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97화
21. 열등감(3)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다가 묵은지의 단호한 태도에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절대 허황된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 곳이 있어요? 악플을 달아서 얻는 게 없잖아요.”
“의뢰를 받습니다.”
“아.”
“비슷한 일은 많습니다. 다수의 계정과 매크로를 사용해 채널 규모를 늘려준다거나 시청자 수를 조작, 홍보해 주기도 하고, 불법자금을 세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얘기는 들어본 적 있다.
내게도 가끔 채널을 성장시켜 준다는 수상한 메일이 오곤 했다.
시장이 커지니 별별 인간이 다 붙는 모양이다.
“근데 저한테 이럴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싫다는 이유로 이런 일까지 할…….”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
나름 인지도를 쌓고 있으니 그냥 내가 싫은 사람,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업체의 손을 빌려서까지 안 좋은 여론을 만들까 싶다.
게다가 방송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가끔 나올 때는 종이가방을 뒤집어쓰는 묵은지에마저 악플을 달 이유가 없다.
“짚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네?”
“반찬가게를 향한 비난에는 저에 대한 이야기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통 영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집자를 언급하는데 기획자, PD로 지칭하는 걸 보니 저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가요?”
“……최근 몇 년 동안 다른 사람과 교류한 일은 없었습니다. 알고 지낸 사람은 홍당무 엔터테인먼트 직원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반찬가게에서 일하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홍당무에서 한 사람뿐이고요. 한 사람이었다고 말씀드리는 게 정확할 듯싶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같은 팀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한 달 전쯤에 연락을 했습니다. 제가 나간 뒤로 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고. 자기도 퇴사한다고. 이직 준비 중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제 근황을 묻기에 이곳에서 일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심증일 뿐이지만 아마 그 사람은 아닐 겁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김서진 대리나 오형만 팀장 귀에 들어간 듯싶습니다.”
또 그 인간이다.
“제가 홍당무를 나올 때 김서진 대리가 여론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인간은 대체 PD님한테 왜 그래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홍당무에서 거래하던 업체가 있으니 그쪽에 의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깜짝 놀랐다.
“어딜요? 댓글 조작하는 곳하고요?”
“홍당무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이용한 적은 없습니다만, 김서진 대리는 그걸 미끼로 계약을 따왔고 성과를 냈었습니다.”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라면 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업체다.
대기업에서 지분을 사들여 투자하면서 여러 인터넷 방송인이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범죄단체와 연을 맺고 있다니 충격이다.
“죄송합니다.”
묵은지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PD님이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요.”
“제가 이곳에 없었다면 피해받을 일도 없으셨을 겁니다. 이번 일은.”
“PD님 때문이 아니에요.”
묵은지를 봤다.
그녀가 사용하는 책상은 항상 정돈되어 있고, 사무실을 함께 청소할 때는 적당히 하자고 말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자막 한 줄, 댓글 하나 빼먹지 않고 영상 하나 만들 때도 몇 번이고 확인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꼼꼼하다.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면 더할 나위 없으나, 내가 보기에는 상처가 더 크게 작용하는 듯싶다.
비웃음과 조롱, 불합리한 일을 당했고 그로 인해 너무나 많이 상처받아서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가 그녀를 강박적으로 몰아가고.
동시에 모든 것을 본인 탓으로 돌리고 있다.
사실 섭식 장애보다 무서운 건 낮아진 자존감과 우울증, 지독한 자기비하다.
이제 겨우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려 노력하는 그녀가 같은 경험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PD님, 분명히 말해요. 이 일은 PD님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에요. 세상 어떤 사람이 당한 사람 탓을 해요?”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에요. 전에도 말했죠? 길 가다가 미친놈 만나면 다음부터 조심할 순 있다고. 그렇다고 본인이 그 길로 걸어간 게 잘못은 아니라고.”
묵은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PD님 때문에 반찬가게가 피해 입었다고요? 그럼 제가 PD님 원망해야 해요?”
우물거리던 입술을 꽉 깨문다.
“제가 정말 그러길 바라요?”
고개를 젓는다.
“그래요. 저도 PD님도 피해자예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요. 생각도 하지 마요.”
“…….”
“그런 생각 해서 책임진다, 나간다 이런 말 하기만 해요. 나 정말 평생 PD님 안 볼 거예요.”
“그건.”
묵은지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 당장은 힘들겠죠. 근데 지금 이 순간부터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면 나 진짜 바보구나 생각하세요.”
“대표님.”
“말하지 마요! 이해가 안 되면 받아들여요. 내 말이 맞아요. PD님이 틀렸어요.”
말을 뱉고 보니 뭔가 너무 강압적으로 말했나 싶긴 한데.
이 정도로 강하게 나가야 내 말을 조금이나마 들을 것 같아 사족을 붙이진 않았다.
묵은지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서 있기 힘들어 보인다.
나도 조금 지쳐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벌컥 들이켰다.
숨을 돌리고 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우리는 한동안 입을 닫고 있었다.
“대표님.”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묵은지가 입을 열었다.
“네.”
“이 일은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지금 내가 뭘 가장 신경 쓰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PD님.”
묵은지와 시선을 맞췄다.
“막말로 그깟 악플 수십, 수백 개 달려도 변하는 거 없어요. 전 반찬가게 좋아해 주시는 분들 믿어요. 저랑 매일 5~6시간씩 소통하던 사람들이에요. 그딴 헛소리에 동조할 사람들 아니에요.”
묵은지는 눈을 마주 보며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악플이 여론에 영향 주겠죠. 당연히 주겠죠. 근데 요새는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헛소리하는 애들이 오히려 욕먹어요. 우리 시청자들 바보 아니에요. 세상에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보다 똑똑한 사람이 4,000만 명은 될걸요?”
겸손하게 4,000만 명이라고 했지만 상위 50%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전 이 일 크게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열받아서 오늘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드시 잡아내서 벤치프레스 80㎏을 드는 내 흉근 자랑 좀 하고 싶다.
“근데요. PD님이 이 일 때문에 저한테 죄책감 느끼고 후회하고 자기비하하고 또 책임감에 억지로 버티는 거. 그건 정말 신경 쓰여요.”
진심이다.
“대표님 마음은 알겠습니다.”
마음이 잘 전달된 듯싶어 다행이다.
“그래도 이 일은 제게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하게요?”
“예전에는 이런 일을 겪어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경찰도 구글이 협조하지 않아 못 잡는 사람을 어떻게 잡는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 * *
모든 임원에게 사고뭉치로 낙인찍히고, 오형만 팀장에게도 미운털이 박힌 김서진 대리는 죽을 맛이었다.
회의 도중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며칠이나 겪으니 이직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좁은 업계일수록 경력자에 대한 평판 조회가 이뤄지기 쉽고, 좋은 말이 나올 리 만무했다.
“미치겠네.”
이미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김서진은 근무 시간에 옥상에서 줄담배를 이어갔다.
“어. 여기 계셨네.”
같은 팀 박형욱 사원이 담배를 꺼내며 설렁설렁 걸어왔다.
여기 계셨냐는 말투와 걸어오는 모습,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 하나하나가 김서진의 눈에 몹시 거슬렸다.
“다리 풀어.”
“아. 예.”
박형욱이 몰랐던 척하며 씩 웃고는 다리를 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놈이 회사 내 입지가 좁아진 걸 눈치채고 벌써 기어오르는 듯했다.
“억울해서 어떡해요?”
“뭘.”
“대리님 과장 못 다실 것 같던데?”
“뭐?”
“팀장님도 그러시고. 이직 알아보는 게 낫지 않아요?”
“이 새끼가.”
“새끼 새끼 하지 마시고요.”
김서진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도 이 개떡 같은 곳에서 더는 못 해 먹겠더라고요. 하, 진짜 묵은지 때문에 이게 뭐야.”
박형욱의 말에 김서진이 이를 갈았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묵은지는 기본적인 관계 형성도 못 하는 음침한 인간이었다.
그런 주제에 성과는 항상 김서진보다 잘 내었기에 지난 몇 년간 줄곧 눈엣가시였다.
몇 달 전 스스로 퇴사한 이후로 겨우 팀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거늘 이제는 밖에서도 피해를 주고 있었다.
“대리님 저번에 그건 뭐, 진행되고 있어요?”
“댓글?”
“보니까 별 반응 없는 것 같아서요.”
김서진이 코웃음쳤다.
“두고 봐. 반찬용이 묵은지 안 내치고 뻐기나.”
허세였다.
박형욱의 말대로 반찬가게와 묵은지를 향한 여론 조작 효과는 미미했다.
김서진이 항의했지만 업체에서는 돈이 부족하다고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범죄행위라 신고를 할 수도 없었고 김서진은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답답함을 느낄 뿐이었다.
“근데 그거 얼마나 해요?”
“왜. 너도 하게?”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가격에 따라 다르죠?”
“아서라. 그런 데랑 엮여서 좋을 것 없다.”
“에이. 뭐, 대리님은 다 하시면서. 그러지 말고 연락처만 좀 알려줘요.”
김서진이 귀찮아하는 티를 내며 박형욱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근데 연락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해요?”
“그냥 물어보면 되지.”
“이런 거 처음이라서요.”
“그니까 뭘 하고 싶은지 얘길 해야 알려주든 말든 할 거 아냐.”
박형욱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실은 전에 묵은지한테 연락했단 말이에요.”
“네가? 왜?”
“이직 생각나서 물어봤죠. 그래서 대리님한테도 걔 어디 있는지 알려줬잖아요.”
김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돈을 어마어마하게 받더라고요. 연봉 인센티브 합치면 5,000 넘는다고 하대요?”
“웃기시네.”
“그니까요. 근데 좀 혹하기도 해서 어떻게 자리 좀 만들어 줄 수 없냐. 안 되면 친한 유튜버 많으니 다리 좀 놔줄 수 없냐 했더니. 와.”
“뭐래?”
“저 같은 게 어떻게 그러냐고 하더라고요?”
“미친.”
“제가 열이 안 받게 생겼어요?”
김서진은 박형욱의 태도가 드디어 납득되었다.
“내가 뭐 제대로 안 할까 봐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어?”
“아이. 저야 대리님 믿죠. 근데 나도 당한 게 있으니까 손 좀 거들고 싶다. 이 말이고.”
김서진이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박형욱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한테 200만 보내.”
“예? 200이요?”
“뭘 놀래?”
“그렇게 많이 들어요?”
“그럼 인마, 이런 일이 뭐 쉽게 되는 줄 알았어?”
“아. 그렇긴 한데. 그럼 뭐, 거래는 어떤 식으로 하는데요? 보여줄 수 있어요?”
“하지 마. 하지 마.”
“에이. 본 게 없는데 어떻게 200을 드려요. 대리님이 중간에 드실 수도 있고.”
“이 새끼가 아까부터.”
“아니, 뭐. 그럼 그쪽이랑 연락한 내용 같은 거라도 보내주시면 믿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