“중국산이랑 국산 섞어 판다는 뉴스도 있었지. 아예 중국산을 국산으로 판매한 사람도 있었고.”
주지승이 설명을 보탰다.
“요새는 중국에서 재배되는 고추도 국산 품종이라 맛이나 품질은 크게 차이 없는데 위생 문제 때문에 꺼리는 사람이 많더라고.”
먹는 걸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은 주리를 틀어야 한다.
“자, 이제 통 하나씩 챙겨 봐.”
주지승의 말에 스텐으로 된 큰 대야를 하나씩 챙겼다.
손질한 도라지를 2.5㎏씩 나눠 담고 굵은 소금과 물로 씻었다.
“이래야 사포닌 성분은 남기고 아린 맛만 없어져.”
주지승이 올리고당을 들었다.
“당이다.”
“당이네.”
나와 차지찬, 백우진 모두 당분에 예민하다.
“이 정도 넣는 건 괜찮아. 단맛이 좀 있어야 맛있게 먹지.”
콜라로 수육을 해 먹는 인간이라 도저히 믿음이 안 가 실눈을 뜨고 째려보니 주지승이 피식 웃었다.
“올리고당 10스푼에 식초 10스푼, 소금 10스푼 넣으면 딱 맞아.”
“이렇게 많이 넣으라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넣어야.”
“맛있다~”
백우진이 주지승의 말을 이어받으며 대야에 재료를 넣었다.
“이제 잘 버무려주고 30분 동안 둘 거야.”
“이제 좀 쉬어?”
차지찬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쉬긴. 양념장 만들고 불고기 재워야지.”
차지찬과 백우진이 날 째려본다.
“왜. 뭐?”
“너 때문에 지금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방송만 하면 얼마나 좋아?”
“다 좋다고 해서 시작한 거잖아.”
“에휴. 말을 말아야지.”
주지승이 오이와 갖은 양념을 챙겨왔다.
“오이?”
“왜?”
“도라지도 맛없는데 오이까지 넣으면 누가 먹어.”
맛있는 것과 맛있는 것을 함께 먹으면 더 맛있어지지만 맛없는 것과 맛없는 것을 섞어 봤자 먹기 더 힘들어질 뿐이다.
“한 가지 재료만 들어가면 심심하잖아. 오이 넣으면 시원한 맛도 챙기고 식감도 재밌어져. 자.”
주지승이 오이와 굵은 소금을 나눠주길래 하는 수 없이 받았다.
굵은 소금으로 오이를 문지르자 거무틔틔한 것들이 나왔다.
“오이오이 코이츠 너무나 더러운.”
심심해서 드립을 쳤더니 주지승과 차지찬이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있는 대로 인상을 썼고 백우진은 키득거렸다.
“지찬이는 나랑 양념장 만들자.”
“응. 뭐 넣을까?”
“일단 고춧가루 600g.”
“잠깐!”
백우진이 소리쳤다.
“그 고춧가루 엄청 맵던데? 그렇게 많이 넣게?”
“매워야 맛있지.”
차지찬이 대신 대답했다.
“매운 게 왜 맛있어. 아픈 거지. 매운맛은 통각이야.”
“우리 반찬 나물에 불고기에 매운 건 도라지무침뿐인데 이거라도 좀 매워야지. 안 그래?”
차지찬이 내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아니야. 매운 건 아니야.”
“그렇게 안 매울걸? 기다려 봐.”
주지승이 작은 그릇에 양념장을 만들고 도라지를 무쳐서 나와 백우진, 차지찬에게 하나씩 먹여주었다.
“악.”
맵다.
혀를 탁 하고 치고 올라오는 매운맛이 보통이 아니다.
“물! 물!”
백우진은 호들갑을 떨며 물을 찾았지만 차지찬과 주지승은 별 반응이 없다.
“맛있기만 하구만.”
“그렇지? 이 정도는 해야 해.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맵게 먹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매운데?”
묵은지가 백우진에게 주려던 물을 빼앗아 마시니 백우진이 옆에서 발광했다.
“이것도 문제야. 매운 거 잘 먹는 사람은 괜찮아도 여러 사람이 먹는 거잖아. 적당히 매운 게 좋지 않아? 우리가 뭐 매운 음식 하는 식당도 아니고.”
“그런가?”
“쓰읍. 아쉬운데.”
주지승과 차지찬이 고민하길래 당장 고춧가루가 든 봉투를 빼앗았다.
“그럼 조금만 하지, 뭐.”
분명 조금만이라고 했는데 쏟아지는 고춧가루를 보니 불안해진다.
* * *
반나절에 걸쳐 완성한 반찬을 통에 담아 보니 제법 그럴싸하다.
메인은 돼지불고기고 곁반찬으로 봄나물인 방풍나물과 참나물을 무쳤다.
매콤한 맛으로 포인트를 주기 위해 도라지무침을 넣었고 뽀너스 느낌으로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이거 계란말이 맞아?”
“그냥 계란전 아니야?”
차지찬과 백우진이 내가 만든 계란말이를 지적했다.
“뭐가 어때서.”
“말이가 아니잖아.”
“아니면 어때. 맛만 좋으면 됐지.”
차지찬과 백우진이 하나씩 집어 먹고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새는 이상해도 주지승이 만들어준 것으로 부쳤을 뿐이니 맛은 좋다.
“마지막 테스트. 이거 4,000원이면 사 먹을 것 같아?”
주지승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답했다.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