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99화 (99/120)

치팅데이 99화

21. 열등감(5)

“네가 한 짓이야?”

김서진이 한껏 위협하며 묵은지에게 다가갔다.

“네가 한 짓이냐고 묻잖아!”

“당신이 한 짓입니다.”

묵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김서진을 노려보았다.

“뭐?”

“실제로 없었던 미팅을 핑계로 무단 결근하고 본인이 책임지지 못할 특약사항을 조건으로 허위 계약을 한 사람도 당신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오형만한테 꼰질렀냐고 묻잖아!”

“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뭐?”

“당신 같은 쓰레기 때문에 내 손을 더럽힐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당신에게 일어난 일은 당신이 저지른 죗값일 뿐입니다.”

“이게!”

“죄가 하나 늘어도 괜찮습니까?”

김서진이 손을 들어올렸지만 묵은지 태연했다.

“아오. 이걸.”

“허세를 부릴 거라면 티 내지 마십시오. 그럴 생각조차 못하겠지만.”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말투로 속을 긁어대니 약이 바짝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묵은지의 말대로 차마 때릴 수는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처리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폭행 전과까지 가질 순 없었다.

“지금 느끼는 무력감을 잘 기억해야 할 겁니다.”

묵은지가 경고했다.

“홍당무, 비오네스. 홍당무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았던 방송인 모두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습니다.”

비오네스는 김서진이 여론 조작을 의뢰한 업체였다.

묵은지가 그 이름을 언급하니 의심은 이내 확신이 되었다.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이 묵은지가 계획한 일이었다.

“죗값을 치르고 그런 뒤에는 이쪽은 눈에도 입에도 담지 마십시오. 숨 죽여 얌전히 지내십시오.”

“네가 뭔데? 어? 네까짓 게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당신이 3개월 정도 공들여 제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습니다.”

오형만 팀장과 팀원들을 부추겨 묵은지를 압박하고 모함한 일이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했던 일을 고작 3일 만에 해냈습니다.”

김서진이 피식 웃으며 허세를 부렸다.

“웃기지 마. 내가 이 바닥에서 몇 년을 있었는지 잘 알 텐데?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잘 압니다.”

“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머저리인 것을 알기에 내버려 뒀습니다.”

김서진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커리어는 시작입니다.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시덥잖은 일을 했다간 더 많은 것을 잃을 겁니다. 전 그럴 수 있습니다.”

협박이었다.

묵은지는 김서진에게 이 이상의 제재를 가하는 일이 범죄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제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지만, 만약 김서진이 선을 넘는다면 기꺼이 그럴 각오를 다졌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자존감과 그것을 되찾아준 사람을 잃을 순 없었다.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묵은지가 한껏 허세를 부렸다.

“지금 나 협박하는 거냐?”

“그 정도 말은 알아들으니 다행입니다.”

김서진은 묵은지의 가라앉은 눈을 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눈동자에서 그 어떤 망설임도 찾을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화가 났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묵은지의 말대로 고작 3일 만에 그의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징계위원회에서는 김서진이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서 저지른 모든 편법 행위가 증거와 함께 낱낱이 공개되었고 그중에는 비오네스와 주고받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형욱이 묵은지 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비오네스에게 홍당무에서 진행하는 일이라며 할인받고 일을 의뢰한 정황이 모두 공개되어 버렸다.

더욱이 박형욱에게 받은 200만 원 중 절반을 챙긴 일에 오형만 팀장이 학교폭력 사유로 논란이 된 3명의 유튜버와 계약 절차에 문제가 있음을 증언하니 김서진이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나한테 왜 이래.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김서진이 악에 받쳐 외쳤다.

“당신은 제게 왜 그랬습니까?”

김서진의 말문이 막혔다.

“그때 당신이 제 마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웃기지 마. 네가 시작한 일이야.”

김서진이 이를 바득 갈았다.

“처음부터 그랬어. 잘난 척, 열심히 일하는 척, 유능한 척하면서 내 일은 모두 가져가지.”

김서진은 묵은지의 시선이 몸서리치도록 싫었다.

보고서에 한 줄 채우기도 급급했던 자신과 매주 성과를 보이는 묵은지는 항상 비교되곤 했다.

보고를 마치고 돌아선 묵은지는 항상 자신을 깔보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할 때마다 이를 악물고 계약을 성사하려 분주히 움직였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묵은지 이야기를 꺼냈다.

퇴사하기 직전, 반찬가게와 연락할 때마저도 마찬가지였다.

“넌 네가 일을 잘하는 줄 알지? 천만에. 같이 일하는 사람은 조금도 신경 안 쓰고 저만 잘나면 되는 줄 알아? 너 같은 인간은.”

“열등감이었습니까?”

“……뭐?”

“예상 밖이지만 흥미 없습니다.”

묵은지의 눈에는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업무 보고를 하고 돌아설 때와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왜 날 못마땅해하는지 들어줄 마음 없습니다.”

묵은지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씩씩거리는 김서진에게 말했다.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를 포함한 국내 모든 MCN 업체와 매니지먼트, 인터넷 방송인이 당신을 손가락질할 겁니다. 당신이 알고,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이 김서진이란 사람을 경멸할 겁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누군가도 속으로는 당신을 비웃을 겁니다.”

“…….”

“당신은 범죄자니까요.”

김서진이 다시 손을 들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틀어졌다.

죄 하나 더한다 해도 크게 개의치 않다는 자포자기였다.

그러나 김서진은 마지막 발악마저 할 수 없었다.

안간힘을 써 손을 휘두르려 했지만 우악스러운 힘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짓이에요?”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반찬용이 김서진의 손목을 붙잡고 물었다.

“이거 놔. 안 놔?”

당황한 김서진이 몸부림쳤지만 반찬용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손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으으으으아악!”

김서진이 고통에 소리를 지르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반찬용이 갑작스레 나타나 놀랐던 묵은지가 주변 시선을 인지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찬용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폭행당할 뻔한 본인을 도와주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반찬용이 손에 힘을 푸니 김서진이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너희 뭐야. 어? 나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뭐냐고!”

이미 눈이 돌아간 김서진에게 주변 환경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 그래. 둘이 같이 일한다더니 아주 사람 한 명 잡으려고 작정을 했지? 응?”

“당신 따위에게 신경 쓰실 분 아닙니다.”

묵은지가 나섰다.

“하. 저 돼지새끼가 뭔데? 뭔데 시발 신경 쓴단 만다야!”

“그 입 닥치십시오. 당신이 함부러 말할 분이 아닙니다.”

“왜? 같이 있다 보니 정이라도 들었어? 그래. 아주 끼리끼리 잘 어울리긴 하네.”

“닥치십시오. 당신 같은 쓰레기보다 훨씬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가요. PD님. 대화도 사람하고 하는 거예요.”

“아직 할 말 남았습니다.”

“어딜 가!”

“어허. 오지 마세요.”

반찬용이 다가오는 김서진의 가슴을 가볍게 밀쳤다.

김서진이 엉덩방아를 찧어 고통을 호소하자 반찬용은 그 틈에 묵은지를 데리고 돌아가려 했다.

“이 돼지새끼가 사람을 쳐?”

“어딜 봐서 돼지입니까? 어디서 유부녀 등쳐먹고 다니게 생긴 당신보다 훨씬 남자답고 귀엽습니다.”

“자, 자. PD님.”

“사과하십시오. 사과하라고 이 양아치 새끼야!”

“어우. 쉽새끼. 새끼양 귀엽죠. 그죠?”

반찬용이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묵은지를 자동차까지 끌고 갔다.

* * *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뜬금없이 사과하고 싶다며 찾아 뵐 수 있냐고 묻기에 무슨 일이냐고 하니 김서진에 관련된 일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마침 묵은지가 의심하고 있던 터라 잘되었다 싶었고 징계위원회가 열린다고 해서 이야기도 들을 겸, 마침 근처에 일이 있어 찾아갔는데.

그 와중에 오만 곳에서 연락이 왔다.

백우진, 차지찬, 주지승은 물론이고 그다지 교류가 많지 않았던 유튜버들도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일단 쉼없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홍당무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향했는데 그 앞에서 묵은지와 김서진을 발견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지켜보던 차, 김서진이 손을 들길래 뛰어가 겨우 말렸다.

내 생에 그렇게 전력으로 뛰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조수석에서 씩씩거리는 묵은지에게 물었다.

대답이 없어 기다리니 지난 3일 동안의 일을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냥 경찰에 고소할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해서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낸 묵은지의 행동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네요.”

“…….”

“이제 마음이 좀 풀렸어요?”

“아직입니다.”

묵은지의 얼굴이 여전히 굳어 있다. 며칠 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그래요? 욕 엄청 시원하게 하셔서 좀 풀릴 줄 알았는데. 평소에는 그런 말투였어요?”

묵은지가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표정이다.

“아닙니다. 감정이 올라와서. 평소에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 것치곤 되게 찰지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묵은지가 정색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웃음을 흘리니 더욱 당황한다.

“정말입니다.”

“믿어요. 믿을게요. 아니, 그리고 욕 좀 하면 어때요.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정말 아닙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한동안 고생 좀 했다.

“그러면 김서진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서 해고 통지하기로 약속받았습니다. 취업규칙에 범죄행위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경우는 당연 퇴직 사유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김서진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 재판 들어가지도 않았잖아요.”

“판결이 날 때까지 자택 대기할 겁니다. 같은 시기에 다른 회사에 취직하면 또 다른 계약 위반 사항이 늘어납니다.”

재판 결과가 나오려면 못해도 몇 달은 걸릴 거다.

항소까지 한다면 연 단위일 텐데 그 기간 동안 김서진은 무소득으로 지내야 한다.

저축을 알뜰히 해놨어야 할 거다.

“그리고요?”

“적어도 이쪽 업계에서 김서진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일하면서 연이 닿았던 사람에게는 모두 정황과 근거를 이메일로 보냈고 아마 조만간 커뮤니티에도 전파가 될 겁니다.”

다들 한 목소리 하는 사람들일 테니 알아서 소문을 내줄 거다.

이런 사건은 아주 좋은 안주거리니 누구 입을 통해서라도 알려질 것이다.

“대단하네요.”

“…….”

“그래도 위험하잖아요. 사람이면 몰라. 되먹지 못한 놈이 미친 척, 아니, 미쳤으니까 저러겠지. 아무튼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맞아주려 했습니다. 형량을 더 받아낼 생각이었습니다. 대표님께서 말리지 않으셨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아니죠. 그건 아니죠. 다치면 어떡해요.”

묵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좀 어떨떨하긴 한데. 시원하긴 하네요.”

“그렇습니까.”

“PD님은 안 그래요?”

묵은지가 고개를 돌렸다.

서로 마주보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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