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101화 (101/120)

치팅데이 101화

22. 으쌰으쌰(2)

“아이고. 아이고.”

방송을 마치고 나니 오후 9시가 되었다.

온몸에 힘이 없어 축 늘어져 있는데 나갔다 온다던 묵은지가 물을 가져다 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근데 왜 돌아오셨어요? 바로 퇴근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정리할 일이 남았습니다.”

“다음 주에 하셔도 될 텐데. 정말 안 쉬어도 되겠어요?”

나도 백승용차와 방송을 겸하면서 피로가 누적되었지만, 모든 일정을 함께하면서 김서진 일까지 처리한 묵은지는 더욱 힘들었을 거다.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다음 주 월요일에 휴가 쓰세요. 쉬어야 또 열심히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묵은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하곤 모니터를 보았다.

방송을 마쳤음에도 많은 사람이 채팅창에 남아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있다.

“대표님 말씀대로 믿어주셔서 다행입니다.”

반찬가게 구독자들이 그깟 악플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말한 적 있었다.

“센 척한 거였는데 다행이죠.”

“센 척이었습니까?”

“센 척이었죠.”

같이 작게 웃었다.

“신경 안 쓰였다면 거짓말이죠. 근데 그 이상으로 감동이었어요.”

묵은지가 날 빤히 본다.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지만 예전과 달리 표정이라든지 태도가 묘하게 따뜻하다.

“저는 정말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그것도 다른 일 다 하시면서 해결하신 PD님한테도 감동했고.”

“…….”

“여론 조작 정황 알려지니까 지승이 형, 지찬이 형, 우진이 다 일정 마치자마자 사무실로 오더라고요. 어차피 내일 백승용차에서 볼 텐데.”

묵은지가 씩 웃었다.

“와. 차지찬 진짜. 김서진 허리 접어버린다고 자기가 더 화내는 거 있죠? 말리진 못할 망정 백우진은 자기가 운전한다고 부추기고.”

“그랬습니까?”

“말도 마세요. 지승이 형이라도 가만 있어서 다행이긴 했는데 자꾸 자기 칼 가방 만지작대서 얼마나 불안했는데요.”

그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겨우 달래서 보내고 방송켰더니 평소에는 그렇게 놀려대던 사람들이 위로해 주고 응원해 주고. 뭐랄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있는 그대로 말했다.

“예전에는 친구도 없고 세상 혼자 산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러니까 내가 되게 바보 같은 생각을 했구나 싶었어요. 좋았다고요.”

묵은지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내 말을 들어주었다.

“고마워요, 정말.”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저도 혼자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습니다. 결국엔 혼자 살아가는 거라고. 어쩌면 나는 타인과 어울릴 수 없는 하자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대표님과 함께한 뒤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저도 괜찮은 사람일 수 있구나. 그런.”

묵은지,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 그리고 구독자들에게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그 벅차고 따뜻한 감정을 나도 줄 수 있었다니.

또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졌던 묵은지가 조금씩 본인을 찾아가니 이보다 기쁠 수 없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 * *

일요일.

백승용차 마지막 주를 앞두고 여의도에 모였다.

“으아아아.”

백우진이 팔을 쭉 펴면서 책상에 엎드려 물었다.

“진짜 마지막이야?”

“그러게. 벌써 그렇게 됐네.”

주지승이 아쉬운 듯 말했다.

“처음엔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되긴 되네.”

차지찬은 우리가 장사를 해낸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 차지찬만의 생각은 아니고 우리 모두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구독자들이 있으니 처음에는 도움을 얻는다 해도, 입맛을 속일 순 없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첫 도시락에 넣었던 방풍나물부터 어제 팔았던 닭볶음탕까지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하루하루 정신 없이 보내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아쉬우면 그냥 계속할까?”

“아니.”

“그건 아니다.”

“어. 안 해.”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다들 지친 모양이다.

“어차피 다음 주에 500개씩 하잖아. 그 정도면 됐지.”

사실 나도 아쉬움보다는 충족감이 더 크다.

한 달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이보다 더 열심히 잘할 자신이 없을 만큼 모든 힘을 다했기에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

“이거 봐 봐.”

백우진이 자세를 고쳐 잡고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뭔데?”

“우리 매출.”

“뭐야. 우리 흑자네?”

“구독자들이 보태라고 준 돈 다 넣어서 그래.”

“수수료도 안 떼고 넣었잖아.”

“응. 그거 빼면 이렇게 돼.”

백우진이 엑셀 표를 보여주었다.

5월 1일부터 27일까지의 영업일 24일 기준 총 지출액은 37,464,765원이다.

일반 도시락 하나 만드는 데 3,850원, 곱빼기는 4,100원이 들어서 총23,400,000원 지출.

사이드는 매일 메뉴가 바뀌어 평균 단가 915원에 일평균 183개가 판매되어 총 4,018,680원 지출.

무료로 나눠주었던 캔 음료의 평균 단가는 225원이라 하루 평균 250개씩 나눠주니 1,350,000원 지출.

인테리어 비용 및 주방 식기 대여료가 4,300,000원.

전기요금, 가스요금을 포함한 공과금이 대략 80만 원이었으며 기타 지출액이 5,596,085원이었다.

도시락 판매로 올린 수익이 28,992,000원이니 8,472,765원 적자라 할 수 있다.

“딱 우리 예상만큼 나왔는데?”

“그러게? 한 800만 원 정도는 손해일 줄 알았잖아.”

“더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맞아. 이것저것 필요한 게 생겨서 더 나올 것 같았어.”

“이 정도면 선방 아니냐?”

“맞지.”

다들 적자가 840만 원뿐이라며 좋아한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곱빼기랑 사이드가 도와줬어.”

백우진이 곱빼기와 사이드를 체크해 주며 말했다.

일반 도시락은 하나를 판매하면 150원 이득을 보았는데 곱빼기는 개당 400원, 사이드는 85원이 남아서 적자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

다함께 고개 돌려 환호하니 곱빼기와 사이드 생각을 해낸 주지승이 가슴을 펴고 두 팔을 벌렸다.

“또 협찬으로 아낀 돈이 많아. 사실 인테리어랑 식기 전부 우리 돈으로 했으면 430만 원으론 택도 없었어.”

“그렇긴 하지.”

“우리 후원 받은 것도 있잖아. 그거 더하면 어떻게 돼?”

“맞다. 꽤 모였던데.”

“후원액이 총 8,871,000원이니까 남은 돈은 398,235원.”

백우진이 설명을 마쳤다.

“손해는 아니네.”

“괜찮지 않나? 거의 40만 원인데?”

잠시 현실을 도피했던 모두 입을 닫았다.

월세 안 받고, 협찬에 시청자들 후원까지 받은데다 무임금으로 운영한 백승용차에 남은 돈이 고작 40만 원이다.

“돈 벌려고 한 거 아니잖아?”

“맞지. 맞지.”

어색한 웃음 뒤에 다시 정적이 돌았다.

“메뉴를 딱 정해서 운영했으면 비용을 좀 더 줄일 수 있었어.”

백우진이 입을 열었다.

“반찬을 매번 바꾸다 보니까 대량으로 떼올 수 없었잖아. 많이 사면 그래도 단가 줄일 수 있었는데.”

“골고루 먹어야 하니까 그건 좀 힘들지.”

“식당 하면 메뉴 줄이라는 게 이 때문인가?”

“장사만 잘 되면 신선도 유지에도 좋고. 조리 시간도 짧아지고. 단가도 낮출 수 있고.”

주지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적었다.

백승용차를 하면서 의욕을 많이 보였는데 피드백을 정리하는 것을 보니 정말 식당을 차릴 생각인 것 같다.

“진짜 우리 광고 안 받았으면 어쩔 뻔했냐?”

“그러니까.”

사실 백승용차 운영이 우리에게 큰 이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를 응원해 주는 구독자와 광고 덕분이다.

다섯 개 업체로부터 광고와 협찬, PPL을 진행해서 각각 8,000만 원 이상 벌었고.

그것은 모두 구독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무것도 없이 맨바닥에서 음식 장사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솔직히 우리 분수보다 훨씬 많이 벌었어. 난 이번에 광고 수익 보고 깜짝 놀랐다.”

“맞아. 우리가 어디 가서 그렇게 큰 돈을 벌어.”

차지찬, 백우진에게도 8,000만 원은 큰 금액이다.

사실 우리가 광고료가 많이 책정되는 부류로 속하지는 않아서 나를 포함해 백승용차 모두, 이번 광고료 덕분에 한 달 수입 기록을 한참 경신했었다.

“그게 다 우리 PD님 덕분이다. 이 말씀이야.”

묵은지 자랑을 하니 세 명 다 고개를 끄덕였다.

쿡쿡이뿐만 아니라 다른 업체들과의 협상도 성공적으로 체결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마지막까지 잘해보자고. 6월에 우리 돈 덜 쓰려면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지.”

차지찬이 말했다.

6월 말에 시작하는 국토대장정 및 봉사 활동을 말하는 건데, 백승용차로 번 돈과 우리 돈을 보태서 각 지역의 취약계층에 도시락을 나눠주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만들어 전하고 싶지만 이동하면서 도시락 만들 설비까지 준비하기엔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각 지역 도시락 업체를 알아보는 중이다.

부우웅-

핸드폰이 진동해서 확인해 보니 묵은지가 메시지를 보냈다.

“대충 이야기 끝났지?”

“왜? 약속 있어?”

“응. PD님이랑 영화 보기로 했어.”

약속 있냐고 물었던 차지찬이 날 빤히 보았다.

태블릿을 보며 매출 이야기를 하던 주지승과 백우진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일요일에?”

“응.”

“둘이?”

“응.”

세 명 모두 눈을 깜빡이다가 차지찬과 백우진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반찬용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차지찬이 말했다.

“뭐가?”

“인마, 그거 직장 내 괴롭힘이야. 묵은지 PD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그런 사람을 주말까지 불러다 괴롭히냐?”

“내 말이. 그냥 좀 쉬게 해줘. 은지 씨 도망가면 어쩌려고.”

“PD님이 먼저 말한 거야. 보고 싶은 영화 있다고 해서 어차피 보니까 겸사겸사 영화도.”

“어차피 본다고?”

“형 은지 씨 주말에도 출근시켜?”

“아니.”

듣자 듣자 하니 이 인간들이 날 악덕사장으로 확정 짓고 말한다.

“PD님이 섭식 장애가 있었단 말이야. 근데 한 2주 전부터 조금씩 식사를 시작했어. 어차피 나도 식단하고 운동하잖아. 그래서 같이 하기로 한 거야.”

“아니.”

“잠깐만. 계속해 봐.”

가만히 듣고 있던 주지승이 백우진을 막아서고 손목을 돌렸다.

“그래서 일 마치면 밥 먹으러 갔다가 산책 좀 하고. 주말에도 그러기로 했지. 혼자 하면 재미없잖아.”

주지승이 턱을 쓸었다.

“그것뿐이야?”

“어. 진짜 그것뿐이야. 나는 뭐 직장생활 안 해본 줄 알아? PD님한테 제발 좀 쉬라고 말하는 사람이야. 왜 이래?”

“그러기 전에 뭐 다른 말 한 거 없고?”

“무슨 말?”

“뭐 속에 있는 얘기라든지.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대화 같은 거 있잖아.”

“있었지?”

“무슨 얘기였는데?”

“아. 그건 프라이버시라서 안 돼. 내 얘기는 괜찮아도 PD님 얘기는 못 하지.”

“네 얘기만 해봐.”

주지승이 아까부터 꼬치꼬치 질문을 이어간다.

“왜?”

“일단 얘기해 보라고. 네 얘기 뭘 어떻게 했는데.”

“그냥. 옛날 얘기. 우리 회사 얘기. 근데 생각해 보니까 너무 많고 PD님 얘기랑 좀 엮여 있어서 말하기가 좀 그런데?”

“이거 봐. 이 형 나한테 맨날 투머치토커니 뭐니 하면서 또 꼰대짓했을 게 분명해.”

백우진이 나서길래 옆구리를 찔러 응징했다.

“내가 요즘 보니까 묵 PD가 너 보는 게 좀 달라지긴 했거든?”

“무슨 말이야?”

“언제였지? 왜. 전에 지찬이가 너주물거리고 있을 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차지찬이 버럭 소리쳤다.

“너 얘 허벅지랑 등 조물딱댔잖아.”

“그니까 그걸 왜 그렇게 표현하냐고. 징그럽게! 반찬용이랑 같이 다니더니 이 형도 말이 좀 이상해졌어!”

“형이 더 징그러웠어.”

정색하는 차지찬에게 한마디 해주자 조용해졌다.

“그때 묵 PD 반응이 좀 이상했거든? 근데 그 이후로 좀 다르더라고. 시선 같은 게.”

주지승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사실 나도 좀 느꼈어. 예전엔 좀 딱딱하고 벽도 있는 느낌이었는데 요새는 친해진 거 같아.”

“그게 다 착각이라고! 직장 대표 잘 대해주는 건 당연하지.”

백우진이 말했다.

열받는 놈이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다.

“그치? 그래서 나도 PD님 불편할까 봐 딱 식사랑 산책만 하고 보내드려. 눈치 보여서 그러신지 자꾸 안 가려고 하시더라고.”

“하아.”

주지승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뭐야? 왜 이래?”

“너 진짜 모르겠냐?”

“뭘?”

“묵 PD 너한테 마음 있네.”

잠시 사고가 멈췄다.

머리가 굴러가지 않아 입만 뻥긋대다가 고개를 돌리니 차지찬, 백우진과 눈을 마주쳤다.

“에이.”

“말도 안 돼.”

“아니야. 아니야.”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형 결혼은 어떻게 했어? 나도 아는 걸 모르네.”

“뭐가?”

“이건 내가 잘 아는데. 대화해 준다고 좋아하는 거 아니야. 웃어 준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밥 먹고 영화 좀 본다고 해서 마음 있는 거 아니야. 아, 이 형 진짜 모르네.”

“그니까.”

백우진을 보며 말하니 녀석도 키득키득 웃는다.

“이 사람이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잖아? 그거 무조건 착각이야.”

백우진이 간만에 옳은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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