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96화 (96/120)

치팅데이 96화

21. 열등감(2)

“백반따라 재밌게들 보시고 내일 봐요. 반하.”

“반하.”

방송을 마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늘 준비 많이 했네.”

백우진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씩 웃는다.

“두고 봐. 앞으로 다 이겨줄 테니까.”

“잘해 봐.”

“뭐야? 졌으면서 왜 그렇게 여유로워?”

“한두 번 질 수도 있지. 그래봤자 16승 3패인데.”

백우진이 부들부들 떨었다.

“16번이나 때렸는데 3번 정도는 맞아줘야 토론의 긴장감이 생기지. 안 그래?”

“일부러 져 준 것 같이 말한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약이 바짝 오른 백우진이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어떻게 된 녀석인지 놀려도 놀려도 질리지가 않다.

“아무튼 오늘 미안.”

원래 토론이 끝나면 같이 백반따라 모니터링을 하며 밥을 먹는데 사정이 생겼다.

“신경 쓰지 마. 약속 있다고 해서 밥 먹고 왔어.”

“그럼 다행이고.”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약속?”

“아, PD님하고 밥 먹기로 했어. 산책도 하고.”

백우진이 잠깐 멈추었다.

의아해서 고개를 기울이니 미간을 잔뜩 모은다.

“이 시간에? 밥? 산책?”

“어. 앞으로 종종 그러기로 했어.”

백우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지켜보다가 흐음 하고 신음을 냈다.

“왜?”

“형, 그거 진짜 하지 마.”

“뭔 소리야?”

“직장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퇴근 시간 이후에 상사 만나는 일이야. 주말에 등산하자고 부르는 회사랑 뭐가 달라?”

“아니야. 좋아서 하는 거야.”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돌아 보니 묵은지가 서 있었다.

“그렇죠? PD님.”

백우진의 오해를 풀어달라는 뜻으로 물으니 묵은지가 당황해했다.

“형은 진짜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면전에 대고 어떻게 싫다고 하냐?”

정말 불편했나 싶어서 걱정이 된다.

내 딴에는 편하게 대하고 있지만, 묵은지 입장에서는 어찌되었든 직장 상사니까 아주 편하진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요?”

묵은지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싫지 않습니다.”

“거 봐. 싫지 않다고 하시잖아.”

“그러니까 형이 듣고 있는데 어떻게 싫다고 말하냐고.”

백우진과 동시에 묵은지를 보았다.

“괜찮아요. 상처받지 않냐고 하면 그건 아닌데, 그렇다고 그런 일로 PD님한테 불이익 주고 그럴 사람 아니에요. 저 믿죠?”

묵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은지 씨도 좋아서 하는 거예요?”

백우진이 굳이 다그쳐 물으니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봐. 우리 PD님 얼마나 똑부러지는데.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딱 말하는 분이야.”

“신기하네. 우리 직원들은 주말에 뭐 하자고 하면 싫어하던데.”

“뭐 하자고 했는데?”

“책 토론.”

이 녀석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자체가 부정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주말에 모이는 게 문제일 뿐, 책 토론이 잘못되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태도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백우진이 궁시렁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우리도 퇴근하죠.”

“네.”

* * *

“보통 일주일에 0.5㎏에서 1㎏ 정도 증량하는 걸 목표로 한대요. 처음에는 미음 같은 것을 하루 세 끼 규칙적으로 먹어서 소화기관을 회복한 다음 골고루 먹는 게 중요하대요.”

묵은지가 건강해지려고 마음먹은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했다.

거식증을 오랜 기간 앓았던 만큼 조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도 중요한데 비타민이나 무기질 부족이 가장 위험하대요. 그러니까 이거 꼭 드세요.”

미리 주문해 두었던 종합 비타민과 칼슘, 비타민D를 꺼내놓았다.

“이건.”

“근데 갑자기 많이 먹으면 안 좋아요. 리피딩 신드롬이라고 열량이 급격이 흡수되면 수분전해질 대사에 이상이 생긴대요. 정확히 뭔지는 모르는데 아무튼 엄청 위험하니까 지금은 식사 패턴을 갖추는 것만 생각하죠.”

손으로 영양제를 감싼 채 날 빤히 보는 묵은지를 보며 웃었다.

“많이 알아보셨습니다.”

“PD님 일인데요. 뭘.”

“감사합니다.”

묵은지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한 채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죽 나왔습니다.”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사실 죽은 소화가 너무 잘 되어서 다이어트에는 좋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소화기관이 오랫동안 제 역할을 못해 기능이 정지해 있다시피 한 묵은지에게는 제격이라 이번 주 내내 저녁은 죽이었다.

“저 때문에 식사 제대로 못 하셔서 마음에 걸립니다.”

죽을 몇 번 떠먹으니 묵은지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맨날 현미만 드셔 보세요. 이런 핑계라도 대서 흰쌀 먹는 게 얼마나 기쁜데.”

묵은지가 작게 웃었다.

“홍당무에 다닐 때는 생각도 못 했던 일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외모에도 자신이 없었고 성격도 어두운 편이라 다름 사람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

“그렇게 하면 속으로 비웃더라도 겉으로는 같은 회사 동료 정도로 대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

“그때는 애써 모른 척했지만 돌이켜보면 열등감이었습니다.”

선뜻 위로하지 못한 이유는 묵은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상처 때문에.

주변 시선이 신경 쓰여서 외출도 삼가고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익숙해져서 나름 혼자 있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데.

때때로 밀려드는 고독의 파도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전하곤 한다.

그러면 조금씩 사라지는 백사장 모래처럼 아무도 모르게 마음이 깎여 나간다.

“나도 조금은 알아요.”

묵은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 마음 조금 알아요.”

나는 상담사도 의사도 아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다만 묵은지가 느끼는 감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조금이라도 떨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묵은지가 작게 웃었다.

“같은 팀에 김서진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알아요. PD님 그만뒀다면서 찾아왔거든요.”

“아.”

묵은지가 옛 일이 생각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김서진이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었다.

“조금 짜증 나는 사람이었지만.”

“큽.”

묵은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뇨. 저도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계속하세요.”

묵은지가 또 한 번 웃었다.

“키도 크고 날씬하고 잘생겼고 무엇보다 팀원들이 잘 따랐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는데도 회사의 마당발로 인망을 얻었습니다.”

싸가지 없고 음흉한 인간으로 봤는데 의외로 사람들과 잘 지냈던 모양이다.

“내심 그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모난 구석 없이 사람들과 잘 지내니까 업무라도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PD님이 훨씬 잘하셨어요.”

묵은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그 사람 말을 믿었습니다. 팀원도 팀장도.”

“홍당무 나온 게 그 사람 때문이었어요?”

“제 어딘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봅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문제 삼았고 팀을 대동해 저를 압박했습니다. 숙이고 들어가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억울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되었습니다.”

“네?”

묵은지가 날 보면서 작게 웃더니 미음을 한 술 떠먹었다.

* * *

└이걸 믿냐? 쟤들이 뭐가 좋다고 봉사를 해ㅋㅋㅋ 기업 스폰 땅겨서 한탕하려는 걸 잘도 포장했넼ㅋㅋ

└누가 기획했는지 오늘 백반토론 노잼이네. 예전엔 재밌었는데 기획자 잘못 데려온 듯

└이딴 게 조회 수 100만? 찬용 님 제발 기획자 바꾸세요 옛날 영상이 더 재밌어요

└반찬용 나만 보기 싫냐? 차지찬은 건물 제공해, 주지승은 요리해, 백우진은 물건 떼오고 매출관리하는데 반찬용은 하는 게 뭐임? 전부터 빨대 꽂는 거 역겨웠는데 이젠 아예 대놓고 하네

└으 씨발 이 돼지 새끼 좀 안 보이면 안 되나?

“……음?”

어느 순간부터 악의가 느껴지는 댓글이 늘어났다.

영상을 찾아보니 각기 다른 아이디가 여러 영상에 걸쳐 악플을 달고 있다.

구독자가 늘어나면 병신 보존의 법칙에 의거해 악플도 비례해서 늘어나긴 한다만.

요 며칠 사이에 갑작스레 늘어난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하다.

혹시나 싶어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를 돌면서 반찬가게, ㅂㅊㄱㄱ, 반찬용, ㅂㅊㅇ, 찬용, ㅊㅇ 등 나와 관련된 키워드를 검색했다.

“평소랑 똑같은데.”

크게 화제가 된 글이 없다.

평범하게 이번 영상이 어떠했다는 감상이나 내 뱃살과 허벅지 근육에 대한 감평이 주를 이루었다.

만약 내가 실수를 해서 그것 때문에 욕을 받는다면 자연스럽지만, 갑작스레 여러 명이 악플을 다니 의아할 따름이다.

더욱이 이상한 건 기획자도 욕하고 있단 것이다.

새 편집자가 들어와서 기존 스타일과 달리 편집이 이뤄지면, 가끔 편집 스타일을 지적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인데.

기획자를 비난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서 대답하니 묵은지가 들어왔다.

내 모니터를 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철을 건넸다.

“이게 뭐예요?”

“최근 반찬가게에 악플이 늘어나 알아봤습니다.”

“아. 저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문제 있는 영상이 있었어요?”

묵은지가 준 서류철을 열었다.

악플과 그것을 단 닉네임, 댓글이 달린 시간 등을 정리해 두었다.

“고소하려고요?”

“구글에서 수사 협조를 잘 안 하는 편이라 고소한다 해도 과정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럼 이건 왜.”

“어느 정도 특정은 가능합니다.”

묵은지가 다가왔다.

“악플을 단 사람의 닉네임이나 프로필 사진을 클릭하면 아이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악플러 50명을 추려 아이디를 확인해 보니 그중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아이디가 있었습니다.”

“네?”

@rwop1811 @rwop1813

@rwop1814 @rwop1815

@aw1re2sd3 @aw2re3sd4

@aw4re5sd6 @aw5re6sd7

묵은지의 말대로 일부 숫자만 변경한 아이디가 여럿이다.

“할 짓 없는 놈들이 부계정 만들어서 달고 있나 보네요.”

“할 짓 없는 놈이 아닙니다.”

의아해서 고개를 돌리니 묵은지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어 깜짝 놀랐다.

다급히 상체를 뒤로 미니 묵은지가 이상해한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쭉 모니터링한 결과 이 댓글 모두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사이에 등록되었습니다.”

“그게 왜요?”

묵은지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할 짓 없는 사람이 깨어 있을 시간이 아닙니다.”

“그리고요?”

“규칙적으로 활동하지도 않습니다.”

“……또?”

“일반적인 회사의 근무 시간입니다.”

“설마 뭐 댓글 조작하는 그런.”

“맞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